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하고 실용적인 독일의 산업 디자인을 알고 싶다면 바우하우스를 보라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건물, 1926년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건물, 1926년
바우하우스(Bauhaus)는 건축과 공예를 가르친 독일 디자인 교육의 산실이다. 또한 현대 건축의 총칭이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독일 바이마르에서 시작해 데사우에서 꽃을 피우고 베를린에서 1919년부터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까지 14년 짧은 생을 마감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우하우스만큼 세상을 변화시킨 혁신은 쉽게 만나기 어렵다. 바우하우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오늘의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태어났음에도 오늘날 가장 강력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바우하우스는 미술과 공예의 영역이 어떻게 구획되고 좋은 디자인은 무엇인가란 물음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바우하우스는 건축과 일상생활에 이르는 디자인의 혁명이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쓰고 있는 가전·생활용품에서부터 의자, 컴퓨터와 서책의 서체, 신문·잡지의 광고 디자인까지 오늘날도 그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상당히 지속될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오늘날 산업 디자인의 양식을 창조했고 그 기준을 마련했으며 현대 건축의 발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아파트 문화로 대변되는 획일화된 도시 설계도 거슬러 올라가면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공동 주택이 효시다. 철과 콘크리트, 유리로 된 이 건물은 바우하우스 교사(校舍)와 더불어 건축의 혁신으로 급속히 팽창하는 20세기 도시 산업의 주택 정책과 맞물려 빠르게 발전했다.


바우하우스의 목표
바우하우스의 목표는 모든 순수미술과 공예가 건축에 귀결하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 1969)라는 걸출한 건축가가 없었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피우스는 1883년 5월 18일 베를린에서 건축 및 교육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였고, 삼촌은 베를린 미술공예박물관의 관장이었고, 아버지는 건축가였다. 그로피우스는 뮌헨과 베를린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교육철학 가운데 중요한 것은 순수미술과 공예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다는 생각이었다. 화가들은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으며, 형태와 구성 사이에서의 색채 사용으로 미감의 근본에 대한 통찰력을 길러줄 수 있다고 믿었다. 화가 요하네스 이텐과 라이오넬 파이닝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오스카 슐레머, 요셉 알버스 등 당시 쟁쟁한 이름들은 모두 그로피우스가 발탁한 바우하우스의 교사들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 & 필립 존슨, 뉴욕 시그램 빌딩, 1958년
미스 반 데어 로에 & 필립 존슨, 뉴욕 시그램 빌딩, 1958년
1919년 4월, 바우하우스의 창시자이자 초대 교장이었던 그로피우스는 바이마르 주 바우하우스 프로그램 선언문의 서두에 ‘모든 예술창조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이라고 명시했다. 이것은 각기 흩어져 있던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고 공예가와 화가 및 조각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기술을 결합시켜 협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공예의 지위를 순수미술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미술가와 공예가 사이의 장벽을 이루는 계급 구분을 없애 새로운 공예가 길드(guild)를 조직하는 것이다.
더 뉴 라인, 1931년, 나즐로 모흘리 나기 디자인, 1931년
더 뉴 라인, 1931년, 나즐로 모흘리 나기 디자인, 1931년
바우하우스는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제품과 디자인을 대중과 산업체에 판매함으로써 학교 재정을 공공 보조금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학교가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학생들이 현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단순한 디자인 교육이 아닌 경제적인 생존의 문제로 접근했다. 이는 기초과정의 필수 이수과목으로 회계와 부기를 가르쳐 학교를 나와서 공방을 운영하는데 경제적 자립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오늘날 경제 개념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철학이었다. 오늘날 미술대학의 디자인 필수과목에 미술의 기초 드로잉과 언어나 역사의 인문학이 포함돼 있는데 경제학과 경영학의 기초과목도 디자인 필수과목에 포함시킨다면 학생들이 졸업 후 자립적으로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장관사 부엌, 1926년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장관사 부엌, 1926년
바우하우스라는 명칭은 그로피우스의 교육철학 중 하나다. 명사 ‘바우(Bau)’가 문자 그대로 ‘건물’을 의미하지만 중세 독일어에서 바우휘텐(Bauhutten)은 석공과 건축업자와 장식가들의 길드였다. 바우엔(Baeun) 또한 ‘농사짓다’라는 의미로 씨 뿌리고 가꾸고 결실을 얻겠다는 그로피우스의 생각을 담은 것이다. 바우하우스 학생들은 자신의 기술을 건축 프로젝트와 결합시키는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협동 작업은 중세 길드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으로 중세의 석공조합처럼 배타적인 공동체가 형성됐다. 그로피우스에게 교수라는 단어는 학구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바우하우스가 반아카데미적인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 선생들을 장인으로 부르고 학생들을 직공이나 도제로 부름으로써 학교가 공예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현실 노동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깨닫게 했다. 이러한 현실성은 고스란히 반영돼 교육이 곧 제품으로 출시됐다. 오늘날 ‘바우하우스’라는 명칭이 건축자재나 디자인 사무소 혹은 의류가게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바우하우스가 표방하는 디자인 철학의 결과가 일반화된 결과다.
