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기행] 엄덕문, 지상에서 종교와 건축의 우상이 된 기인
2012년 7월 1일 문선명의 친구이며 한때 통일교의 추종자였던 엄덕문이 93세로 소천했다. 약 두 달 후인 9월 3일에는 통일교 총재 문선명이 92세로 사망했다. 엄덕문은 서울 삼성병원에서 한국건축가협회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졌고, 문선명은 경기도 청평에 있는 통일교 천성왕림궁전에서 성화식이 거행됐다.

엄덕문은 1919년 4월 25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했다. 일본 와세다대 부속 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그는 1943년 일본 와세다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가시마건설회사의 직원으로 평안도 강선에서 해방을 맞았다. 일본 와세다대 부속 고등공업학교 전기과에 다니던 문선명과는 유학시절부터 친구였다.

한국전쟁 당시 문선명은 민심을 현혹한 죄로 흥남감옥에 복역 중 1951년 1월 미군함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왔는데, 그곳에서 전쟁을 피해 피난생활을 하던 엄덕문과 조우하게 된다. 엄덕문은 결혼생활 중이었으므로 같이 기거할 수 없어서 문선명을 위해 산동네에 A형태의 오두막을 지어주고 동숙하다가 문선명의 종교관에 감동돼 반평생을 통일교 사도로 함께 했다. 통일교가 일본에 전파될 즈음 엄덕문은 건축 관련 행사로 출장 중에도 시간을 내어 일본 통일교인에게 안수하는 등 사역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가 기행] 엄덕문, 지상에서 종교와 건축의 우상이 된 기인
새로운 퓨전 스타일 한국 건축

건축가 엄덕문의 대표작으로는 세종문화회관을 손꼽을 수 있다. 1973년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가 주관한 현상설계로 당선된 대림산업이 5년간 시공, 완공했다. 1978년 완공된 세종문화회관은 한옥의 개념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해 한국 현대건축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

검정 기와나 붉은색 기둥이 없으나, 디자인 요소인 한국 전통 문양(서까래·공포·배흘림기둥·문살무늬)과 공간 개념(안마당)을 잘 조화시켰기에 건물의 규모가 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이지 않고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준다. 누구도 외국 건물 같다고 하지 않는다. 즉 한국 것이 된 것이다.
엄덕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은 기와를 씌우지 않고도 한국의 정서를 살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엄덕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은 기와를 씌우지 않고도 한국의 정서를 살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현상설계에 당선되고 1년 반 후 설계가 완성될 무렵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엄덕문이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이 기와집을 원하는데 기와집이 아닌 것을 걱정한 양택식 서울시장이 대면시킨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평양 만수대극장은 기와 씌운 2층 누각에 수천 명이 들어간다. 우리 건물엔 평통대의원 5000명이 들어가게 해달라. 국제회의실도 있어야겠다. 지붕엔 기와를 얹어 달라. 서까래라도 내달라”고 주문했다.

부탁 아닌 압력이었지만 엄덕문은 “그건 평양의 특징이고 우리대로 창의할 문화가 있다. 건축은 시대의 상징이자 대변이다. 건축기술이 발달해서 기와를 씌우지 않고도 우리 정서가 들어가고 전통을 살릴 수 있다. 좌석수는 4200석 이상 하면 3류가 된다”고 설득했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세종문화회관 건축담당으로 서울시를 좌지우지했다. 김 전 총리는 충분한 공사비를 지원하고 문화에 일가견도 있어 파이프오르간도 설치했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개인은 노후에 멋있는 집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권력을 쥔 정치가는 자신의 족적을 시각적으로 남기고 싶을 때 건축물을 짓는다. 외국의 유명 관광지에서 거대한 규모의 건물(궁전·종교건축)을 볼 때마다 그 밑에 희생된 국민의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 그리고 그런 조상의 덕으로 관광 수입을 자랑하는 그 국민의 현재가 아이러니하다.

절대 권력의 폐해를 본 조상과 그 절대 권력의 폐해의 흔적을 자랑스러워하는 후손의 모습이 영화처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경복궁 창건 시에도 백성의 고통이 커서 아리랑 가락이 구성지게 됐다는 일설도 있지 않은가. 박 전 대통령 집권 기간이 긴 만큼 많은 건물이 지어졌으나 다행히도 국가 재정을 흔들 정도는 아니라 괜찮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상대적으로 후손에게 관광거리는 남기지 못하는 건가 싶다.

