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llector

한국과 중국, 일본, 티베트 등 아시아 고판화의 보고인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지금의 고판화박물관이 있기까지는 한선학 관장의 판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유발 스님인 한 관장이 고판화에 빠진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강원도 원주로 향했다.
한선학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장 “박물관은 유물과 관람객의 소통의 장”
고판화박물관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명주사 내에 있다. 박물관 한쪽에는 학생들을 위한 판화 체험학습장과 템플스테이를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산사의 오후는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전 체험객을 맞느라 분주했다며 기자를 맞은 한선학 관장은 찻잔을 건네며 고판화와의 인연을 풀어놓았다.

한 관장이 고판화를 수집한 건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방부 법당의 주지로 있던 그는 신도들과 함께 중국 불교 4대 성지 중 한 곳인 구화사(九華寺)를 찾았다. 중국의 지장보살로 추앙받는 김교각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구화사로 향하던 길에 항저우(杭州)에 들렀다.

저녁을 먹고 구경삼아 야시장을 찾았다. 항저우의 야시장은 골동품 시장이다. 그곳에서 그는 도자기로 된 부처님 한 분을 모시게 됐다. 도자기를 판 상인은 그게 송(宋)대 것이라고 했다. 이튿날 구화사(九華寺)에서 철야기도를 마친 그는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여행이었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이 서울 인사동에 있던 터라 인사동에 들를 기회가 잦았다. 그러던 차에 중국에서 산 불상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마침 비슷한 불상이 있어 상인에게 물었더니 800만 원을 달라고 했다. 중국서 1만 원을 주고 산 불상이 한국에서는 800만 원을 호가했다.

고미술품을 좋아했지만 비싸서 접근을 못했는데 중국 골동품이면 가능하겠다 싶었다. 당시는 인사동 난장에 중국 고미술품이 많이 나올 때였다. 그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게 목판이었다.

“제가 동국대에서 조각을 전공했습니다. 군종 장교 시험에 덜컥 합격해서 군승이 됐지만 조각에 대한 꿈은 늘 간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목판의 조형성이 눈에 들어온 겁니다. 승려니까 찍어서 신도들에게 나눠줄 수 있고, 이래저래 관심이 가더군요.”
아미타래영도 목판(중국)
아미타래영도 목판(중국)
1만 원짜리 지장보살 목판으로 시작된 컬렉션

컬렉션 명단에 처음 이름을 올린 건 중국에서 만든 지장보살 목판이었다. 불교에서도 지장신앙을 가진 터라 당연한 일이었다. 정확히 1만 원을 주고 샀다. 중국에서도 인쇄에서 신도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만든 목판이었다. 그렇게 한 점, 두 점을 사다 보니 몇백 점을 컬렉션하게 됐다. 모두 중국에서 만든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 목판은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구화사 순례 2년 후인 1998년 그는 다시 중국을 찾았다. 가서 보니 2년 전 중국이 아니었다. 빠른 경제성장 덕에 고미술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가격도 많이 올라 있었다. ‘지금 아니면 중국 목판화도 모으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컬렉션에 나섰다. 중국 상인들과 한국 골동품 가게를 통해 중국 목판을 사 모았다.

1만 원짜리를 시작으로 몇백 장을 모을 때까지는 술 마실 돈으로 목판을 수집한다고 생각했다. 목판화를 수집하면서 즐기던 곡차를 끊은 그였다. 운이 좋으면 10만 원에도 귀한 것을 구할 수 있던 때였다. 몇천만 원이면 중국 목판은 다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웬만한 가격대의 목판화는 눈에 차지 않았다.

그 즈음 그는 전역과 함께 불사(佛事)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군승은 결혼이 가능했지만 전역을 하면 이혼을 하거나 다른 종단을 선택해야 했다. 가족을 버리는 대신 태고종으로 전종했다. 태고종은 유발승도 허용이 돼 비교적 편하게 태고종을 선택했다.

“시간 날 때마다 배낭을 메고 수집하러 다녔어요. 인사동, 장안평, 청계천 할 것 없이 다니면서 앞 배낭, 뒤 배낭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서 양손 가득히 목판을 들었습니다. 동서울터미널까지 택시비 7000, 8000원을 아끼려고 전철을 타고 다녔습니다. 시간이 아까워서 끼니도 자장면 등으로 때웠고요. 그랬더니 인사동 상인들 사이에 소문이 나더라고요. 원주에 있는 중이 중국 목판을 모은다는데, 쓸데없는 짓 한다고요.”

