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마니, 1997년 일본 패션쇼 대성공 … TV 생중계도[명품이야기]
입력 2021-12-12 06:00:14
수정 2021-12-12 06:00:14
이듬해 파리 패션쇼는 인공 구조물 미비 빌미로 관객 없이 스태프만 참석한 채 열려
[류서영의 명품이야기] 조르지오 아르마니③조르지오 아르마니는 1997년 11월 15년 만에 일본에 갔다. 그는 일본에서 격하고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의 사진이 도시 곳곳에 나붙었고 메이지공원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패션쇼에는 1200명이 초대됐다. 초대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패션쇼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아르마니 패션은 일본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2006년 아르마니 재팬은 2500억 리라(당시 이탈리아 화폐 단위. 약 1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아르마니는 1999년 중국 베이징 팔레스호텔에 450㎡ 규모의 매장을 열었다. 아르마니의 확장 정책은 계속됐고 미국 뉴욕에 가장 큰 매장인 아르마니 익스체인지(AX)를 오픈했고 라스베이거스에 조르지오 아르마니 매장 두 곳을 오픈했다. 일본 고베에 매장을 열었고 파리 생제르맹 대로에 대형 엠포리오 아르마니 매장을 오픈했다. 파리에서 가장 사랑받는 지역 중 하나인 드러그스토어(로레알과 카지노가 만든 미용 용품을 주로 판매하는 한국의 올리브영과 비슷한 콘셉트의 숍)가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이 결과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며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움직임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쥘리에트 그레코(프랑스 샹송 가수)는 “그들이 생제르맹을 파괴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엠포리오 매장은 짧은 시간에 사랑받는 명소가 됐고 아르마니는 생제르맹 대성당의 유리를 복원해 주기도 했다.
1998년 3월 파리에서 엠포리오 아르마니 패션쇼가 예정됐다. 아르마니는 프레타포르테(파리를 중심으로 뉴욕·밀라노·런던에서 열리는 기성복 패션 발표회) 조합의 창립자이자 메종 이브 생 로랑의 사장인 피에르 베르제를 만났다. 베르제는 아르마니 패션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르마니의 사업이 이브 생 로랑의 사업보다 더 번창할 때였다. 베르제는 패션쇼를 위해 파리에 온 아르마니를 열렬히 환영했다.
“파리의 생쉴피스 광장에 거대한 인공 구조물을 세울 수 있는 모든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안에서 패션쇼와 저녁 만찬을 준비하기로 했죠.” 행사를 진행한 아드리아나 물라사노가 말했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다하기 위해 파리에 20일간 체류했습니다. 매일 아침 경찰이 찾아와 일이 규정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검사했습니다. 모두 제대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패션쇼 당일 오후 2시 모델들이 이미 화장을 마쳤을 때 경찰서장이 찾아와 한 바퀴 돌아보더니 패션쇼를 열 수 없다고 하더군요. 17개의 비상구가 준비돼야 하는데 16개뿐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곧 비상구 하나를 더 만들겠다며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패션쇼는 저녁 9시니까 시간이 충분했거든요.”
프랑스 경찰, 패션쇼 막자 “불쾌했고 충격적”
하지만 당국은 부정적이었고 파리 경찰청은 구조물이 ‘1200명을 수용하기 위해 갖춰야 할 건축 규정과 관련해 중요한 결함이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마지막 순간에 패션쇼를 진행하지 못하게 막았다. 물라사노는 “아르마니는 그때 정말 대단했어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줬습니다. 문을 닫고 초청객들을 밖에 세워 둔 채 오직 같이 작업했던 스태프들이 참석한 가운데 패션쇼를 열기로 결정한 거예요. 관객 없이 패션쇼가 열렸어요. 그런데도 아르마니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아르마니는 자제력이 대단했고 심지어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패션쇼는 정상적으로 진행됐고 오로지 진행 스태프들만 볼 수 있었다. 조카 로베르타 아르마니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 같았어요. 직원들이 요란하게 박수갈채를 보냈고 자랑스러움과 슬픔의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렸어요. 파티는 야외에서 열렸어요.”
잡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아르마니의 얘기를 실었다. “불쾌했고 충격적이었습니다. 프랑스 당국이 이번 일을 처리한 방식은 내게 깊은 충격을 안겨 줬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경쟁은 언제나 있어 왔지만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습니다. 때론 어느 정도 인간적인 미덕을 보여 줘야 할 필요가 있죠.”
파리에 다시 돌아와 패션쇼를 하겠느냐는 질문에 아르마니는 “물론이죠. 난 전쟁을 좋아합니다. 매일같이 나는 그런 전쟁을 하고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돌아오겠다는 뜻이다. 금속 소재를 의상에 처음 사용한 전위적이고 미래파적 프랑스 디자이너 파코 라반은 이렇게 말했다. “무례한 행동입니다. 아르마니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그들(프랑스 경찰)은 패션의 중심지 파리를 죽인 겁니다.”
칼 라거펠트 “혐오스러운 국수주의 부끄럽다”
샤넬의 부흥을 이끈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드 역시 이렇게 말했다. “아르마니에게 위로의 말을 표하고 싶습니다. 난 경찰의 결정과 프랑스의 그 혐오스러운 국수주의가 부끄럽습니다.” 피에르 베르제도 “아르마니는 훌륭한 디자이너입니다.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어요”라고 말했다.
패션쇼를 끝내고 리츠호텔에서 인상적인 인터뷰가 있었다. 아르마니는 항의하지 않았고 불만이나 환멸적인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 경험 이후 나는 엠포리오 아르마니 컬렉션을 보여 줄 기회를 찾지 못했고 패션 주간에 뉴욕으로 가져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어떤 문제도 없이 나를 즉각 환영해 줬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 엠포리오 매장 12곳, 조르지오 아르마니 부티크 9곳, 백화점 26코너를 오픈해 적어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아르마니에 고용돼 일하고 있었다.
아르마니의 얘기다. “우리가 섹시하다고 말할 때 굉장한 오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섹시하다는 의미를 몸을 드러낸다거나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나는 섹시가 그와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남성용 재킷 아래로 가슴을 약간 내보이는 여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말하는 섹스어필은 보다 천박하고 보다 식상한 것입니다. 반면 가슴을 보이는 것은 섹시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제스처일 뿐입니다. 다리를 포갠다거나 옷깃을 올린다거나 팔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통속적이고 식상하고 노골적이고 너무 단순하고 너무 명확하고 너무 쉬운 것을 피합니다. 반대로 나는 고객에게 보다 섬세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제시하는 옷을 입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게 하고 싶습니다.”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참고 문헌 : ‘아르마니 패션제국(레타나 몰로 저, 이승수 역, 문학수첩 간)’
사진 자료 : 아르마니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