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좋아서 시작했고 점점 빠져들면서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일이 이제는 무거운 사명감으로 자라났다. 20여 년간 북한을 100여 차례 드나들며 북한 그림을 몇백 점 모은 신동훈 조선미술협회장의 얘기다. ‘정치를 넘어선 그림’을 통해 남북 간 교류가 이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양 대동강 변을 걸을 때마다 남북 분단의 현실이 생각나 눈물이 난다는 신 회장은 여느 컬렉터들과는 분명 달랐다.
[THE COLLECTOR] 신동훈 조선미술협회장, 또 다른 우리 미술, 북화에 빠져들다
지난 7월 말, 인천의 한 전시장에서 만난 신동훈 조선미술협회장은 그림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 컬렉터가 자기 그림에 그만큼 애착을 갖지 않을까만 신 회장의 그림들은 특별함이 남달랐다. 북한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특수성을 띠는, 그것도 전혀 공개되지 않은 나라의 작품들이라는 점이 그렇고,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유산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여기에다 그가 소유한 작품들은 해당 작가들로부터 직접 받은 진품으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니 이만하면 그 가치와 의미는 설명되고도 남을 터다. 그것도 북한에서 ‘국보급’ 화백으로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는 정창모, 선우영 두 화백의 작품이 대부분이니 더더욱.

아닌 게 아니라 신 회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긍심이 대단하다.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세계적으로 전운이 감돌던 상황에도 주저 없이 평양 길에 올랐던 그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자신보다 더 ‘북화(北畵)’에 대해 잘 알고 많이 소장한 사람은 없다는 데 자부심이 크다. 이는 북한의 화백들도 인정한 부분. 몇 해 전인가, 정창모 화백은 남한에서 거래되는 자신의 작품은 거의 가짜라며 신 회장만이 유일하게 직접 자신에게 진품 감정을 받은 사람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평양을 갈 때마다 대동강을 걷는다는 신동훈 회장.
평양을 갈 때마다 대동강을 걷는다는 신동훈 회장.
서슬 퍼런 시절부터 전 세계에 북한 그림 알리기 20년

최근 소장품 40여 점으로 정전 60주년 기념 북한 인민예술가 2인의 작품전을 연 신 회장은 지난 1999년 국내에서 ‘북한 미술가 6인전’을 처음 열어 화제를 모은 후 열두 번 정도의 큰 전시를 열었다. 해외에서도 북화를 알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20년 넘게 계속됐다. 1988년 미국에 문을 연 새스코(Sasco) 갤러리와 이듬해인 1989년 중국에 개관한 사시고(思是高·Sasco) 갤러리를 직접 운영하며 전시를 하기도 했고, 전 세계를 돌며 ‘또 다른 우리 그림’인 북화를 널리 소개했다. 그랬다. 그에게 북화는 남의 것이 아닌 또 다른 우리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로서 느끼는 분단의 현실은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영어로는 ‘코리안 페인팅’ 하나인데 북한은 ‘조선화’라고 하고, 우리나라는 ‘한국화’라고 하잖아요. 땅도 분단인데 그림마저 그렇게 되는 게 싫어서 제가 처음 화랑을 열었을 때 ‘북화’와 ‘남화’로 구분을 했지요. 사실 처음 화랑을 시작했을 때부터 북화를 염두에 두었던 건 아니었어요. 1989년 북화를 처음 접하게 된 뒤 북에도 우리 미술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지요. 남화는 저 말고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북화는 하는 사람도 없고 하기도 힘들잖아요. 저는 미국에 살고 있고 시민권자이니 국내 거주자보다는 접근이 쉽다는 장점도 분명 있었지요.”

