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서 코반 사장

코반은 단추를 중심으로 패션 액세서리를 제조하는 회사다. 금융인 출신의 박종서 사장은 1994년 코반을 인수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20년째 제조업체를 경영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의 성공 비결을 배워 본다.
[SECCESS STORY] “미래 위해 급한 일 있더라도 중요한 일 간과해선 안 됩니다”
코반이 만드는 단추, 버클, 지퍼, 스냅 등은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일본, 홍콩, 중국, 태국, 호주, 이탈리아 등 전 세계 8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주요 납품 업체는 미국의 갭, 캘빈클라인, 랄프로렌 폴로, 앤테일러, 투미, 스케쳐스를 비롯해 이탈리아 컴비팰 등이다.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에 달린 단추 등 액세서리가 코반의 제품이다.

세계적인 브랜드에 납품하다 보니 해외 출장이 중요한 일과가 됐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해외 출장을 시작하는데, 올해도 4월부터 출장 계획이 잡혀 있다. 1년에 많게는 120일, 적게는 100일 정도 해외에 나가 있다. 올해는 미국, 일본을 넘어 유럽 시장에 적극 진출할 계획이다. 중국 시장 확대도 중요한 경영 목표다. 중국 진출 5년째를 맞아 베이징과 광저우 지사를 중심으로 시장을 넓힐 생각이다.


금융인에서 제조업체 사장으로 변신
사양 사업으로 불리던 의류 액세서리 업계에 뛰어든 지 올해로 20년. 코반을 세계적인 의류 액세서리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은 박 사장은 원래 금융인 출신이다. 1983년 대한생명(지금의 한화생명)에 입사해 1991년까지 근무했다. 영업소장 시절에는 두 번이나 영업소를 분할할 정도로 탁월한 영업성과를 기록했다.

영업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91년 당시 새 출발한 신한생명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일교포가 주주로 참여한 신한생명에서 일본의 발달된 생명보험업을 경험하고 싶어서였다. 박 사장은 여느 샐러리맨처럼 승진이나 급여 조건이 이직 사유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직하면서 그가 내건 유일한 조건은 “잘하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해 달라”는 게 전부였다. 그런 그를 주변에서는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는 근무 여건보다 선진 보험 시장을 경험하는 게 더 중요했다. 신한생명에서는 1994년까지 대전·충북 영업국장으로 10~15개의 영업소를 관리했다. 신한생명에서 입지를 굳히던 그가 제조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의 일이다. 친구의 소개로 아이바스(지금의 코반)를 소개받았다.

“제 나이가 마흔에 접어들던 해였습니다. 마흔이 되면서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됐는데, 뭔가를 이룰 수 있는 게 10년밖에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조업체에 대한 꿈은 그전부터 갖고 있었고요. 더 늦춰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경영 환경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아이바스를 인수한 시기는 섬유업체 전체가 사양 산업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그는 제조업이나 무역업에는 문외한이었다. 주변에서도 오래 가지 못할 거라며 회사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봤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경험은 없지만 금융업보다는 실체가 있는 제조업이라는 장점, 여기에 단추, 버클 등 특화된 아이템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이템이 특화됐다는 말은 대기업이 뛰어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잘만 하면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제조업이나 무역업 경험은 없지만 대기업에서 근무한 경험은 회사 경영에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당시 업계 사장들은 대부분이 기술자 출신이어서 기술에는 밝지만 경영에는 전문화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로 인해 회사 경영과 조직 관리, 마케팅 능력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반면 그는 대기업에서 조직 관리와 마케팅 등을 배웠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자신이 있었다.

여기저기 돈을 그러모아 회사를 인수한 게 1994년 9월이다. 회사를 인수하고 처음 한 일이 사명을 변경하는 일이었다. 기존 사명은 전 사장이 상호를 등록해 놓은 터라 사명을 바꿔야 했다. 사명은 그의 경영 철학과 문화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어야 했다. 사명을 찾아 3개월을 역사서, 문화서 속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탄생한 이름이 ‘코반’이다.

