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강신주의 ‘감정수업’

처음엔 당황했고 나중엔 쾌감을 느꼈다. 강신주 박사를 만난 이날의 감정 변화는 그랬다. 책이 아닌 면전에서 직설적이고 독한 멘트를 단호하고 일관되게 날리던 그의 모습에 ‘당황’했다면, 스스로 깨닫지 못하던 것까지 끄집어내 분석해주니 속 시원할 수밖에. 이렇듯 감정이란 우리 삶에서 일분일초도 떼어놓을 수 없는 인생의 주인공인 것을, ‘감정수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BOOK WE ATTEND] 자기감정 응시하는 것, 살아있음의 증거
오해했다. ‘감정수업’에 숨은 의도를. 감정에 있어 절제와 통제가 더 요구되는 세상이고, 극단적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인 성공이라 일컬어지는 자리에 가까워지는 시대이니 ‘감정을 다스리는 마음수업’ 정도로 생각했다. 철학자 강신주가 저자라는 사실을 간과해 생긴 오해다. 그의 표현처럼 ‘지하 벙커’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지독하게 현실적인 인생 고민을 상담하며 가혹한 독설과 촌철살인으로 진정한 삶의 속살을 돌려주던 그가 아니었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고, 늘 당당하라고, 거침없는 발언으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하던 강신주의 태도가 달라질 리 없음을 ‘감정수업’은 다시 확인시켜준다.

그러니까 ‘감정수업’의 실체는 자기감정에 솔직하라는 것, 숨지 말고 정면을 응시하라는 것, 그게 살아 있음의 증거고, 그래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뤄지는 감정의 진단 같은 것이다. 우리가 늘 달고 사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내 감정 상태를 모르겠다”는 말은 진짜 몰라서라기보다 회피인 경우가 많지만, 혹 진짜 모르겠거든 ‘감정수업’을 시작해보길. 사랑이라는 감정부터 연민, 반감, 환희, 자긍심, 경탄, 비루함과 슬픔에 이르기까지 ‘감정의 윤리학자’인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분류한 인간의 48가지 감정에 대한 일종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으니.

각 감정수업의 진행 방식도 흥미롭다. 각각의 감정들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굴곡지게 하는지 걸작을 통해 보여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문학작품들을 깊게 독해하는 방식’인 것이다. 더불어 사람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응원하는 철학자이자 인생 선배로서의 어드바이스가 곁들여지니 이보다 친절한 수업이 또 있을까.


인간의 감정이 48가지라는 사실을 먼저 자각했습니다.
“스피노자의 분류에 따른 건데 사실 우리 감정은 그 48가지 안에서 못 벗어납니다. 감정의 ‘원색’들이죠. 물론 그 감정들이 섞일 수는 있을 겁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감정의 양대 산맥은 기쁨과 슬픔이에요. 그 기쁨의 정상에 있는 게 사랑이고요. 나머지 감정들은 기쁨과 슬픔의 언저리에 서 있죠.”


지금 시대에 감정수업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가 뭔가요.
“두 가집니다. 첫째는 감정이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권위적인 사회에서는 감정을 억압합니다. 표현하면 다치죠. 명절날 시댁에서의 며느리도, 군대에서의 군인도,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도 모두 감정을 드러내지 못해요. 그런데 바로 그때 죽어 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여행을 가는 이유가 뭐겠어요. 감정을 살리려고 가는 거예요. 감정이란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야 생기는 것이니까요. 감정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어요. 둘째는 감정에는 얼굴이 너무 많고 방향이 다 달라서 자칫 자기감정을 잘못 판단하거나 착각했다가는 비극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행복으로 가려면 자기감정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거예요. 연민을 예로 들어볼까요. 연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슬픔의 감정이에요. ‘그는 불행한 남자야. 내가 필요해.’ 이것이 연민의 공식이죠. 하지만 연민에 빠진 여자가 바라는 건 그 남자의 행복이 아니에요. 불행한 사람을 돌보고 있다는 우월감이죠. 이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그러니 연민의 대상과 함께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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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수업’이라는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인간의 ‘감정’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
“지난 2년간 ‘지하 벙커’에서 ‘다상담’을 해왔던 게 영향을 끼쳤죠. 결혼 문제, 가정폭력 등 오만 가지 걱정거리와 테마를 들고 상담하러 찾아온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가 바로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었어요. 기본이 안 돼 있는 거죠. 감정은 순간적이라고들 이야기하는데 그것이야말로 해묵은 편견입니다. 감정은 절대 순간적이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이성적이기보다 먼저 감정적이에요. 이성이 감정보다 먼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죠. 그래서 그 감정의 본질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감정에 대해 정확히 알면 섬세해지고 타인과의 갈등도 미리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도 바뀌는 법이에요.”


