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피아니스트 조재혁

예상했던 대로 밝고 경쾌했다. 인터뷰 내내 ‘스타 피아니스트’ 조재혁은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킬 정도의 환한 웃음을 자주 보여 줬다. 반면 짧은 질문에도 머릿속에서 꼼꼼히 정제한 언어로 답을 이어갔다. ‘해설이 있는 연주회’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이 음악가는 피아노로 음악을 연주한다기보다는 말을 건넨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스스로의 음악을 “시간의 퇴적물이 인생 구석구석에 켜켜이 쌓인 결과”라고 말하는 조재혁의 음악 인생을 들어봤다.
[BREAK FOR MUSIC] 피아노로 말을 건네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청중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스튜디오에 처박혀 녹음만 몰두했던 글렌 굴드, 공연 직전 ‘청중의 평가는 필요 없다’는 이유로 종종 예정된 독주회를 취소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러한 기벽에 가까운 일화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는 이들이 바로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이리라. 수도자처럼 ‘음악’이라는 누에고치 안에 칩거하는 삶은 우리가 보아온 음악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치자면 피아니스트 조재혁은 ‘이단아’다.

올해 상반기에만 그가 무대에 오른 횟수는 60여 회, 방송만 50회 정도 출연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불러주는 곳이 많았고” 가는 곳마다 마이크를 잡았다.

대부분 연주만 하고 끝내지 않았다. 스토리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지난 8월 인천종합문화예술관에서 개최된 청소년음악회를 통해 ‘해설이 있는 조재혁 피아노 리사이틀’을 선뵀다. 9월에는 경기도 고양시 고양어울림누리에서 ‘청소년을 위한 음악앨범’ 연주회, 11월에는 의정부 예술의 전당의 렉처 콘서트(Lecture Concert) 무대에 설 예정이다. 연주 뒤 청중과 대화하는 그의 공연장에서 클래식 엄숙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말을 거는 피아니스트’가 된 데는 의외의 인생 공란이 자리하고 있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 온 그가 20대 후반 법대 진학 준비로 1년의 ‘외도’를 한 것. 뒤늦게 찾아온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피아노 치는 게 진실로 즐겁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히 청중들에게도 피아노 건반 뒤에 숨은 기쁨을 알리고 싶었으리라. 얼마 전 쇼팽의 ‘스케르초’를 연주하면서 곡의 구성, 쇼팽이 써 놓은 지시어가 이전과는 전혀 새롭게 다가와 놀랐다고 고백한다. 인생의 지점마다 시시각각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클래식. 이 음악의 마력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고 했다.
[BREAK FOR MUSIC] 피아노로 말을 건네다
‘골방’이 아닌 ‘광장’의 연주자
그는 강원도 춘천 태생으로 만 5세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초등학생 시절 내내 신동 소리를 들으며 다양한 국내 콩쿠르에서 1등을 거머쥐며 두각을 드러냈다. 기교와 테크닉 면에서 완벽해야 하는 슈만의 ‘심포닉 에튀드’를 열다섯 살의 나이에 어렵지 않게 쳤다고 회고하는 그는 “그땐 뭘 몰라서”라며 겸손해했다. 콩쿠르 준비를 위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방학 한 달 동안 독파했다니 당대 피아니스트 대가의 눈에 띄는 건 당연지사. 서울예고 1학년 재학 중 국내 피아니스트 1세대 한동일 선생님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뉴욕 맨해튼 음대 예비학교를 거쳐 줄리아드 스쿨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하는 동안 전체 장학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어 맨해튼 음대에서 니나 스베틀라노바에게 사사하며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양인에게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는 유수의 유럽 콩쿠르에서도 그의 기량은 숨길 수 없었다. 스페인 마리아 칼라스 국제콩쿠르 1위를 비롯, 모나코 몬테카를로 피아노 마스터스 국제콩쿠르, 이탈리아 레이크코모 국제콩쿠르 등 세계 유명 콩쿠르에 입상하기도 했다.

