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바스네초프(Viktor Vasnetsov)는 당대 화단의 혹독한 비판에도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영웅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전통을 되살리는 이런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는 러시아의 문화적,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 1889년, 캔버스에 유채, 모스크바 트레야코프 미술관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 1889년, 캔버스에 유채, 모스크바 트레야코프 미술관
2007년 12월 네덜란드 흐로닝겐의 흐로닝어 미술관에서 열린 ‘러시아 민담과 전래동화’전 관람객은 저마다 전시장 입구에 내걸린 안내 포스터에 매료됐다. 포스터의 바탕 그림은 한 젊은이가 매혹적인 여인과 함께 거구의 회색 늑대 등에 올라 탄 채 울창하고 어두컴컴한 숲을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 러시아 화가 빅토르 바스네초프(Viktor Vasnetsov·1848~1926)가 그린 이 그림은 러시아 전래동화인 ‘이반 왕자, 불새, 그리고 회색 늑대’의 한 에피소드로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를 묘사한 것이다. 다소 길지만 동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전래동화에서 유래한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

옛날 옛적에 한 임금님이 세 명의 왕자를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그는 정원에 황금사과나무를 키웠는데 매일 불새가 나타나 한 개씩 가져가자 왕자들을 시켜 잡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두 형은 게을러서 잡지 못했고 막내 이반은 잡을 뻔 하다 놓친 채 깃털만을 가져와 왕에게 보여준다. 왕은 다시 새를 잡아오라고 명령하지만 두 형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용감한 막내는 갈림길 앞의 이정표에 표시된 세 길 중 ‘사람은 살고 말은 죽는 길’을 택해 힘차게 전진한다.

이정표의 예언대로 이반의 말은 거대한 회색 늑대에게 잡혀 먹히지만 이반을 불쌍히 여긴 늑대가 그를 등에 태워 불새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준다. 늑대는 불새를 가져오되 새장은 건드리지 말라 충고하지만 이반은 이를 잊고 새장을 건드려 그곳 왕에게 붙잡힌다. 이에 왕은 아홉제곱 나라 너머 세제곱 왕궁에 가서 황금 갈기를 한 말을 가져오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한다.

이반을 그곳에 데려다준 늑대는 이번에도 말을 가져오되 갈기는 만지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그는 다시 이를 어겨 붙잡힌다. 그곳의 왕이 어여쁜 헬렌 공주를 데려다주면 용서해주겠다고 하자 이반은 늑대의 도움을 받아 헬렌을 데려온다. 그러나 헬렌을 사랑하게 된 이반이 슬퍼하자 늑대는 자신이 헬렌으로 변신해 왕에게 갔다가 도망쳐 나옴으로써 헬렌과 말 모두를 구해낸다.

이반이 이번에는 불새를 줘야 한다는 생각에 슬퍼하자 늑대는 다시 불새로 변신했다가 도망쳐 나와 이반은 모든 것을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던 이반은 안타깝게도 길에서 쉬던 중 두 형에게 발견돼 죽임을 당한다. 며칠 뒤 이반의 시신을 발견한 늑대는 생명수를 구해 이반을 소생시키는 한편 이반의 두 형을 죽인다. 이반은 마침내 왕국에 돌아와 헬렌 공주와 결혼식을 올리고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는 바로 이반이 늑대의 도움을 받아 헬렌 공주를 데리고 숲을 빠져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또 다른 작품인 ‘갈림길에 선 기사’는 세 갈래 길 앞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까 고민하고 있는 이반을 묘사한 것이다. 주변에 널린 해골과 동물의 뼈, 시체를 쪼아 먹기 위해 주변을 맴도는 갈까마귀는 이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갈림길에 선 기사’, 1878년, 캔버스에 유채, 소장처 미상
‘갈림길에 선 기사’, 1878년, 캔버스에 유채, 소장처 미상
19세기 말 러시아 낙관주의와 도전정신 형상화

이 신비로운 그림들을 그린 바스네초프는 뱌트카(현 키로프) 주의 벽촌인 로프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자기보다 아래 계층인 농부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열 살 때 뱌트카의 세미나리에 들어간 그는 마침 그곳에 망명 와서 성당 벽화를 그리던 안드리올리라는 폴란드 화가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19세가 되던 해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는데 마침 그곳에서는 신화와 기독교적 주제만을 강요하는 전통 회화 교육에 반기를 들고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스네초프는 그룹의 리더인 이반 크람스코이와 핵심 멤버로 훗날 최고의 화가가 되는 일리야 레핀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바스네초프는 사실적인 주제보다는 러시아 농촌의 전래동화와 민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76년 레핀의 초대로 파리에 간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의 아카데미즘과 함께 인상주의 같은 첨단의 미술 사조를 배우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러시아 미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가 ‘회색 늑대를 탄 이반 왕자’를 구상한 것도 파리에서였다. 이듬해 러시아로 돌아간 그는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러시아 전통 민담과 동화를 연구하는 한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져든다.
‘하늘을 나는 카펫’, 1880년, 캔버스에 유채, 니즈니 로보고로드 미술관
‘하늘을 나는 카펫’, 1880년, 캔버스에 유채, 니즈니 로보고로드 미술관
‘하늘을 나는 카펫’도 러시아 민담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보통은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후세인 왕자가 타고 다니던 카펫을 연상하기 쉽지만 러시아 민담에서는 바바야가 여신이 바보 이반에게 내린 신비로운 선물 중 하나다. 바보 이반은 러시아 민담에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로 순진하지만 행운의 청년으로 늘 형제들의 질투로 위험에 빠지곤 한다. 바보 이반은 바바야가가 준 신비의 카펫을 타고 이곳저곳을 여행한다. 바스네초프는 그런 이반을 그림에서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러시아의 한 철도회사가 주문한 것으로 한창 근대화의 길로 들어선 19세기 말 러시아인의 낙관주의와 도전 정신이 표현돼 있다.
‘시린과 알코노스트-기쁨과 슬픔의 새’, 1896년, 캔버스에 유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시린과 알코노스트-기쁨과 슬픔의 새’, 1896년, 캔버스에 유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미술관
바스네초프의 그림에 대한 당대 화단의 평가는 냉혹했다.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같은 비평가는 “미적인 아름다움은 오로지 물리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데 있는 것이지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바스네초프는 이런 비판에도 자신의 소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모두가 유행을 뒤쫓던 근대화의 문턱에서 그는 오히려 사라져가는 러시아의 전통을 되살려 문화적, 예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의 그런 노력은 뒤늦게 인정받아 이제 그는 러시아의 전통을 확립한 대표적인 화가로 기억된다. 그는 도전 정신으로 가득한 이반 왕자요, 순진무구한 바보 이반이었다.



정석범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 ‘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