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무이의 램프는 프랑스의 우아한 클래식 냄새가 난다. 성숙한 여인의 젖가슴 같은 풍만함은 부드러우면서도 단순하고 강하면서도 장식적이다.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 1952년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 1952년
램프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빛은 어둠의 적이자 세상의 희망이다. 빛이 없다면 암흑천지에 눈뜬장님이요, 우주의 한가운데를 헤매는 영원한 방랑자다. 등(燈)은 빛을 담는 그릇이다. 인류는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어디에 어떻게 담아야 효율적이고 아름다운지 자연스럽게 생활의 지혜로 발전시켜 왔다.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조막손에서 피어나는 성냥불도 등이요, 엠파이어스테이트 마천루를 밝히는 서치라이트도 등이다. 등불은 그 자체로 세상의 영광을 일상의 지혜로 이어주는 자연의 힘이다.

프랑스 조명디자이너 세르주 무이(Serge Mouille·1922~88)의 램프는 프랑스의 우아한 클래식 냄새가 난다. 성숙한 여인의 젖가슴 같은 풍만함은 부드러우면서도 단순하고 강하면서도 장식적이다.

장식이 지나치면 금방 질리고, 절제가 극에 달하면 이해하기 어려운데 무이의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The Three-armed Floor Lamp)’는 보면 볼수록 간결한 장식이 돋보이는 명품이다. 명품은 번잡하지 않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빛이 난다. 수없는 시행착오와 디자인을 거듭하며 만들어진 인고의 산물은 사람들에게 무언의 위안을 준다. 프랑스적인, 너무나 프랑스적인 그의 디자인은 공간을 지적이면서도 세련되게 밝힌다.
일곱 개의 고정된 팔이 달린 월 램프(Wall Lamp with seven fixed arms·부분), 1953년
일곱 개의 고정된 팔이 달린 월 램프(Wall Lamp with seven fixed arms·부분), 1953년
플로어 램프 디자인

1922년 파리에서 출생한 무이는 13세에 파리장식미술학교에 입학해 은세공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당시 유럽의 은세공 기술은 유럽 전역에 걸친 전통금속공예의 백미였다. 1940년대 파리화단의 마르셀 뒤샹과 파블로 피카소의 조형적 실험과 혁신적 발상은 화가, 조각가, 시인, 안무가들에게 고루 영향을 미쳤다.

문학가와 예술가들은 사회 전반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알렉산더 칼더의 움직이는 조각 모빌도 그런 맥락의 한 부분이었다. 1951년 무이는 은판을 가공해 모노 타입의 순수추상조형을 제작했는데 마치 생선의 가시나 새의 깃털을 곧추세운 것처럼 키네틱 아트의 실루엣을 선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인체의 조형을 평면으로 재단하고 다시 입체로 구부리거나 끼워서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순수조형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디자인은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홍합이나 잎사귀 등 조형화된 이미지는 모두 디자인의 훌륭한 모티브였다.

1952년 무이는 갤러리 라파예트 그룹의 ‘더 캠페인 데 아르 프랑수아’의 대표인 자크 에드넷(Jacques Adnet·1900~84)으로부터 조명 디자인을 의뢰받는다. 에드넷은 1948년 파리장식예술가협회장을 맡으면서 1959년까지 ‘더 캠페인 데 아르 프랑수아’를 겸임하고, 1970년까지 국립장식미술학교장을 역임했다.