북한 그림 수집 이야기는 그 오랜 세월만큼이나 무궁무진하지만, 그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신 회장이 화랑을 열고 본격적으로 컬렉터의 삶을 살게 된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77년, 30세의 나이였던 그는 미국 워싱턴으로 이주했다. 경기도 일산이 출신지인 그는 일산이 논바닥이던 시절, 그러니까 미국이 달나라쯤으로 생각되던 중학교 시절부터 미국을 동경했다. 동네 인근에 홀트아동복지회가 있었는데, 그곳 아이들이 입양돼 가는 걸 보면서 대책도 없이 미국에 가겠노라 했었다. 해외 이주가 쉽지 않았던 1970년대 당시, 그는 군대 시절 익혔던 자동차 정비 기술 덕분에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온 미국에서의 정착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선우영, ‘동 트는 금강산 세존봉’, 2002년, 한지에 채묵, 72×50cm
선우영, ‘동 트는 금강산 세존봉’, 2002년, 한지에 채묵, 72×50cm
“미국에서 간이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초창기, 한 달에 세 번이나 무장 강도를 당했어요.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더군요. 그래도 또 열심히 일했지요. 그런데 또 열심히 일한다고 다 돈을 버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돈 벌기도 어렵고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럴 바에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자고 생각한 겁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해 화랑을 열기로 했는데 고맙게도 아내가 흔쾌히 동의를 해줬어요. 사실 제가 지금껏 북한을 드나들며 남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아내 덕이 큽니다. 그림만 가지고 그럴 듯하게 왔다 갔다 했지만, 집에 제대로 돈을 못 갖다 줬으니 아내가 고생이 많았지요.”

그림을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전문 분야가 아니었으니 미국 사람들이 “전문 영역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만만했던 “코리안 페인팅”을 내세웠다. 그러던 차에 북화를 접하게 됐고 그 후부터 몇 년간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몸으로 직접 공부했다. 물론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 1~2년간은 속아서 가짜 그림만 샀던 것. 그때 날린 돈이 무려 50만 달러에 달했다.

“그러고 나니 답이 나오더군요. 수업료를 톡톡히 내고 북화에 눈을 뜨게 된 셈이지요. 그때 샀던 가짜 그림들은 모두 불태워 없앴어요. 다시 팔려면 저 역시 사기를 쳐야 하는데, 상대방이 내 표정을 다 읽을 것 같아 못 하겠더라고요. 그 일 이후론 절대 함부로 그림을 구입하지 않았고,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화가의 작품들에만 매달리겠다는 나름의 철칙도 세우게 됐습니다.”
정창모, ‘솔과 진달래’, 2004년, 한지에 채묵, 71×26cm
정창모, ‘솔과 진달래’, 2004년, 한지에 채묵, 71×26cm
1977년 공훈예술가 타이틀을 달고 1989년 인민예술가 칭호까지 부여받은 정창모 화백과 1989년 공훈예술가, 199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선우영 화백은 이미 당시부터 북한 최고의 화백들이었다. 수많은 작품들이 국보급으로 지정돼 있을 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북한 내에서도 ‘대우’가 다른 화백들이었으니 일개 민간 컬렉터에 불과했던 그가 친형제만큼의 친분을 쌓게 되기까지 얼마나 높은 장벽을 넘어야 했을지 짐작되고도 남는 부분. 순수하게 북화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의도에도 북한은 진입 자체가 쉽지 않았다.

“처음 1년간은 화백들을 만나지도 못했어요.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서 계속해서 열의를 보여줬어요. 그랬더니 결국은 그분들이 감동을 했고 저를 가족처럼 대해주었죠. 정창모·선우영 화백과 인연이 그렇게 시작돼 20여 년간 그분들의 작품을 직접 받아 소장하게 된 겁니다. 그분들 작품은 정식으로 사려면 10호짜리 작품 하나가 5000유로 정도로 너무 비싼데 저는 돈이 아닌 ‘의리’와 ‘사명감’으로 받을 수 있었지요. 우리 그림을 찾아서 세계에 보이고 자랑하고 싶었던 제 마음을 알고 그림으로 도움을 준 겁니다. 북한 그림과 문화를 소개하겠다는데 자신들은 돈이 없으니 해외에 나가 전시를 할 수 있도록 그림을 준 거지요.”
선우영, ‘금강산 한하계’, 2002년, 한지에 채묵, 45×125cm
선우영, ‘금강산 한하계’, 2002년, 한지에 채묵, 45×125cm
그림을 통한 남북 교류의 꿈, ‘남북 독도전’ 눈앞에