1993년 뉴욕의 프로피아노 영아티스트 오디션에 우승한 것을 계기로 카네기홀 와일 리사이틀 홀에서 뉴욕 데뷔를 한 조재혁은 한국은 물론 미국, 유럽 무대에서 독보적인 피아니스트로 주목받았다. 2010년부터 성신여대 교수직을 맡아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2011년에 시작한 KBS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 ‘장일범의 가정음악’ 수요일 코너인 ‘위드 피아노’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 해설을 곁들인 라이브 연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라디오 코너를 맡게 된 계기도 우연이었어요. 2010년 예술의 전당에서 실내악 앙상블을 연주했는데 당시 주최 측에서 무대 위에서 곡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달라고 요청했어요. 서로 하라고 미루다가 선배라는 이유로 제가 나섰는데 그걸 장일범 씨가 객석에서 우연히 봤다더군요. 다음 해인 2011년에 장일범 씨와 담당 PD에게 전화가 왔어요. 1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해설을 곁들인 연주를 해 달라고요. 새로운 도전이 되겠다 싶어서 승낙했지만 방송 전날 너무 긴장해서 잠도 못 잤어요.”

방송을 통해 ‘스토리가 있는 피아노’ 연주자로 주목을 받았고, 심지어 그가 서는 무대마다 찾아오는 추종자들이 있을 정도로 리스트 못지않은 팬덤 현상의 주인공이 됐지만, 그 스스로 가장 큰 수확이라고 여기는 지점은 따로 있으니 바로 ‘청중과의 소통’이다. 실제로 무대에서 내려와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방송을 들은 뒤에야 음악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고 전하는 청중들의 소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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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연주자이지만 청중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건 너무 감사하죠. 클래식을 비집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인간적인 면모가 다채롭게 담겨 있어요. 블라드미르 아슈케나지가 이런 말을 했죠. 다른 음악 장르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다면 클래식은 인간 감정은 물론 철학, 이념까지 담아낸다고요. 저도 깊이 공감해요. 대부분 클래식이 어렵고 거창하다고만 생각하죠. 전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엄숙하게 듣는 순수예술 같은 음악도 있는 반면 함께 박수치며 즐길 수 있는 클래식도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니 기쁩니다.”

자신에게 한없이 아름다운 예술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그. 이 마음이 연주하는 피아노 음색에 담기고 혹은 라디오 전파를 통해 흐르는 그의 목소리에 담기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조재혁과 쇼팽의 이름을 합성한 ‘조팽’이라는 별명 또한 팬들의 애정이 모여 얻은 타이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19세기 낭만시대를 대표하며 피아노라는 악기가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정점을 쏟아낸 쇼팽이라니.

쇼팽처럼 낭만 가득해 보이는 그이지만 연주 평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완벽주의자’란 타이틀이 따라 붙으니, 그 배경에는 “성격이 무섭다”는 그의 고백이 자리하고 있다.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의외의 이야기에 그는 열다섯 살 때 아버지 앞에서 기절했던 에피소드로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사내아이가 무슨 피아노냐며 반대하셨어요. 아버지 앞에서 조르다가 제 성질에 못 이겨 쓰러졌거든요. 결국 콩쿠르 나가 해마다 1등을 하니 허락하셨어요.”

그저 즐거워서 어려운 줄도 모르고 피아노를 쳤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하는 그. 차곡차곡 예정된 피아노 거장의 수순을 밟아가던 그가 스물여덟의 나이에 ‘내 남은 삶을 피아노에 바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불현듯 떠오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당시 그는 단 한 번도 놓아 본 적이 없던 피아노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을 옥죄는 것 같았다고 했다.

“줄리아드 음대를 7년 다녔을 때였어요. 어느 순간 내가 남에게 잘 보이려고 피아노를 하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쳐야 콩쿠르에 나가서 상을 받을까’만 생각했으니 재미있을 리 없죠.”

그렇게 해서 조재혁은 다시는 피아노 앞에 앉지 않을 것처럼 연습실을 떠났고 법대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 로스쿨 입학시험(LSAT) 과정을 1년간 들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안 쳐도 된다는 해방감에 기뻤으나 옛 애인처럼 피아노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했다. 피아노 없이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먼 길을 돌아온 것이다. 결국, 이 시기는 지금의 피아니스트 조재혁의 연대기에 빠질 수 없는 값진 시간이 됐다. 정신적 사춘기라 해도 좋고 잠깐의 바람이라 해도 상관없을 것이 이전의 조재혁과 다른 ‘사유하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했기 때문. 다시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학교 가는 것이 즐거웠고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생겼다.


