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기업체의 C사장(58). 그의 몸은 본사 집무실에 있지만 마음은 자나 깨나 해외로 향해 있다. 최근 몇 년간 매출이 꾸준한 신장세를 보여 톡톡히 한몫을 챙겼다. 매출호조로 벌어들인 돈에다 해외의 값싼 자금도 여러차례 들여왔다. 해외 자본시장에서 CB(전환사채)나 DR(주식예탁증서)를 발행해 장기안정적인 자금을 조달한것이다. 자연히 옛날만큼 은행에 손벌릴 일도 적어졌다.C사장 뿐만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맞이하고 있는상황이다. 그래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기업자금이 남아돈다는 말이나오고 있다. 기업체 자금담당 상무가 회사로 출근도 않은채 곧장은행으로 달려가 제발 돈 좀 빌려달라고 하소연하던 시절이 바로엊그제였는데 이것도 이제 옛말이 되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가만히앉아서 기업들을 상대로 큰소리 쳐가면서 장사하던 은행들이 대출세일이니 뭐니 하면서 두발벗고 나섰겠는가.이처럼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한결 나아진 원인에 대해 당사자인 기업들은 과연 어떤 진단을 내리고 있는지를 보면 퍽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대한상의에서 일반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결과 지난 1/4분기중에는 자금사정 호전의 주요인으로 은행차입여건 호전(복수응답 35.3%)과 신규자금수요 감소(29.4%)등이 지목됐다. 반면 2분기에는 매출증가(53.4%)를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했다.기업들이 장사를 잘해 자금사정이 풍부해진데다 주식이나 채권을발행하거나 값싼 해외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이 넓어지면서 더욱자금여력이 높아진 것으로 지적된다.지난해 우리 기업들이 금융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의 규모는 94년의89조원보다 12.5% 늘어난 1백조2천억원. 증가율 자체로는 설비자금수요가 둔화됨에 따라 한해전의 37%보다 크게 낮아졌다.자금조달 경로별로는 투자자들이 은행에 맡긴 돈을 빌려 쓰는 간접금융 비중이 크게 낮아진 반면 기업이 투자자들에게 직접 주식이나채권을 팔아 자금을 조달하는 직접금융과 해외차입의 비중이 높아졌다. 지난해 직접금융 조달규모는 51조1천억원으로 전체 조달자금의 51%를 차지한 반면 간접금융은 31조9천억원으로 31.8%에 그쳤다.더군다나 주식 채권등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규모는 5대그룹이 지난해 9조2백46억원으로 94년의 7조7백30억원에 비해 무려 27.6%나 늘어났고 10대그룹도 18.4%나 증가했다. 이처럼 기업들의 직접금융비중이 높아진 것은 규제완화로 인해 그동안 일일이 물량조정을 했던 유상증자나 회사채 발행요건이 상당부분 자율화됐기 때문으로해석된다.해외자금 역시 무역신용도입이나 장단기 차입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해외CB(전환사채)등 해외증권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도 93년엔 15건 9억달러였던 것이 94년에는 34건 18억천만달러로 급증한데 이어 작년엔 52건 22억7천만달러로 늘어났다. 기업들은 이들 자금으로 C사장처럼 꾸준한 해외투자에 주력하고 있다는얘기다.◆ 값싼 해외자금 차입도 늘어대기업들은 또 금리의 하향안정세가 이어짐에 따라 만기가 길게 남아 있는 대출금을 서둘러 갚으려 하고 있다. 값싼 자금을 빌려 쓸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옛날에 고금리로 빌린 자금을 고수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판단이다.그럼에도 우리기업들 모두가 자금수영장에서 여유있게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은 넉넉한 반면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자금난에허덕이는 이른바 「자금양극화」 현상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중견 중소기업들은 한결 낫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은 자금을골라가며 쓰지만 수많은 기업들이 불리한 이자로 투금사나 신용금고에 매달리거나 심지어는 사채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나마 금융실명제 이전에는 사채이자가 2부(연24%)정도였지만 지금은 사채자금의 운신폭이 좁아져 영세기업의 경우엔 4부나 5부(연60%)이자를 쓰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어느 기업체 사장의 설명이다.