‘그림 값’은 안 들었는지 몰라도 지난 20여 년간 100여 차례 평양을 비롯해 북한 전역을 오가며 들어간 체제비만 해도 적지 않은 금액. 돈도 돈이지만 이런저런 사연과 곱지 않은 시선에도 숱하게 시달렸다. 서슬이 퍼렇던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첫 북화 전시를 할 때는 협박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코 그것들이 그의 열정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저는 늘 당당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오해를 받을 것도 없었어요. 어떤 사람은 북한에 갈 때 겁나지 않았느냐고도 묻는데 제가 워낙 겁이 없고 용감한 사람이라 그런지, 혹여 그런 상황이 닥치면 더 당당하게 행동했지요. 사상 문제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제가 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림은 그냥 그림이에요. 정치를 넘어선 것입니다. 국내에서 전시회를 할 때마다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그림 앞에선 다 한마음이었어요. 북에 고향을 두고 온 분들은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저도 서울에선 한강 변을 걷고, 평양에 갈 때는 대동강 변을 걷는데 그때마다 남북 분단의 현실이 생각나 눈물이 납니다.”

선우영 화백과 정창모 화백이 지난 2009년과 2010년 연달아 타계하면서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수는 없게 됐지만, 이미 갖고 있는 작품들만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다는 그다. 몇백 점에 달하는 작품들이 국내와 중국, 그리고 미국에 흩어진 채 자리를 못 잡고 있는 걸 생각하면 두 화백을 잘 모시지 못하는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는 신 회장. 두 화백의 그림뿐만 아니라 중국, 유럽의 컬렉터들에게 각광받는 이념화와 또 다른 젊은 화가들의 작품도 소장한 그는 북화의 미술사적 가치를 강조하며 보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고 있다.
정창모, ‘어미닭의 마음’, 2004년, 한지에 채묵, 64×71cm
정창모, ‘어미닭의 마음’, 2004년, 한지에 채묵, 64×71cm
“세계적으로 북화가 주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스토리 때문입니다. 북한은 특수한 나라잖아요. 전 세계에서 그만큼 매스컴에 집중되는 나라가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런 환경 속에서 핀 예술이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그림의 수준도 굉장히 뛰어나요. 게다가 자기 나라 그림인 ‘조선화’를 지키려고 하는 마인드가 굉장히 강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한국화가 천대받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앞으로도 더 할 수만 있다면 계속 북에 드나들면서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알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마 옛날처럼은 안 되겠죠. 경제적으로도 그렇고요. 마음이 아파요.”

이제는 미술사적으로도, 그리고 분단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역사적으로도 의미를 갖는 북화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다 널리 알려가는 작업들을 하고 싶다는 신 회장은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있다면 기꺼이 함께 하고 싶다는 소망도 피력했다. 더불어 그림을 통한 남북 교류의 꿈도 계속 이어나갈 계획. 그 일환으로 남과 북의 화가들이 그린 독도 그림으로 ‘남북 독도전’ 세계 투어를 하고 싶다는 꿈은 이제 실현 단계에 와 있다.

“생전에 선우영, 정창모 화백과 우리나라 화폐 그림으로 유명한 이종상 화백에게 ‘남북 독도전’에 대한 구상을 말씀드렸어요. 다들 흔쾌히 허락했고, 북한의 두 화백은 돌아가시기 전에 20여 점이 넘는 독도 그림을 넘겨주셨지요. 미술 작품으로나마 남북이 함께 하게 될 그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