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면 누구나 결국에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BOOK&LIFE] 죽음의 노래에 비춰본 삶의 모습
한때 진흙이었던 나

미국 예일대 교수로서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사로 꼽혔다는 셀리 케이건(Shelly Kagan)은 최근에 ‘Death(죽음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에서 그는 모두가 거론하기조차 기피하는 ‘죽음’의 문제를 천착하며 누구나 한번쯤 되씹어보기를 권한다. 이 책에서 그가 좋아하는 글귀로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가 쓴 감동적인 ‘기도문’을 소개하고 있다.

신은 진흙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신은 진흙 덩어리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덕과 바다와 하늘과 별, 내가 빚은 모든 것을 보라.”
한때 진흙이었던 나는 이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운 좋은 나, 그리고 운 좋은 진흙.
진흙인 나는 일어서서 신이 만든 멋진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오직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
당신 앞에서 나는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아직 일어나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모든 진흙들을 떠올릴 때,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지만, 진흙들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에 감사드릴 뿐. 진흙은 이제 다시 누워 잠을 청합니다.
진흙에게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내가 만나봤던, 일어서 돌아다니던 다양한 진흙들은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내가 만났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이 기도문에서 ‘한때 진흙이었던’ 내가 세상의 신이 창조한 놀라운 창조물들을 만나고 담담하게 ‘이제 다시 신의 품속에 누워 잠을 청하는’ 모습에서 진정 평화롭고 긍정적인 인생을 볼 수 있다.



아내의 죽음을 노래한 장자

앞의 기도문은 ‘신의 품속’에서 잠드는 모습인 데 비해 동양의 장자는 ‘자연의 품속’에 편안히 잠든다. 장자(莊子)는 사람 이름이기도 하고 책 이름이기도 하다. ‘장자’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우화가 있다.

언젠가 장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가 문상을 갔을 때 장자는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아내가 죽었는데 곡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무정하다고 하겠는데, 하물며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소”하고 말했을 때 장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아니, 그렇지가 않소. 아내가 죽은 당초에는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소. 그러나 그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던 거요. 그저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소. 비단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본시 기(氣)도 없었소. 그저 흐릿하고 어두움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된 거요. 이제 다시 변해서 죽어가는 거요. 이는 춘하추동이 서로 사철을 되풀이해 운행함과 같소.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 있소.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질러 따라 울고불고 한다면 나는 하늘의 운명을 모르는 거라 생각돼 곡을 그쳤단 말이오.”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추구한 장자에게 ‘죽음’이란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에 조금도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은 구성 요소의 해체일 뿐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철학자가 서양에도 있었다. 로마제국의 16대 황제이자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는 스토아학파 철학자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틈틈이 그리스어로 그의 인생관을 기록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명상록’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권력보다도 철학을 사랑한 황제는 우리 앞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과 우리 뒤에 올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순간에 불과하다는 무상함을 깨닫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인간이 사는 시간은 한순간이며, 그의 실체는 유동적이고, 그의 지각은 불분명하고, 그의 몸의 성분들은 모두 썩게 돼 있고, 그의 영혼은 소용돌이이고, 그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고, 그의 세평은 불확실하다. 즉 육신의 모든 것은 강이고, 영혼의 모든 것은 꿈이요 연기다. 그리고 삶은 전쟁이자 나그네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한 가지, 철학뿐이다. (중략) 무엇보다도 죽음을 모든 피조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해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구성 요소가 끊임없이 다른 요소로 바뀌는 것이 구성 요소들 자체에는 결코 무서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해체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고뇌하는 먼지, 그리고 소풍의 끝으로 보는 죽음

이에 비해서 다음 두 편의 시는 어떠한가?

오, 여러분은 이 먼지를 알아보겠는가?
그게 무엇인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기 전에 먼저 그 먼지를 들여다보자.
지금은 먼지와 재로서 존재하지만, 물에 녹아 수정으로 변할 것이다.
반짝반짝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전기불꽃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식물이나 동물로 태어날 것이다. 신비로운 자궁으로부터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
결국 좁아터진 마음으로 걱정하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시는 앞에서 본 케이건의 ‘Death’에서 인용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먼지에게 바치는 시(Ode to Dust)’다. 한 줌의 먼지가 변해 태어나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1860)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정열적으로 피히테, 칸트, 플라톤 등의 학문에 탐닉했으나 늘 불만 속에서 살았고, 주요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간행했으나 무시당했고, 베를린대의 강사 지위를 얻었으나 헤겔 때문에 청강자가 없어서 반 년 만에 사직했으며, 이후 평생 동안 독신인 채로 은자생활을 하면서 이 세계는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세계’라는 비관주의 철학을 제시했다.

이에 비해 천상병(1930~93) 시인의 시 ‘귀천(歸天)’은 어떠한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그는 1949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서울대 상대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문학에 전념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 아무에게나 술값, 밥값을 얻어 쓰던 그는 어이없게도 ‘동백림 간첩단사건’에 연루돼 기구하게 떠돌며 갖은 고생을 하면서 천진무구하게 시를 쓰다가 거리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누구보다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산 그였지만, 시 ‘귀천’을 통해 본 그의 인생은 ‘아름다운 소풍’으로 승화되고 있다. 부유했던 쇼펜하우어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서울 인사동 골목 어귀 어디에 그의 부인이 운영하던 ‘귀천’이란 찻집은 지금도 있을까? 앞의 시들 중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시는 무엇인가? 그것이 당신의 인생관과 흡사할 것이다.



일러스트 허라미
전진문 (사)대구독서포럼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