에드넷은 무이에게 플로어 램프 디자인을 주문했다. 에드넷의 개인 고객이 남아메리카의 저택에 커다란 조명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에드넷은 무이에게 램프 디자인을 의뢰하면서 아무런 디자인 가이드라인과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직 무이의 독자적 아이디어로 플로어 램프 디자인을 시작한 것이다.
뉴욕 인테리어
뉴욕 인테리어
1952년, 거의 1년에 가까운 디자인과 도형을 연구하고 실험한 끝에 드디어 첫 번째 모델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가 완성됐다. 에드넷은 시험 제작된 이 램프를 보자마자 “여인의 젖꼭지 같은 모양의 램프를 보면 사람들은 나를 놀려 댈 것”이라고 비웃으면서 불평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는 무이에게 최고의 명예를 안겨준 명품 조명 디자인의 시작이었다. 한눈에 봐도 무이 디자인의 전형적 특징인 인체 곡선의 풍만함이 돋보이는 반사판과 조인트, 볼트와 너트를 끼우는 와셔, 6개의 사이드 스크루, 가늘고 강한 강철 튜브관의 사용, 그리고 세련된 블랙 컬러 도장, 날카로운 스탠드 발톱 등이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을 휘어잡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는 에드넷이 ‘최초의 주문자’라고 하더라도 무이가 디자인한 최초의 램프로 인정받았다. 무이의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는 1952년부터 ‘더 캠페인 데 아르 프랑수아’에서 생산돼 시중에 판매하기 시작해 1963년 ‘베리 라지 시그널(Very Large Signal)’까지 11년 동안 스탠드와 벽걸이, 천장, 테이블 등 몇 종류에 불과한 소량 제품에만 적용, 생산됐다. 하지만 침실과 거실, 사무실과 공공장소 및 도서관과 카페, 레스토랑까지 무이의 램프가 어울리는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인기 제품이었다.

1985년 뉴욕에서 열린 조명등 디자인 전시회에 어느 부인이 무이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조명등을 조금밖에 만들지 않죠?” 대답은 간단했다. “누구도 나에게 더 이상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아서요.” 맨 처음 만든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 그것이면 족하다는 말인가. 명품의 디자인은 정점에 오르면 미감이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 무이의 램프 디자인은 대략 30종류가 만들어져서 그 가운데 15종 내외가 사용되고 있다. 빈티지 조명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셈이다.
파리 인테리어
파리 인테리어
파리의 새로운 조명 디자인

무이는 파리 국립장식미술관에서 1953년 11월부터 1954년 2월까지 에드넷의 친구였던 파울로 마롯과 함께 ‘행복한 집: 파울로 마롯과 그녀의 친구들(La Demeure joyeuse: Paule Marrot et ses amis)’이라는 디자인 전시회에 참여했다.

무이는 이곳에 ‘작곡가의 작업실’에 ‘세 팔 달린 천장 라이트’를 출품했는데, 그랜드피아노와 이중유리 테이블을 비추는 직사광과 반사광이 어우러지는 조명을 연출했다. 가장 성공적인 조명 디자인으로 평가받은 이 전시는 1953년 월간지 ‘모빌리에 데커라시옹(Mobilier Decoration)’ 9호에 표지로 사용됐다.
‘모빌리에 데커라시옹’ 표지, 1953년
‘모빌리에 데커라시옹’ 표지, 1953년
천장에서 내려온 블랙의 커다란 조형은 등기구라기보다는 조형물에 가까워 장식으로서의 공간 설치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당시 일반적인 등기구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샹들리에를 제외하면 대부분 바닥에 세워놓고 비추는 스탠드형 램프와 벽에 걸고 비추는 벽걸이형이 대부분이었다. 무이는 여기에 천장에서 자유롭게 각도를 조절해 조명하는 조인트 기술을 개발해 조형적 멋과 실용을 가미했다. 이러한 멋스러운 디자인 이면에는 당시 파리의 새로운 조명 디자인의 바람도 큰 몫을 했다.

1951년 파리의 조명 디자인은 장 프루베와 이사무 노구치 같은 걸출한 아트디자이너의 출현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훗날 무이에게 디자인 동기를 부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프루베의 금속제 ‘포탕스(potence)’는 교수대에 걸린 수인처럼 긴 막대에 걸린 등을 심플하게 디자인한 것으로 벽에 붙여 180도 회전이 가능해 설치 공간을 최소한으로 기능화한 혁신 제품이다. ‘포탕스’는 단순하면서도 기능적이어야 한다는 철학과 잘 맞아 떨어지는 20세기 모던 조명의 아이콘이다.
심플 원 라이트 플로어 램프(Simple/One-light Floor Lamp), 1953년
심플 원 라이트 플로어 램프(Simple/One-light Floor Lamp), 1953년
프루베와 더불어 파리에서 작업하던 노구치는 일본의 영문학자 아버지와 미국의 시인 어머니 사이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조각가다. 뉴욕의 아트스튜던트 리그를 졸업하고 파리에 건너온 그는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 미니멀한 모던 조형을 전수받는다. 그에게는 일본인 아버지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노구치는 등을 디자인해 전시회를 열었다.