그를 비웃던 상인들이 요즘은 무릎을 치며 후회한다. 한국 것보다 중국 유물이 더 비싸졌기 때문이다. 중국 골동품은 당시에 비해 100~200배 이상 올랐다. 가끔 한국을 찾는 중국 상인들이 그의 컬렉션을 보고는 그 혜안에 탄복을 아끼지 않을 정도다.

한 관장은 당시니까 지금의 컬렉션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당시는 골동품 컬렉션은 도자기나 서적류가 주류였고, 민속품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더욱이 목판화는 주류에서 떨어져 있어 가짜가 별로 없었다. 가짜를 만드는 인건비가 목판보다 비쌌기 때문이다. 다른 골동품은 50% 이상이 가짜였지만 목판화는 10점을 수집하면 90%가 진짜였다.
고려법화경(한국)
고려법화경(한국)
불설아미타경(한국)
불설아미타경(한국)
천불도(몽골)
천불도(몽골)
능화판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국 목판에 주목

중국 목판화에 집중하던 한 관장은 영남대 박물관에서 개최한 전시에서 능화판을 만나게 된다. 능화판의 아름다움은 다른 목판을 압도했다. 컬렉션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한국 목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능화판은 대학뿐 아니라 개인 컬렉터들이 많아 50여 점밖에 구하지 못했다. 컬렉터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은 마지막 작품을 손에 넣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한국 것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교, 유교, 도교 경전 중에서 삽화가 있는 것을 모으기 시작했죠. 책도 많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낮을 때였습니다. 제가 컬렉션을 시작하고 2, 3년이 지나 국립미술관들이 사 모으더군요. 수집은 유통이 돼야 가능한데 큰 박물관이 가져가면 유통이 안 됩니다. 다행히 그전에 컬렉션을 해서 삽화가 들어간 책의 50%는 저희 박물관에 있습니다. 그 또한 운이 따랐죠. 컬렉션은 운도 중요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할지 빠른 판단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다른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죠.”

2004년부터는 일본 목판에 눈독을 들였다. 티베트와 몽골 목판은 중국 목판과 함께 컬렉션한 터라 빠진 건 일본 것뿐이었다. 그는 장안평 미술품 가게에서 일본 채색 판화 한두 점을 사면서 일본 판화에 눈뜨게 됐다.

일본 목판을 컬렉션하면서 그는 인터넷 경매도 시작했다. 일본을 자주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국내에 일본 고미술품이 많지도 않아서 컬렉션에 한계가 있었다. 친지에게 인터넷 경매를 소개받은 후 밤을 새며 작품을 찾았다.

“인터넷 경매에는 수십만 점이 매일 올라있습니다. 한국 도자기와 민화를 몇백만 원에 샀다 몇천만 원, 혹은 억대에 다시 올리는 상인들도 있습니다. 세계의 컬렉터들이 경쟁을 벌이는 곳이죠. 전문가들이 있기 때문에 가짜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경매 사이트에 자주 들러 좋은 걸 확보하려고 애를 씁니다.”
석존과 16아라한(티베트)
석존과 16아라한(티베트)
오백나한도(일본)
오백나한도(일본)
우여곡절 끝에 ‘오륜행실도’를 손에 넣다

컬렉터 경력 18년, 컬렉션을 하면서 운도 따랐다. 특히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구한 건 정말 행운이었다. ‘오륜행실도’ 목판은 워낙 유명해서 책만 가져도 감사해야 한다. 우연히 상인에게 ‘오륜행실도’ 목판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삼성이나 대학 박물관처럼 자금력이 풍부한 곳의 몫이려니 여기며 애써 외면했다. 머리로는 포기했지만, 마음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박물관은 아무리 물건이 많아도 대표할 만한 군계일학 하나가 반드시 필요하다. 컬렉터들 사이에는 “대표작 하나만 있어도 다른 컬렉션은 따라온다”는 말이 있다. 그도 그랬다. 컬렉션에 화룡점정이 될 작품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는 컬렉션을 두고 경쟁할 때 진검승부를 잘하는 편이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다. 소유자를 직접 만나 얼마나 원하는지 진심을 전하는 게 전부다. 눈앞에 현금을 들이미는 것도 효과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전날 현금을 마련해서 담판을 지으러 갔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현금을 가져간 적도 없을 것이다.

