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육체는 확실히 서양인들의 평균적인 육체에 비겨 비례감이 떨어진다. 샤론스톤같은 여인들의 육체는 한국의 남자들을 주눅들게 하는 무엇이 있다. 물론 슈워츠제네거 같은 육체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소녀경은 남성의 길고 짧음이 즐거움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못박고 있지만 길고 짧은 것에 대해 인간이 특별한 감정을 갖고있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뉴욕의 뒷골목에서는 오늘도 60센티가 넘는 남근을 실연으로 보여주는 쇼가 공연되고 있다.누드의 감상자가 작품의 성적인 능력에 관심을 두고 접근한다면 그는 감상자로서는 이미 실패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인간의 성적인능력이 육체의 외형적 조건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아직 덜성숙된 그래서 경험이 적은 자들이 갖는 근거없는 열등감에 지나지않는다.어떤 육체든지 스스로의 당당함이 있고 그만큼의 굴욕감도 있다.이것이 누드를 감상하는 기초다.작가 김문회의 잃어버린 시간 시리즈는 공평아트센터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고개를 뒤로 돌린채 한쪽다리를의자에 올려놓고 앉아 있는 여인이다. 묘한 포즈다. 놀라운 것은그러나 살이 주는 풍만함이다. 자세는 굴곡져 있지만 당당함이 배어 난다.화면의 절반은 아예 비워두고 나머지 절반을 채운 여체는 흑백의톤만으로도 일하는 여성 그래서 현실에서의 여성을 드러내고 있다.살진 엉덩이, 주름 잡힌 복부, 큰 손발이 모두 생활인으로서의 여체를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일하는 여성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왜 잃어버린 시간이었을까하는 화두가 맴돌지만 어깨선이 당당히흐르는 이 강건한 여체의 아름다움은 공평동 누드전의 백미였다.또하나 김화백의 「컴플렉스 우먼」은 누드화에 대한 일종의 도전처럼 보였다. 직업여성을 그린 것일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채 오직 빨간 구두만을 신고 두발을 어깨 넓이로 벌린채 정면을 향해 당돌하게 서있다. 작가는 이 그림 역시 연필로만 그려놓고 있다. 염소 수염같은 음모가 아래로 뾰족히 나와있다. 작가는 왜 흑백의 화면에 빨간 구두와 까만 음모만을 부각시켰을까.도대체 왜 벌거벗은 채 저리도 당당한 것인가하는 질문이 그의 그림을 맴돌고 있다. 누드의 전통적인 수법은 적당한 정면과 절반의뒤틀림이다. 왜 그는 이같은 룰을 철저히 무시하고 당돌하게 서서감상자를 비웃고 있는 여인을 그렸을까하는 질문이 공평동 감상자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