하지만 세상을 사는 데는 분명 통제와 절제의 미학도 필요하지 않나요.
“미학? 그게 무슨 미학입니까. 통제와 절제는 최고경영자(CEO)가 원하는 거겠죠. 인생에는 미사여구가 없어요. ‘미학’이니 어쩌니 하는 말로 자기감정을, 삶을 포장할 뿐이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공동체들을 보면 모두 감정을 표현하면서 지내는 경우예요. 다만, 그런 건 있어요.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받아들이면 돼요. 설령 남루하고 비겁함을 견디고 살고 있다면 그 자체를 인정하세요. 그걸 받아들이면 당장은 상처로 인해 아프겠지만, 몇 년 지나면 좋아져요. 생각해보세요. 건강검진을 통해 암이 발견돼 고치는 게 낫겠어요, 모르고 있다가 죽는 게 낫겠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직면’입니다. 영화를 볼 때도 한 편을 제대로 보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확연히 달라요. 감정은 오죽하겠습니까. 감정에 직면하고 진짜 제대로 겪고 경험한 사람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감정을 진단하는 게 먼저겠네요. 힘들더라도 말이죠.
“당연합니다. 제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게 되는 과정이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다들 상담이 끝나면 힘들어해요. 절벽으로 몰아넣으니까요. 그런데도 원망하는 사람 하나 없어요. 왜일까요. 그로 인해 새로운 생이 열리기 때문이죠. 그 생은 자신이 당당하게 감당하면 되는 거고요. 더불어 감정도 겪을 만큼 충분히 겪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진짜 제대로 된 사랑을 한다면 평생 몇 명 사랑할 수도 없을 겁니다. 이별도 마찬가지예요. 제대로 이별하고 제대로 아픈 뒤에야 그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요.”


‘감정수업’을 읽고 고통스럽다고 느끼면 성공한 거네요.
“그렇죠. 그런데 좋은 감정도 많아요. 감정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도 그렇고, 기쁨, 경탄, 자긍심, 환희, 끌림, 희망 등은 우리 삶을 빛나고 아름답게 하는 감정들이죠. ‘감정수업’은 교양이 아니라 실천적 책이에요.(웃음) 누구를 만나 어떤 마음이 들거든 찾아서 읽어보세요. ‘아, 지금 내 감정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또 하나, 48가지 감정들 중 중요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으니 서열과 우열을 매길 수는 없겠지만, 그중 유난히 가슴에 와 닿거나 남는 감정이 있다면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이라는 증거일 겁니다. 그럴 땐 그 감정에서 언급된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풍성한 경험이 될 겁니다.”


스스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입니다.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되는 세상을 꿈꾼다’는 저자 소개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데요.
“김수영 시인은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게 시라면서, 모든 사람이 시를 쓰게 돼 시인이 불필요한 세상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었죠. 저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돼 철학자가 없는 시대가 되는 것, 저 같은 철학자가 실직하는 게 꿈이죠. 소크라테스가 ‘철학 산파’라고 했잖아요. 산파의 역할이 그런 거죠. 자기가 아이를 낳는 게 아니라 고통스럽게 하고 아이를 낳게 도와주는 것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아이 하나 낳을 때까지 ‘철학 산파’ 역할을 계속 해야죠.”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