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보초니(Umberto Boccioni·1882~1916)는 미래주의 화가다. 보초니와 같은 미래주의자들이 진정으로 꿈꾼 것은 단순한 미술의 혁신이 아니라 그를 통한 사회 혁신이었다. 그들은 속도로 상징되는 테크놀로지를 미래 사회의 대안으로 생각했다.
‘창기병들의 돌진’, 1915년, 종이 위에 템페라와 콜라주, 소장처 미상
‘창기병들의 돌진’, 1915년, 종이 위에 템페라와 콜라주, 소장처 미상
이 그림은 대체 무엇을 묘사한 것일까. 그림 가운데를 차지하는 있는 형체는 말 탄 기사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형태는 명확하지 않고 마치 사진의 연속 촬영 기능을 활용해 겹쳐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그 맞은편에는 창을 든 기사를 향해 사격을 가하는 무장 군인들이 묘사돼 있다. 그들 역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달려가는 말을 향해 총부리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 역시 연속 동작인 것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화가 움베르토 보초니의 ‘창기병들의 돌진’이라는 작품이다. 이탈리아 남단의 레기오 칼라브리아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보초니는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포를리, 제노아, 파도바, 시실리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로마 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평생지기인 지노 세베리니를 만나게 된다. 반골 기질이 강했던 보초니는 당시 니체와 사회주의에 심취했고 세상의 전복을 꿈꿨다고 한다. 그는 자코모 발라의 제자가 됐는데 발라는 반전통주의자로 프랑스 점묘파의 회화 원리를 추종하던 인물이었다.


입체파 원리 받아들인 뒤 구성 간결해져
파리에서 인상주의 이후의 최신 예술 경향을 경험하고 이탈리아에 돌아온 보초니는 시인 필리포 마리네티가 주도하는 미래주의 운동에 가담한다. 마리네티는 혁신을 꿈꾸는 화가들을 규합해 미래주의 미술 운동을 주도하며 그 강령인 ‘미래주의 화가 선언문’을 1910년 3월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 포에지(Poesie)에 게재한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미래의 예술은 속도, 폭력, 기계 시대를 찬미하는 것이어야 하며 엔진에 의해 움직이는 역동성(dynamism)을 반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움직이는 물체는 눈의 망막에 이미지가 남아 마치 진동처럼 그 이미지가 지나온 공간이 연속돼 나타난다”며 따라서 “달리는 말은 4개의 다리가 아닌 20개의 다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사람의 형상을 그릴 때는 인물뿐만 아니라 그 분위기도 그려야 한다”며 “우리 몸은 우리가 앉아 있는 소파로 파고들며 반대로 소파는 우리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건물 사이로 달려가는 전차도 건물로 들어가고 반대로 건물은 전차에 섞여버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기계문명과 도시에 바탕을 둔 역동성의 미학은 마리네티에 공감하던 미래주의 화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보초니는 그 충실한 번안자였다.
‘동시적 비전’, 1911~1912년, 캔버스에 유채, 부퍼탈 폰 데어 하이트 미술관
‘동시적 비전’, 1911~1912년, 캔버스에 유채, 부퍼탈 폰 데어 하이트 미술관
이 점은 ‘창기병들의 돌진’은 물론 ‘집으로 밀려드는 거리의 소음’에도 잘 드러나 있다. 중앙의 한 여인(보초니의 어머니)이 발코니에서 건설 현장을 내다보는 모습을 포착한 이 작품은 마리네티가 말한 대로 잔상의 원리에 입각해 물체와 물체, 물체와 사람이 한데 섞여버린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여인이 내다보는 거리의 역동적 움직임과 그것들이 발산하는 소음,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한 건축물들은 서로 파고들어 섞여버린 듯하다.

보초니의 역동성의 미학은 갈수록 다듬어져 1913년에 그린 ‘사이클 타는 사람의 역동성’에서는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가 주도한 입체파의 원리가 덧붙여져 구성이 훨씬 간결하고 색채도 종전의 과격한 원색 중심에서 벗어나 중간색 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사이클 타는 사람의 역동성’, 1913년, 캔버스에 유채, 구겐하임 컬렉션
‘사이클 타는 사람의 역동성’, 1913년, 캔버스에 유채, 구겐하임 컬렉션
현실 감각이 결여된 이상주의자의 신미술 운동
보초니를 비롯한 미래주의자들의 그림은 인상주의 이후 프랑스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아직도 달콤한 르네상스의 영광에 젖어있던 이탈리아 미술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래주의자들이 진정으로 꿈꾼 것은 단순한 미술 혁신이 아니라 그를 통한 사회 혁신이었다. 그들은 속도로 상징되는 테크놀로지를 미래 사회의 대안으로 생각했다. “힘차게 질주하는 유선형의 경주용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니케 승리상보다 더 아름답다”고 한 마리네티의 말 속에 이 점이 잘 드러나 있다.

미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도시가 잠든 시에스타 시간에 확성기를 들고 다니며 과격한 정치적 구호를 외쳐댔다. 이들은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종탑에 올라가 “박물관과 도서관을 불태워라”, “베네치아 운하의 물을 빼내라”, “바보들의 흔들의자인 곤돌라를 불태워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난 군중은 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의 행동은 현실 감각이 결여된 이상주의자의 그것이었다.
‘집으로 밀려드는 거리의 소음’, 1911년, 캔버스에 유채, 하노버 스프렝겔 미술관
‘집으로 밀려드는 거리의 소음’, 1911년, 캔버스에 유채, 하노버 스프렝겔 미술관
유토피아를 꿈꾼 이 과격한 젊은이들의 신미술 운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운동의 중심에 섰던 보초니의 때이른 죽음 때문이었다. 역동적인 미래를 꿈꾸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입대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구시대의 상징인 기병대에 배속된다. 그는 1916년 8월 17일 불의의 낙마사고로 말발굽에 짓밟혀 숨을 거두고 만다. 과격한 미래주의자에 대한 전통의 단죄였는지도 모른다.

미래주의 미술 운동은 가장 재능 있고 능동적인 리더인 보초니를 잃은 뒤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스피드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미래주의자의 유토피아는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됐다. 빨리 움직이는 자만이 살아남는 그 유토피아가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정석범 한국경제 문화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