코반은 사명을 고민하던 박 사장이 한 역사서에서 찾은 이름이다. 코반은 스키타이 문명보다 200년 앞서 흑해 주변에서 발생한 문화권으로, 청동기 혹은 철기시대의 특징을 보이며 창의력과 예술성이 뛰어났던 민족이다. 독창성과 예술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박 사장 입장에서는 코반만큼 맞춤인 이름도 없었다. 원래 어원에 코리아의 ‘KO’, 버튼의 ‘B’, 액세서리의 ‘A’, 네트워크의 ‘N’을 덧씌워, 그만의 코반으로 재탄생시켰다.


‘관리’라는 말은 잘못 쓰면 ‘완장’이 된다
재탄생한 코반의 생일은 11월 1일이다. 창립기념일을 1이 세 번 들어가는 날로 잡은 데도 그만의 이유가 있었다. 세계 1등, 디자인과 기술 1등, 직원 대우 1등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절치부심 끝에 코반의 깃발을 올렸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험난했다. 가장 어려운 건 직원들의 마인드였다. 막상 회사에 와 보니 기업 문화도, 경영 철학도 없었다. 자연 직원들의 이직이 빈번했다.

“회사를 위해 뜻이 모이고 집중되는 게 없었어요. 가장 심각했던 건 직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100을 하라고 해서 100을 하면, 다음에는 더 시킨다는 생각에 70~80만 하는 거죠. 철학이나 비전이 없으니까 당연한 결과였죠.”

1·1·1 비전은 이 같은 배경에서 탄생했다. 비전 달성을 위해 박 사장은 우선 기술자들을 이직한 경력자와 자체 양성한 인력, 두 부류로 나누었다. 이직한 경력자들은 곤조가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보수적이다. 자기 우월감으로 인해 배타적인 경향도 있었다. 실제로 가장 바쁜 때 단추 구멍 뚫는 기술자가 결근한 적이 있다. 따져 물었더니 “머리가 아파서 강원도를 다녀왔다”고 했다. 경력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며,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보다 못한 박 사장은 업종과 관련 없는 사람을 뽑아 기술자로 육성했다. 이와 함께 대졸자를 직원으로 뽑기 시작했다.

둘째로 그는 관리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기술자가 없더라도 공장이 원활히 돌아가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가 없어도 회사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술자들의 마인드도 달라졌다. 기술자들에게는 ‘1인 3기’를 요구했다. 전후 공정을 이해하면 자기가 맡은 공정에서 더 높은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관리’라는 말을 안 씁니다. 처음부터 그랬어요. 기획, 경리, 마케팅 등을 관리부서가 아니라 지원부서라고 부릅니다. 관리라는 말은 잘못 쓰면 ‘완장’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대할 때 감정이 개입돼요. 그래서 일찍부터 팀제를 도입해 수평적인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정책이 자리를 잡으면서 회사는 안정 궤도에 올랐다. 조직이 안정되자 품질도 좋아지면서 국내에서 인정받는 기업이 됐다. 가능성이 보이자 직원들의 태도가 또 달라졌다.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성공적인 M&A는 준비된 자의 것
그러던 차에 개인적인 어려움이 덮쳤다. 사업하던 친구가 부도를 맞은 것이었다. 문제는 친구에게 보증을 서준 탓에 그 빚을 고스란히 박 사장이 떠안게 된 것이다. 공장에 차압 딱지가 붙었다. 어렵사리 회사를 경영하던 이듬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까지 왔다.

친한 친구에 대한 배신감에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직원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제품 개발에도 힘을 쏟았고 그 결과물을 담아 1년에 두 번 새로운 카탈로그를 제작해 바이어들에게 돌렸다.

“당장은 힘들지만 살아남을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일에는 급한 일과 중요한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빚을 갚는 건 급한 일이고, 직원을 교육하고 제품을 개발하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급한 일에 치여서 중요한 일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은 게 가장 잘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SECCESS STORY] “미래 위해 급한 일 있더라도 중요한 일 간과해선 안 됩니다”
제품 개발과 함께 박 사장이 주력한 일이 해외 진출이다. 해외 진출의 계기가 된 건 1998년 연말이었다. 당시 국내 단추 업계에 선두 기업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회사였지만 섬유 산업의 침체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박 사장은 단추의 원료를 제공하는 업체를 통해 그 기업의 얘기를 들었다. 그 뒤 기업을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회사 사정이 심상치 않았다.