“실제 목판을 보니까 훼손이 너무 심하더라고요. 일제 강점기에 훼손당한 겁니다. 진검승부는 찰나에 팔이 잘리고 목이 잘립니다. 짧은 순간 별생각을 다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죠. 나는 상인이 아니라 박물관을 하는 사람이라고요. 가격을 깎는 대신 그 자리에서 현금을 내놓고 가져왔죠.”

‘오륜행실도’를 손에 넣은 후 서지학의 최고 권위자들에게 감정을 받았다. 많은 학자들이 “대단한 유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의 평가에 어깨가 올라갔다. 컬렉터가 느낄 수 있는 환희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오륜행실도’는 보존 상태가 나빠서 보물 지정은 못 받았지만 지금도 조선시대 최고의 목판 원판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오륜행실도’의 서체는 한글 최고의 서체로 컴퓨터 명조체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오륜행실도’는 또한 민족문화재의 수난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본이기도 하다. 그는 ‘오륜행실도’를 훼손한 일본인들보다 그걸 지키지 못한 한국인들이 더 욕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에야 골동품을 감정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골동품에 대한 인식이 확대됐지만 그전까지는 전통 유물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중국 송대 목판인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또한 고판화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이다. ‘아미타래영도’는 베트남 상인을 통해 사진을 보고 구입했다. 컬렉터는 사진을 보고도 모험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싼 건 위험이 덜하지만, 비싼 건 위험 부담이 크다. ‘아미타래영도’가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어 주문을 했는데 1년 후에야 그의 손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주문 후 다른 스님이 관심을 가져 흥정이 붙은 상태였다. 인사동 대로에서 그 스님과 큰소리가 오간 후에야 손에 쥐었다. 받고 보니 실물이 훨씬 아름다웠다. 목판을 건네받자마자 판화를 찍어서 신도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뒤 2005년 안동 국제학술대회에 초청을 받아갔다. 학술대회 후 참석한 중국의 학자들에게 고판화박물관을 보여주었다. 그들 중 베이징대 교수가 있었는데 목판을 보더니 베트남 작품이 아니라 송대 유물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중국인들은 한자만 보면 자기네 거라고 우긴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은 대승 불교가 전파된 유교국이라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기 때문에 한자로 된 유물이 적지 않다. 그런데 그 교수가 몇 가지 점을 짚으면서 송대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이후 교수들이 연구해본 결과 그 작품은 중국 남송대 작품으로 판명됐다. 컬렉션을 직접 본 중국의 권위자들도 “크기도 크고 보존 상태도 좋은 대단한 목판본”이라고 평가했다.
한선학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장 “박물관은 유물과 관람객의 소통의 장”
컬렉션은 즐거움이자 고통

안동 국제학술대회를 계기로 한 관장은 공부를 결심했다. 박물관을 운영하려면 최소한 박사 수료는 해야겠다고 생각해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늦깎이 대학원생이 된 그는 2010년 한양대 대학원에서 박물교육학과 1호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는 의외로 박물관 운영에 도움이 많이 됐다. 박물관을 찾는 사람은 대부분이 학생과 학부모들이다. 교육학 박사라고 했더니 설명이 더 잘 먹혔다. 관람객과 소통하고 체험을 통해 흥미를 유발하니까 호응도가 높았다. 유물과 관람객의 소통이라는 박물교육학의 목적과도 통했다.

“박물관과 문화재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박물관의 시작은 수집(컬렉션)입니다. 수집은 문화 시대를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박물관은 수집, 보존, 연구, 전시, 교육 등이 그 역할인 거죠. 사찰에 남아 있는 골동품들은 왕족이나 스님들의 애정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흥미에서 시작했지만 그게 모여 문명사회로 가는 큰 흐름, 정신사의 한 줄기가 된 거죠.”

이렇게 수집한 작품만 4000여 점에 이른다. 중국 것이 1500여 점, 티베트와 몽골 작품이 약 700점, 한국 목판이 1000여 점. 일본 게 700여 점이다. 판화와 관련된 도구들도 적지 않다.

그는 지금도 채우고 싶은 컬렉션이 있다. 하지만 경제적인 한계 때문에 포기할 때가 있다. 박물관 운영도 만만치 않다. 박물관은 유기체와 같아서 지속적으로 수장고를 채우고, 전시관을 보수해야 한다. 그러자니 가족들의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건 컬렉터의 숙명이다. 그가 “컬렉션을 즐거움이자 고통”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