삶이 투영된 음악을 피아노로 그리다
음악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를 묻는 것. 세상에서 가장 상투적인 질문일 게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답이 주는 감동의 파장은 깊이와 폭을 감히 재단할 수 없다. 피아니스트 조재혁의 경우 더욱 그랬다.
[BREAK FOR MUSIC] 피아노로 말을 건네다
폭풍 같았지만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1년의 시간을 보내고 그는 30세의 나이에 인생 스승을 만난다. 심기일전으로 맨해튼 음대 박사 과정을 시작하며 만난 니나 스베틀라노바 선생이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전설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에게 사사받은 스베틀라노바는 구소련 시절 전 세계를 무대로 연주회를 순례했던 음악가. 심리학을 공부한 사색가답게 통찰력이 뛰어난 선생은 한 번 격랑의 파고를 간신히 넘어 온 늦깎이 학생 조재혁을 처음 대면한 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서른 살이고 피아노도 잘 치는데 왜 내게 왔지? 네가 가진 음악이라는 팔레트 안에 최대한 많은 색깔을 담아야 해.”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 말을 시작으로 피아니스트 조재혁에게 니나 선생님의 가르침이 화인처럼 남게 됐다.

“피아노 주법, 피아노 다루는 법을 배웠지만 제가 얻은 진정한 깨달음은 음악을 보는 법이었어요. 니나 선생님께 6년간 배웠는데 처음 2년을 가르치시고는 ‘내가 너한테 나의 모든 걸 가르쳐 주겠다’고 말씀하셨죠. 어린아이가 처음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배우듯이 손이 피아노에 다가가는 법, 원하는 소리를 내고 싶을 때 손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셨어요. 이 박사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다른 장르의 음악까지 함께 볼 수 있게 됐죠. 음악을 공부하는 것도 단순히 듣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학문’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어요. 이 시기가 있어 지금 제가 피아노 앞에서 청중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거죠. 음악을 즐기려면 ‘이해’가 필요하거든요. 곡 안에 담긴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어느덧 작곡자와 대화할 수 있고요.”

“한 사람의 모든 면모가 모여 음악으로 표출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갑자기 오래된 영화 ‘마담 소사츠카’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생 때 본 영화인데 셜리 매클레인 주연이에요. 피아노 선생님인 마담 소사츠카가 자신을 찾아온 학생에게 말한 대사가 기억나요. ‘나는 너에게 피아노 치는 것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줄게!’”

피아니스트 조재혁에게 이 짧은 대사 한 줄이 주는 공명이 길 수밖에 없다. 음악이 삶이고 삶이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요즘 더욱 열정을 쏟는 일이 있다. 비전과 꿈을 향해 걸어 온 이들이 최후의 사명을 교육에서 찾는다 했던가. 성신여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또한 조재혁이 걸어 온 행보와 같은 맥락을 보여 준다.

“하나의 악기를 다루는 것은 매우 복합적인 일이에요. 연주자가 피아노의 건반만 치면 타이피스트와 다를 게 없겠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연주 안에 이야기를 담으라고 늘 이야기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테크닉도 음악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뤄져야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20세기를 빛낸 현대음악가이자 교육자로 추앙받는 나디아 불랑제가 “음악은 내가 전혀 모르는 무(無) 속에서 과학의 세계를 만든다”고 했다. 피아노라는 악기에 삶의 이야기를 담아 온 조재혁. ‘다채로운 물감이 담긴 팔레트’ 같은 인생, 그 인생이 투영된 음악을 피아노로 그려 내는 조재혁. 그가 객석의 청중에게, 제자에게 ‘제2의 니나 선생님’이 되고픈 과제를 묵묵히 잇고 있음이 감사한 이유다.


이지혜 프리랜서 | 사진 이승재 기자, 본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