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망해도 3년은 간다…솟아날 구멍 '명품·제약·반도체'[유럽의 쇠퇴, 한국의 미래⑤]

명품, 여전히 유럽 주요 주가 지수 견인
제약, 2028년 매출 상위 기업 대부분이 유럽 기업
반도체, 구매자보다 우위 점하는 '슈퍼을' 존재

[커버스토리: 유럽의 쇠퇴, 한국의 미래]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과 아내 엘렌 메르시에. (사진=연합뉴스)
유럽의 경제지표는 뒷걸음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산업은 있다. 인플레이션(물가상승)에도 끄떡없는 명품, 미국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는 제약, 갑보다 더 강력한 ‘슈퍼을(乙)’이 버티는 반도체장비 등이 대표적이다. 엔비디아, SK하이닉스 그 이상으로 영향력이 강한 반도체 장비 기업들 모두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 반도체 위협하는 ‘명품’8월 11일 막을 내린 파리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화려한 올림픽으로 이름을 올렸다. 메달을 전달하는 쟁반과 메달 케이스는 ‘루이비통’이 만들고 메달 디자인은 ‘쇼메’가 했으며 프랑스 선수단의 단복은 ‘벨루티’가 담당했다. 세계 최대 명품 대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올림픽 후원을 결정한 결과다. 구체적인 후원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1억5000만 유로(약 2300억원)를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60개의 럭셔리 브랜드를 소유한 LVMH가 올림픽 후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LVMH는 지난해 862억 유로(약 125조원)의 매출을 달성하며 전년 대비 13% 성장률을 기록했다. 가방과 의류 판매만으로도 미국 IT 기업이자 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의 한 해 매출(609억 달러)보다 40조원 이상 더 벌었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2021년 유럽 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1위 부호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당시 아르노 회장의 자산은 LVMH의 주가 상승에 힘입어 1863억 달러(약 209조원)까지 증가하면서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1860억 달러)와 전기차 회사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1473억 달러)를 제치고 세계 최고 주식 부자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현재 아르노 회장의 재산 가치는 2000억 달러(265조원)에 달한다.

LVMH뿐만 아니다. 세계 3대 명품 그룹으로 꼽히는 케링그룹(구찌 모회사), 리치몬트그룹(까르띠에 모회사), 그리고 에르메스그룹, 샤넬그룹, 프라다그룹 등도 유럽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한 축이다.

특히 LVMH, 에르메스 인터내셔널, 케링 등은 프랑스 증시를 주도할 만큼 영향력이 크다. 올해 초 프랑스 CAC40 지수는 8000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CAC40은 프랑스의 주요 주가 지수로 명품 기업 주가가 상승을 견인했다. 지난해 블룸버그는 “명품이 황금기를 맞으며 프랑스가 새로운 주식시장의 승자가 됐다”고 보도했다. ◆ 미국 능가할 ‘제약’제약산업도 유럽의 영광이 남아 있는 분야다. 독일, 스위스, 벨기에 등은 ‘제약강국’으로도 불린다. 특히 독일은 글로벌 제약시장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국가다. 지난해 독일의 제약 매출은 598억 유로로 전년(565억 유로) 기록을 넘어섰다.

유럽 전체로 넓혀도 경쟁력은 높다. 유럽은 미국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로 큰 제약바이오 시장이며 한 해 매출은 2500억 유로(약 380조원)에 달한다. 오는 2030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6~8%로 전망된다.

전 세계 매출 상위 20개 제약바이오 회사 가운데 유럽 기업은 10개다. 로슈(스위스), 노바티스(스위스), 바이오엔텍(독일), 머크(독일), 노보노디스크(덴마크), 바이엘(독일), 사노피(프랑스), 글락소스미스클라인(영국), 아스트라제네카(스웨덴·영국), 앨러간(아일랜드) 등이다.

세계 10대 의약품 수출국 가운데 미국을 제외한 9개 국가는 유럽이다. 2022년 기준 독일(1위), 벨기에(2위), 스위스(3위), 미국(4위), 아일랜드(5위), 네덜란드(6위), 이탈리아(7위), 프랑스(8위), 스페인(9위), 영국(1위) 순이다.

이들은 정부 주도로 산업을 키우면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 스위스는 의료 부문 디지털화와 규제 개선에 나서고 있으며 독일은 신약개발을 지원하고 중소와 중견기업 육성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또 스웨덴은 보건의료 데이터를 전체 공개해 연구를 지원하고 있고 체코는 자국 내 의약품 생산 강화를 위해 제약기업 투자 인센티브 수혜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투자인센티브법을 개정했다.

전망도 긍정적이다. 정보 서비스업체 글로벌데이터에 따르면 2028년 글로벌 제약시장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유럽 기업의 매출이 미국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2023년 기준 매출 1, 2위 모두 화이자, 존슨앤드존슨(J&J) 등 미국 회사다. 그러나 5년 뒤 1위는 스위스의 로슈가 차지하고 2위는 프랑스의 사노피가 될 것으로 보인다. 3위도 독일의 머크가 차지했다. 특히 로슈는 폐암치료제 티쎈트릭과 다발 경화증 약품 오크레부스를 앞세워 제약 시장 입지를 강화할 것으로 관측된다. 노보노디스크 역시 당뇨병 신약 ‘오젬픽’의 성공으로 빠르게 매출을 늘릴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 시장을 좌우하는 두 개의 ‘슈퍼을(乙)’블룸버그는 범유럽 주가지수인 유로스톡스600의 올해 수익률 절반 이상을 노보노디스크(제약)·LVMH(명품)·ASML(반도체) 등 3종목이 견인했다고 전했다.

반도체 산업은 슈퍼을이 존재하는 특수성이 있다. 기술력을 보유해 시장을 독점하거나 경쟁사는 많지만 기술 격차가 크다면 이례적으로 납품사가 구매자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유럽 출장길에 오르는 것 역시 이들을 만나기 위한 결정이다.

대표적인 슈퍼을 기업은 영국의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 업체 ‘ARM’이다. 자체 설계 라이선스를 여러 반도체 회사에 판매하는 것이 주요 사업이다.

ARM이 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미미하지만 특정 사업에서는 슈퍼을이다. 특히 스마트폰에 탑재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시장에서는 점유율 90%를 기록하고 있다. 태블릿용 AP 시장에서는 85%를 점유하고 있다. 고객사로는 삼성전자·애플·퀄컴·구글·엔비디아 등이 있다.

ARM의 영업이익률은 30%에 육박한다. 2023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영업이익률은 29%를 기록했으며 회사는 장기적으로 이 수치가 60%까지 치솟을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제조 장비 회사 ASML 역시 유명한 슈퍼을이다. ASML은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웨이퍼에 회로를 프린팅하는 기계)를 만드는 회사로 반도체장비 시장 2위(점유율 18.1%)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반도체장비 시장에서는 2위지만 노광장비 부문에서는 점유율 90% 이상을 독점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TSMC 등이 뛰어든 미세화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ASML 장비는 필수다.

심지어 생산 물량도 적다. 장비 가격은 대당 2000억원을 넘지만 연간 생산 가능 물량은 40대 수준에 그친다. 미세화 공정에 필수지만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하지 못해 ASML은 반도체 기업 중에서도 영향력이 가장 큰 슈퍼을로 꼽힌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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