조선시대의 기본적인 경제정책은 ‘농본상말(農本商末)’ 즉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겉으로는 이렇게 상업을 천시했으나 뒤로는 역관(譯官: 통역을 맡아보던 관리)들이 사오는 명나라의 고급 물품을 앞 다투어 사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 왔다.

그래서 역관들은 일찍부터 고려의 물품(인삼·은 등)을 연경(燕京)에 가져가 팔아 이익을 남기고 다시 그 돈으로 물건(비단 등)을 사와 이중으로 이익을 남길 수 있었기에 거부(巨富)가 많았다. 일반 사람들이 무역을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므로 역관은 양반 세도가와 공모해 독점적으로 무역을 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됐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부자가 칭찬받기란 매우 어렵다. 조선시대에도 부자들의 비리와 관련된 사건들이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이런 가운데 착한 부자로서 칭송을 받은 부자가 몇 명 있었다. 그중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영·정조 시대에 살았던 이규상(李奎象·1727~1799)은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 당대에 활동했던 180여 명의 인물을 기록하고 있다(이 책은 ‘18세기 조선 인물지’로 번역돼 있다). 여기서 ‘병세’란 ‘동시대’를 뜻하며, ‘재언록’이란 ‘빼어난 인물의 기록’을 의미한다.
[Book & Life] 조선시대의 착한 부자들
역관 홍순언의 선행

이 책에 기록된 홍순언(洪純彦)이란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다. 역관이었던 그가 중국 연경에 갔다가 천금으로 기생을 사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이 울면서, “나는 강남 사람으로 만 리 먼 곳인 이곳에 벼슬을 사는 아버지를 따라 왔다가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나 혼자 남아 여자 한 몸으로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이의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 장사 지냄)할 계책이 없기에 내 몸을 팔아서 비용을 벌면 장례를 마치고 깨끗이 몸을 지키고자 합니다. 그러니 오직 하루만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홍순언은 그 여인의 효성이 갸륵해 몸에 손을 대지 않고 그냥 장례 치를 천금을 주고 돌아왔다. 그 뒤에도 또 연경에 갔는데, 그 여인은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계실(繼室·후실)이 돼 있었다.

그 여인은 사람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면서, “내가 부모의 장례를 지내고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의 은덕인가”라고 말하며, 남편 석상서에게 말해 왜군을 치는 군사를 조발하도록 했고, 한 수레 가득 비단을 선물했는데 비단에다 모두 ‘보은(報恩)’이란 글자를 수놓았다.

홍순언이 조선으로 돌아와 집을 샀는데, 그 마을 이름이 ‘보은방(報恩坊)’으로 불리게 됐다. 뒷날 ‘보’자가 ‘고(高)’자로 바뀌었는데, 지금의 서울 소공주동(小公主洞)에 있는 ‘고은당동’이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 홍순언은 이 공로 때문에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군사를 파견한 것은 모두 병부상서 석성 한 사람의 공이며, 이는 역관 홍순언이 한 여인에게 은혜를 베푼 데서 시작됐다고 적었다.

조선시대에 역관이 이렇게 상인 역할을 겸하면서 사무역을 해 큰돈 버는 것을 조정에서도 모를 리 없지마는 당시에는 역관들 스스로가 수행 경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제도적인 맹점 때문에 완전히 금지시키기 어려워 묵인했던 것이다.

또한 역관 중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인삼 거상 임상옥(林尙沃)도 있었는데, 그가 베이징에 갔을 때도 중국 상인들은 귀국 날짜를 기다려 인삼 값이 떨어지기를 기다렸고 이를 눈치 챈 임상옥이 “영약을 천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파는 것은 조선의 영토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불을 붙이려 하자 그 자리에서 값이 열 배나 뛰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급인전’을 만든 최순성

또 하나의 이야기는 조선 말기에 역사학자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이 쓴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에 있는 최순성(崔舜星)의 이야기다(이 책은 ‘송도인물지’로 번역돼 있다). 여기서 ‘숭양’은 개성의 별칭이고, ‘기구’는 ‘나이 많은 사람’이란 뜻이다. 이 책은 성종 때부터 위아래로 400년 동안 80명 남짓의 개성 사람을 찾아내어 그 행실과 사적을 찬술한 것이다.