파리와 도쿄는 영원한 사랑이다. 인상파도 일본의 다색목판화인 ‘우키요에’에서 영향을 받았고, 눈으로 먹는 프랑스 음식이 일본의 음식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노구치는 일본 어부들이 오징어잡이 배에 집어등으로 사용하는 뽕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초롱에서 모티브를 얻은 ‘아카리등(燈)’을 만들었다. 일본 선종의 ‘젠(禪)’ 스타일로 만든 아카리등은 파리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모두 새로운 삶의 질과 무관하지 않았다.

1950년대를 관통하는 유럽 디자인은 독일과 프랑스, 영국과 이탈리아, 그리고 네덜란드, 핀란드, 덴마크 등 아날로그 시대 디자인의 정점을 향하고 있었다. 전후 유럽에 불어 닥친 새로운 기운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했고, 기계 산업의 발전과 농업 생산량의 증가는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게 됐다. 먹고 살만 하니 여유가 생기고 미를 바라보는 안목이 증대했다. 디자인의 고급스러움이 경제적 가치로 직결되고 예술적 감각이 너와 나를 구분하는 기준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사람들이 인테리어에 치중하면서 새로운 미감에 눈뜨게 되는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삼각대 테이블 램프(Tripod Table Lamp), 1954년
삼각대 테이블 램프(Tripod Table Lamp), 1954년
오늘날 무이의 램프 디자인은 대략 30종류가 만들어져서 그 가운데 15종 내외가 사용되고 있다. 빈티지 조명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셈이다.


봄밤의 서정

지난해 가을 나는 파리의 지하철 베르시역 와인 저장창고 건너편 광장에서 열린 가구 인테리어 디자인(Les Puces du Design) 벼룩시장에 갔다. 정말 다양한 의자와 집기류, 그리고 조명등이 나왔다. 디자인 책에서 보던 귀한 물건들이 어렵지 않게 눈에 들어왔다. 이

것저것 디자인에, 물건에, 분위기에 마음이 빼앗겨 발걸음이 바빴다. 나는 작은 시장을 열 바퀴는 족히 다니고 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 가운데 무이의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도 진열돼 있었다. 전날 나는 센 강변 생 미셸 거리의 예술서적 책방에서 피에르 에밀 프라루(Pierre Emile Pralus)의 ‘세르주 무이’ 화집 한 권을 샀다.

책을 사고 숙소로 돌아와서 책갈피를 열어보며 마치 무이의 오리지널 램프를 산 것처럼 기뻤다. 어느 해 여름, 서울 청담동 서미앤투스에서 본 무이의 ‘천장등’을 보고 디자인에 마음을 빼앗긴 경험을 잊지 못한다. 아이 머리통만한 그의 오리지널 빈티지 등 일곱 개에서 빛을 내뿜는 순간은 장관이었다. 그 등을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마주한 것이다.

실물을 보니 정말 크고 탐스러웠다. 높이가 족히 2m 가까이 됐고 다리는 튼튼했으며 갓등도 우아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아름다웠다. 4200유로라는 몸값이 부담스러웠지만 빈티지 램프의 아름다움에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Interior Design by Bernard de Swarte
Interior Design by Bernard de Swarte
그날 벼룩시장을 나오면서 나는 무엇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떻게 쓰고 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이의 스탠드 램프 하나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호박 방에 걸린 장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나 파리 루브르 미술관의 루이 16세 방에 놓인 유리 장식 램프의 화려한 극치는 당할 수 없지만, 나는 무이의 미니멀한 프렌치 클래식 램프가 좋다.

송광사 법정스님 불일암의 작은 호롱불이나 담양 소쇄원 제월당의 달빛 창호에 비치는 대나무 그림자는 모두 스님이나 주인의 청아한 취향이다. 나는 북촌 작은 한옥의 한지로 정갈하게 도배한 사랑방에서 소슬한 먹그림 한 폭 걸어두고 춘삼월 청매화가 피면 마음 맞는 벗들과 봄밤의 서정을 이야기하고 싶다. 여기에 무이의 ‘세 팔 달린 플로어 램프’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빛이 따듯할 것이다. 사는 것은 각자의 멋이다.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 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