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조정 vs 본격 조정”…암초투성이 하반기 시장 [왜 느닷없이 R인가]

[커버스토리]


#. A 씨는 지난 6일 새벽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최근 들어 이만한 하락장을 보지 못한 그는 이번 증시 하락을 바겐세일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3년 만기 적금을 깨고 그간 눈여겨본 주식에 몰빵했다. 엔비디아, 애플, 테슬라, 알파벳…. 하나둘 담다 보니 어느덧 서학개미가 보유한 해외 인기주식 톱10을 모두 담았다. 뿌듯함도 잠시, 파란창이 화면을 장악했다. 그는 잠깐의 조정이겠거니 생각했다.

최근 대폭락장에 증시로 입성하는 개인투자자들이 크게 늘었다. “공포에 사고 탐욕에 팔라”는 증시 격언에 따라 폭락장에 매수에 나선 이들이다. 하지만 증시 격언 중에는 “떨어지는 칼날을 잡지 말라”는 말도 있다. 만에 하나 본격적인 조정장이라면 투자 손실 폭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다. 한경비즈니스는 투자전략 애널리스트 10인에게 현재 증시 상황을 긴급 점검했다. 지금 증시는 어느 국면에 있는가. 빚투족 등장, 바겐세일이라고?‘블랙먼데이’ 이후 투자자들의 성향은 반으로 엇갈렸다. 공포에 내던지거나 유보하는 이들, 반대로 폭락장에 뛰어든 이들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투자자예탁금은 8월 6일 58조9618억원으로 전주(2일 53조8679억원)보다 5조원 넘게 늘었다. 지난 5일에는 59조4896억원까지 급증했다. 투자자예탁금이 59조원대를 기록한 건 지난 4월 1일 이후 처음이다.

투자자예탁금은 투자자가 주식을 사려고 증권사 계좌에 맡겨 놓은 돈으로 증시 대기성 자금에 해당한다. 수시로 입출금이 가능한 CMA와 함께 증시 자금 유입의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 주식 투자 열기를 나타내는 지표로 지난 ‘1차 동학개미운동’이 한창이었던 2021년에는 월평균 투자자예탁금이 60조원대에 달했다.

빚을 내 주식시장에 뛰어드는 ‘빚투족’도 등장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8월 5일 마이너스통장 잔액은 38조6800억원으로 주식시장 대폭락 전인 지난 1일보다 5523억원 늘었다.

같은 기간 5대 시중은행의 신용대출 잔액은 92조7484억원으로 4584억원 증가했다. 지난 2일과 5일 이틀간 마이너스통장과 신용대출 잔액이 총 1조107억원 증가한 것이다. 특히 ‘블랙먼데이’였던 지난 5일 마이너스통장 잔액은 하루 만에 4932억원, 신용대출 잔액은 4106억원 늘었다. 건전한 조정 vs 본격 조정거침없이 몰아친 패닉셀(공포 투매)은 진정 국면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시장은 불안하다.

미국의 경기후퇴(리세션) 논란과 금리인하,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움직임, 인공지능(AI) 거품론, 미국 대선 등 증시를 둘러싼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국내 증권사 투자전략 애널리스트 10인은 현재 세계 증시를 장악한 ‘R의 위기’가 다소 과장됐다는 데 뜻을 모았다. 하지만 지금이 ‘바닥’이냐는 질문에는 의견이 엇갈렸다.


이은택 KB증권 애널리스트는 “아직 하락장이라고 볼 단서는 많지 않다”며 “미국 중앙은행(Fed)이 역할을 다 한다면 반등이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다만 반등 그 이상의 랠리를 위해선 실업률 하락 등 경기회복 시그널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노동길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건전한 조정으로 보이지만 정책 대응에 따라 다를 것”이라며 “Fed의 통화정책 대응이 적시에 나온다면 건전한 조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지영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도 “고용시장의 구조적인 변화, 여타 지표들은 침체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미국의 경기침체 시나리오는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최근의 주가 급락도 합리적인 매도보다는 투매에 가깝다고 판단한다”고 덧붙였다.

5일 기준 코스피지수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87배까지 떨어졌다는 점도 바닥론에 힘을 싣는다. 금융위기 당시인 0.82배(코스피지수 2250)에 근접한 만큼 다시 대폭락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유명간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PBR로 보면 1차적인 바닥은 나왔다”며 “그러나 하반기 한국 기업의 펀더멘털이 좋지 못해 전고점을 회복할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말했다.

건전한 조정의 단계는 이미 지났고 본격 조정 국면에 돌입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재만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급격한 가격조정 이후 변동성 높은 횡보 국면으로 진입할 것”이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채금리의 급락이 멈춰야 지수는 본격적으로 반등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인의 애널리스트 분석에 따르면 향후 증시 향방을 결정할 핵심 변수는 8월에만 크게 세 가지다. Fed의 통화정책 기조를 가늠할 수 있는 잭슨홀 미팅(22~24일)의 결과와 AI 버블 붕괴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엔비디아 실적(28일), 미국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확정될 전당대회(19~22일) 등이다.

한지영 애널리스트는 “9월 FOMC에서 Fed가 금리인하에 돌입하기 전까지 고용, 인플레, 소비, 제조업 지표 등 주요 지표들은 1~2차례 더 확인해야 한다”면서도 “9월 FOMC 결과 이전에 이를 선제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8월 말 잭슨홀 미팅의 결과와 증시 급락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인 AI 버블 붕괴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엔비디아 실적의 중요성도 높게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잭슨홀 미팅의 결과와 9월의 금리 향방도 증시의 최대 변수다. 이은택 애널리스트는 “Fed 등 중앙은행과 시장의 소통이 실패할 경우 시장 흔들림이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11월 미 대선까지 박스권이 지속될 것이란 의견도 많았다. 김병연 애널리스트는 “급락 이후 회복세를 유지하겠으나 박스권 장세를 예상한다”며 “대선 이후 상승 추세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명간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 또한 “민주당의 전당대회로 자본시장의 시선이 옮겨붙을 것”이라면서도 “대선 전까지는 변동장세가 예상되므로 투자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미국 대선이 있는 9~10월의 시점에 한국의 성과가 좋지 못했다며 보수적 접근을 권고했다.

두 개의 전쟁도 확전 기로에 서 있다. 최근 러시아 공세에 밀리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에서 대규모 지상전 작전을 수행하면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렸고,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도 이란의 대규모 공격이 예상된다.

전쟁은 세계 증시와 경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다. 조병현 다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경기에 대한 우려와 정책에 대한 우려가 상존하는 구간인 만큼 반등 지속성이 불투명하다”며 “공격적 비중 확대보다 리스크 관리에 방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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