K. J. 주커 & 빌헬름 바젠펠트, 유리 테이블 램프, 1923~1924년
K. J. 주커 & 빌헬름 바젠펠트, 유리 테이블 램프, 1923~1924년
바우하우스 디자인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사는 1925년 여름에 착공해 이듬해 10월에 완공했다. 그로피우스는 학생과 교사진의 생활공간뿐 아니라 새로운 숙박시설의 디자인도 맡았다. 바우하우스는 강의 구역, 행정 구역, 그리고 학생 주거 지역을 철근 콘크리트의 직사각형 블록으로 연결했다. 이것은 근대화 운동의 양식으로 된 대규모 공공건물의 최초 사례다. 그로피우스는 전체를 평지붕으로 했고, 작업실에 많은 양의 빛을 공급하기 위해 4층 규모의 실습실 건물에 거대한 유리 커튼 벽을 사용했다. 동시에 10개의 창문을 열 수 있는 도르래 시스템의 기술적인 기교는 놀라웠다. 강의실과 공방, 극장과 식당, 그리고 28개의 학생용 스튜디오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옥상 정원을 두었다. 주 건물의 외관은 모두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골격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강화됐고, 들보 위에 놓인 바닥에는 속이 빈 타일을 사용했다. 모든 재료와 공법이 새로웠다. 이는 훗날 그로피우스와 한스 마이어를 이어 3대 바우하우스 교장이 된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1958년 뉴욕 메디슨가에 세운 최첨단 고층 오피스 빌딩인 시그램 빌딩의 모델이 됐다. 직선과 유리, 단순함과 강철 구조, 수직과 콘크리트 등 모든 것이 바우하우스 건축의 결정체였다.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한 삼일빌딩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해 1979년에 완공한 한국 최초의 지상 31층 고층 빌딩으로 바우하우스 건축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다. 바우하우스에서는 모든 설비와 가구를 기능적으로 단순하게 디자인했다. 바우하우스 워크숍 공간은 전적으로 디자인을 위한 것이었다. 각진 모양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극장 조명은 나즐로 모홀리 나기가 디자인했고 파이프식 금속 좌석은 당시에는 학생이었으나 이후 바우하우스의 강사가 된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했다.
데사우에 있는 발터 그로피우스 집, 1926년
데사우에 있는 발터 그로피우스 집, 1926년
바우하우스 교장실 천장 조명은 네덜란드의 피에트 몬드리안이 중심이 돼 개성을 배제하는 주지주의적 추상 미술운동으로 색의 사용보다 색면 구성을 강조해 구성에 있어서의 질서와 배분을 중요하게 여긴 데 스틸(De Stijl·신조형주의)의 영향을 받아 모흘리 나기가 디자인했다. 막대형 관등을 직각으로 연결하고 가는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통해 전선을 집어넣어 원하는 길이만큼 천장과 벽에서 떨어져 설치하도록 구성했다. 조명의 효과와 공간 구성의 분할과 배분을 통해 실험적 설치작품 같은 분위기를 보여준다. 바닥에 놓인 팔걸이의자는 그로피우스가 디자인했고 융단과 벽걸이 카펫은 바우하우스 직물공작실에서 만들었다. 벽면 카펫 문양은 직선으로 구성했다. 직선은 모던의 대명사다. 우아한 곡선의 장식이 배제된 직선의 단순함은 바우하우스의 상징이다.