경쟁 업체가 부도날 경우 그 회사의 제품을 대체할 상품을 개발했다. 제품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개발에 6개월에서 1년이 걸렸다. 제품 개발이 완료됐을 무렵 경쟁 업체가 원료가 없어 작업을 못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즉시 그는 미국 바이어를 찾아갔다. 바이어들을 만나고 한국에 돌아온 날, 경쟁 업체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신의 회사를 인수해 달라는 것이었다. 굳이 회사를 인수하지 않아도 해외 바이어를 잡는 데 어려움이 없을 듯했다. 하지만 같은 제조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못 본 체할 수는 없었다. 박 사장은 그걸 상도덕이라고 생각했다. 인수 제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서로 만족할 만한 수준에서 경쟁 업체를 인수했다.

금전적으로 조금 손해를 봤을지언정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해당 업체 사장과 지금도 잘 지내는 것은 그 덕이다. 그는 사업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회사를 인수하면서 당연히 해외 거래처가 급증했다. 코반의 위상도 달라지고 매출도 급증했다. 하지만 이듬해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회사 인수 전 미국 지사장을 지낸 사람이 중국에 공장을 지은 후 인력과 홍콩 거래처를 빼앗아 간 것이다. 아픔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매출에 영향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미국 시장에 집중했다.
[SECCESS STORY] “미래 위해 급한 일 있더라도 중요한 일 간과해선 안 됩니다”
현재 관심은 직원들의 재테크
미국은 패션의 선두주자로 성장 잠재력이 여전히 큰 시장이었다. 미국 시장에 집중하면서 품질 개발에 더 박차를 가했다. 세계 시장에 진출했지만 한국 제품은 여전히 일본이나 이탈리아에 뒤처져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제품은 그들 제품의 카피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품 개발에 열을 쏟으면서 1년에 두 번 미국 바이어들을 찾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제품 카탈로그를 돌렸다. 미국은 한국과 문화가 달라서 손님이 찾아와도 밥은 고사하고 차 한 잔 내놓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푸대접에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찾아갔다. 때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 신제품 카탈로그를 들이밀자, 그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신뢰가 어느 정도 쌓이고 우리 제품이 인정을 받으면서 전략을 바꿨습니다. 가능성 있는 곳만 찾아가는 거죠. 그랬더니 우리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어요. 몇 년 안 가다 찾아가면 무척 반가워하더군요. 그게 다 전략인 거죠. 2010년이 되자 우리를 파트너로 인정하더군요. 지금은 바이어들이 우리 카탈로그를 돈 내고 사 갑니다.(웃음)”

코반이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와 파트너가 된 데는 그런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그 중심에는 경쟁력 있는 제품이 있다. 현재 코반은 네온 단추, 빈티지 단추, 카세인 단추, 무독성 멜라닌 단추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제품이 단가가 비싼 친환경 제품이다. 카세인으로 만든 단추는 땅에 묻으면 3~6개월 만에 썩는 제품이고, 세계 최초로 개발한 무독성 멜라닌 제품은 식기에 쓰이는 재료를 활용한 친환경 제품이다. 박 사장은 당분간 친환경 제품 개발에 치중할 계획이다.

사실 단추도 기술이 무궁무진하다. 코반의 신제품들은 다른 산업의 기술을 도입한 융·복합의 산물이다. 박 사장은 어렵게 제품을 개발하지만 특허도 내지 않고, 상표 등록도 하지 않는다. 업계 특성상 그럴 경우 오히려 경쟁 업체에서 카피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섬유 산업을 사양 산업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고부가가치를 내고 있습니다. 산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부가가치를 만드느냐가 관건인 거죠. 같은 휴대전화기라도 폴더폰과 스마트폰의 부가가치는 다릅니다. 많은 공장이 인건비 때문에 중국으로 갔지만, 경비 절감만으론 미래 시장에 대비할 수 없다고 봅니다. 생존 전략보다 중요한 게 미래를 준비하는 겁니다.”

제품이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지금, 박 사장의 눈은 직원들을 향하고 있다. 금융인 출신답게 현재 관심은 직원들의 재테크다. 회사와 직원이 펀드를 조성해 수익형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정년을 70세까지 연장해 노후를 대비한다는 게 현재 그의 구상이다. 1·1·1 비전 중 남은 하나의 약속을 위해 박 사장은 그렇게 준비하고 있다.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 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