자동화부품을 만드는 중견기업의 K사장은 『지금은 은행자금을연10.5%나 연11.5%에 쓴다』면서도 『작년만해도 연14%짜리를 쓴적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중견기업이 이 정도면 여타 영세 소기업들의 경우는 불을 보듯 뻔한 실정이다.★ 미니 인터뷰 / 엄기웅 대한상의 경제연구센터 이사▶ 우리 기업들은 그동안 만성적인 자금난에 시달려 왔는데 최근엔 대기업을 중심으로 오히려 자금이 남아돈다는 얘기가 많다. 그 원인부터 궁금한데.무엇보다 최근 3년간 국내 대기업들이 호황을 누렸다는 점을 들 수있다. 그래서 자금여력이 크게 개선됐다고 본다. 또 중소기업들도그동안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자금이나 성장면에서 한계를 보인 기업들이 도산해 돈을 쓰려는 자금수요의 압력이 낮아졌다. 그 결과금융기관들도 수신은 늘어나는데 운용할 곳은 적어져 대출세일에나설 만큼 시중의 유동성이 풍부해지게 된 것이다.▶ 기업들의 자금조달 패턴은 어떠한 변화를 보이고 있나.옛날에는 은행대출이나 사채시장에 의존하는 경향이었지만 지금은주식이나 채권을 발행하거나 해외에서 값싼 자금을 들여오는 추세에 있다. 지난 94년만 해도 기업들이 금융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중은행을 통한 간접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이 44.5%를 차지한 반면 증시를 통한 직접금융 비중은 38.1%에 그쳤다. 그러던 것이 작년에는간접금융쪽은 31.8%로 줄어들고 직접금융 비중은 51%로 늘어나 직접금융을 통한 조달자금이 간접금융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또 해외차입 비중도 94년의 4.9%(4조4천억원)에서 작년엔 5.6%(5조7천억원)로 높아졌다.▶ 실세금리가 내리고 시중 유동성이 나아지면서 중소기업들도 영향을받을텐데.그동안 중소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사채를 많이 쓰는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조달자금중에서 사채비중이 줄어들고 은행대출등간접금융을 통한 제도권금융 비중이 높아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자금여유를 보이는 기업들은 최근의 저금리시대를 맞아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과거에는 기업경영의 패턴이 「고비용 고수익」 중심이었다. 그런시절에는 기업들이 부동산투자에 눈을 돌려 높은 수익률을 내고 이를 담보삼아 은행대출을 받곤 했다. 모 건설회사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최근 부도를 내고 말았다. 그만큼 경영환경이 「저비용 저수익」 쪽으로 가고 있다는 얘기다. 오는 21세기에는 이러한 양상이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저비용 저수익시대를 맞아 일반개인의 소비패턴도 바뀌어야 하겠지만 기업들의 경영방식도 변해야 한다. 특히저비용시대에 걸맞는 조직으로 개편하고 장기적인 영업전략을 수정하는 방향으로 경영혁신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기존의 공급자시장(Seller’s market)에서 수요자시장(Buyer’s market)으로 탈바꿈하는 시장상황에 재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도 70년대에그랬었다.▶ 기업의 입장에서 금융계나 정부가 개선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금융기관들은 무엇보다 고객만족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본다. 어차피 이제는 앉아서 영업하던 시대가 아닌 만큼 서비스 개선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몫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업무영역이 나눠져 있는 것은 고객(기업등)의 입장에선 바람직하지않다. 영역제한을 풀어 공정한 경쟁을 통한 효율성 제고를 기해야할 시점이다. 또한 통화채를 매개로 한 통화관리체계도 개선돼야한다는 생각이다. 통화채를 발행해 자금수위를 낮추려 하면 1년뒤에는 통화채이자 만큼이나 통화팽창 요인이 발생한다. 비생산적인방식이 아닐 수 없다. 대신에 장기국공채나 해외투자를 늘려 자금이 실물쪽으로 흐르게 하는 생산적인 통화정책을 펴나가야 할 것이다. 이미 자본수지 흑자를 통화채로 조절하기엔 한계를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