마르셀 브로이어, 베를린에 있는 에르빈 피스카토르의 집, 1927년
마르셀 브로이어, 베를린에 있는 에르빈 피스카토르의 집, 1927년
바우하우스의 완성
1926년, 도보로 바우하우스 교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베르퀴나우어 알레의 소나무 숲속에 교수진의 숙소 세 채를 완공했다. 그로피우스는 교장인 자신의 독립된 관사와 다른 교수들을 위해 칸막이벽으로 이어지게 디자인했다. 숙소는 주거 기능을 고려해서 엄격하게 디자인됐고 완전히 기능적인 구조였다. 언뜻 보아도 주거에 불편해 보일 만한 가구가 많지 않으며, 매우 적은 수의 색채로 장식돼 있다. 이러한 경제적 접근은 욕실과 부엌에 가장 적합했다. 그로피우스의 집 부엌은 능률적인 것의 표본이며 세탁기나 눈높이에 맞춘 오븐 같은 최신 가재도구를 모두 갖추고 있다. 수납장이 설치돼 정리가 수월해졌고, 접시와 조리기구들이 벽걸이에 안정적으로 정돈돼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으로 쓰고 있는 붙박이 부엌의 원조 디자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기존 주택과는 다른 생소한 주방이었다. 이 주택 가운데 한 채에 살았던 칸딘스키의 부인의 회상이 인상적이다.
오스카 슐레머, 바우하우스 계단, 1932년, 캔버스에 유화, 161×113cm, 뉴욕 현대미술관(MOMA)
오스카 슐레머, 바우하우스 계단, 1932년, 캔버스에 유화, 161×113cm, 뉴욕 현대미술관(MOMA)
“거기에는 생활하기에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로피우스는 현관을 커다란 투명유리벽으로 만들어 누구나 집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골치를 앓던 칸딘스키는 현관 안쪽 유리벽을 온통 흰색으로 칠해 버렸다. 그로피우스는 집을 지으며 실내장식에 색채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칸딘스키는 색채로 꾸며진 공간 속에서 살고 싶어 했다. 우리는 방 안에 색칠을 했으며 주방은 흑백으로 칠했다.”

모던은 불편함이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새로운 미감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바우하우스에서 시작한 모던라이프의 불편이 21세기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편해졌다. 이제 아무도 커다란 유리창에 하얀 실내 벽을 불편하다고 탓하지 않는다. 바우하우스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인 ‘미술과 공예가 건축에 귀결한다’가 완전하게 이해됐기 때문이다.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사 교장실, 1926년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교사 교장실, 1926년
바우하우스의 작업장에서 생산된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마리아너 브란트(Marianne Brandt), K. J. 주커(K. J. Jucker), 빌헬름 바젠펠트(Wilhelm Wagenfeld) 같은 학생들이 만든 램프 디자인으로, 이것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걸쳐 대량 제조됐다. 그 램프는 튼튼하고 기능적이며, 유행하는 근대양식으로 상품화됐다. 이는 바우하우스의 실험적 디자인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가 됐다.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바우하우스 제품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바실리 체어다. 금속 파이프를 휘어서 가죽으로 마감한 이 의자는 당시 일반 대중을 위해 디자인됐지만 제조원가가 턱없이 비싸 더 이상 실용적이지 않아 세월이 한참 흘러 오늘날에 와서조차도 비싸게 판매되고 있다.

슐레머가 디자인한 최초의 바우하우스 로고는 직선과 면으로 이루어졌지만 마치 사람의 옆모습을 연상시킨다. 오늘날 LG의 로고가 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얼굴 이미지와 흡사한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여운은 아닐까. 1931년 모흘리 나기가 디자인한 포스터 ‘더 뉴 라인(the new line)’에서 유리와 철제 가구를 당시 최신의 생활 감각으로 보여준다. 유리와 철제 가구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다. 바우하우스가 비로소 완전하게 바우하우스가 된 것이다.



최선호 111w111@hanmail.net
[DESIGN ODYSSEY] Bauhaus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 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