엄덕문은 이런 국가사업에 사재를 보탰다. 세종문화회관 건축 당시 건축설계비는 고작 창고건물 설계 수준의 인건비만 책정돼 있어 적자를 보게 됐으나 그는 자하문 밖 솔밭을 팔아 인건비로 충당하면서 최고의 건축이 되도록 건물을 완성시켰다. 설계비에 맞춰 대충 설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건축사의 책임감이 생각나서, 나는 세종문화회관의 세세한 디테일을 볼 때마다 엄덕문에게 감사한다.
현상공모에 당선돼 지어진 과천 정부종합청사.
현상공모에 당선돼 지어진 과천 정부종합청사.
정부청사와 통일교 재단 관련 건축

엄덕문은 1982년 과천 정부종합청사 현상공모에도 당선됐다. 정부종합청사는 비상사태(전쟁)를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건물은 띄엄띄엄 분산돼있고, 중정이 있는 지하로 서로 연결돼 있다. 관리가 편하고 에너지가 절약되도록 평면은 사각형이며 비상사태를 고려해 저층이다.

건축 당시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분명 수준급이지만, 지금 시각으로는 외관상 너무 똑같은 건물이어서 아쉽기도 하다. 건물 평면을 복사해 쓰면 한 건물이 완성돼 설계비가 절약되니, 아마 세종문화회관에서 본 적자를 웬만큼 벌충했을 것 같다. 종합청사가 세종시로 이사하면 리모델링할 텐데 좋은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건축가 기행] 엄덕문, 지상에서 종교와 건축의 우상이 된 기인
부산 초기 통일교회와 새로 지은 교회.
부산 초기 통일교회와 새로 지은 교회.
통일교가 발전하자 교회를 전국에 똑같은 모습으로 여러 채 지었는데, 엄덕문이 82.5㎡(25평형) 교회 건물을 설계했고 외관은 1951년 피난시절 부산에 있던 A형태의 오두막을 회상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그는 1974년 선화예술고(서울), 1989년 선문대(천안), 1991년 통일교 업무용 도원빌딩(서울)을 설계했다. 선화예술고에서 서양적인 표현을 떠나 어딘가 한국인에게 친숙한 표현을 하려는 엄덕문만의 흔적으로서 한옥의 처마, 서까래, 공포를 단순화한 모양을 엿볼 수 있다.

도원빌딩 내 강당 정면에는 원과 사각을 이용한 통일교 문장이 있는데 엄덕문이 도안한 것으로 수수사상(收受思想)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덕문은 2001년부터 현직에서 은퇴하고, 다만 엄&이건축의 고문으로서 후배를 양성하며 소일했다.
선문대학 본관 건물.
선문대학 본관 건물.
5 세종문화회관 외관.
5 세종문화회관 외관.
아름다운 이별

엄덕문은 건축적으로 가장 성숙할 시기인 1980~90년대에 외도를 했다. 통일교 계열 일성건설의 사장을 3년간 역임하고, 여의도에 통일교 본부를 건축하기 위해 별도의 건축사사무소도 개소했으나 기독교와 정치권의 반대로 건축허가조차 지연됐다.

1990년 후반 문선명에게 종합보고를 하려고 통일교 본부 계획안 도면을 갖고 미국에 갔을 때, 부인이 기독교 목사의 안수를 받자마자 방언(기독교인이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언어)을 하는 기적을 체험하고, 문선명을 떠나 기독교인이 됐다. 2012년 7월 1일 엄덕문 사망 시 장례식이 통일교식이 아니라 한국건축가협회장으로 거행되고 다만 통일교인들이 문상하며 성화식을 치르게 된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다.

그런데 2012년 초 서울 모 교회 현상설계에서 엄&이건축이 응모했으나 ‘엄덕문 즉 통일교’라는 주홍글씨 때문에 낙선하는 일이 있었다. 아마 통일교에서 기독교로 이미 개종한 사실을 모르고 벌어진 일이겠지만, 엄덕문의 마지막 손길이 스친 작품 하나를 잃은 것 같아 아쉽다.

엄덕문이 70세가 되던 1989년 엄덕문 건축상이 제정됐다. 4000만 원의 기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한국건축가협회가 주관하는데 기탁자의 뜻에 따라 한국 전통을 살리는 건축에 상을 주고 있다. 평소 조화가 잘 되는 건축을 모토로 평생을 바친 그는 이별도 그의 방식대로 아름다웠다.


강희달 건축사·전 서울건축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