조선 정조 중기에 개성의 거부 최석찬(崔錫贊)의 아들로 태어난 최순성이란 자는 그의 집안이 대대로 내려온 업으로 누만의 재산을 모아 고을의 큰 부자가 됐다. 최순성은 부모가 죽자 천금으로 장례를 지낸 뒤 “부모님이 안 계신데 내가 이제 누구를 위해 재물을 모을 것인가”라며 “나는 이때까지 축재(蓄財)만 알았지 산재(散財)를 몰랐다”고 말하고는 재물을 이웃에게 나누어줄 것을 결심한다.

그는 가산을 모두 계산하고 한 해의 제사, 접빈객, 의식으로 들어갈 만큼을 제하고 수만 민(緡·돈꿰미)의 돈을 마련해 별도로 저축하고 ‘급인전(急人錢)’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가까이는 친척, 친구로부터 멀리는 다른 고을에 이르기까지 알고 지내는 사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진실로 궁색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에게 이 돈을 풀어 위기를 넘기게 했다. 상례와 장례, 가난한 선비가 벼슬길에 나설 때의 관복 등을 비롯해 흉년을 만나면 곳집을 모두 털어 곤궁한 사람을 도와줬다.

그의 친구로 고경항이란 어진 선비가 있었는데 가난하게 죽자 그의 무덤에 비를 세워 주었고, 그 자식의 생계를 지원했다.

또 그는 부친의 친구인 임두란 사람에게 매달 양식을 보내주었는데, 임두 부부가 최순성에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자살하려고 하자 그가 달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 예부터 군자는 빈궁한 자가 많았거늘, 어찌하여 선생은 이러십니까? 또 제가 살던 시대에 어진이가 굶어죽었다면 저를 뭐라 하겠습니까?”

평생 구제해 살려낸 사람이 매우 많았고, 그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가 항상 수십, 수백 명이었지만 사경에서 살려내고 나면 물러나 자랑하는 낯빛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개성 사람들 가운데 현명하거나 우둔하거나 할 것 없이 모두 최순성은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할 줄 아는 천하의 장자임을 알았다고 한다.

김택영은 이렇게 칭찬한다.

“최순성은 비단 재산을 모아 산재할 수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바로 달인(達人)이자 장자(長者)로서 ‘겸손하면 이익이 쌓이고 가득차면 손해를 초래하는(滿招損)’ 이치에 밝아 귀신에게 해를 입지 않을 자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제도권 금융기관 이용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활에 필요한 창업자금, 운영자금 등을 무담보, 무보증으로 지원하는 소액대출사업인 미소금융과 흡사하다 하겠다. 흉년을 맞아 굶어 죽을 지경에서 도와주는 한 줌의 쌀은 죽어가는 목숨을 살릴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훌륭한 부자가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필자는 수 년 전에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를 쓴 바 있다. 경주 최 부자도 착한 부자에 속한다. 이 책을 쓸 때도 기록된 자료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경주에 직접 가서 마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취하고, 그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첩을 조사해 겨우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워낙 유교적 사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부자, 거부, 거상(巨商), 부상(富商), 대고(大賈)에 대한 이야기는 거론 자체가 기피됐기에 기록된 자료를 찾기는 매우 힘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나마 남아 있는 일부 자료는 부자들이 저지른 나쁜 사례가 대부분이어서 선행의 사례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런 가운데서 찾을 수 있는 몇몇 부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훈훈하게 한다.

이것은 옳게 돈을 벌고 옳게 좋은 곳에 돈을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러스트 추덕영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