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문화와 비즈니스의 합작품이다. 동시에 작품과 상품의 절묘한 조화이다. 패션은 문화와 사업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에단순히 한 나라의 패션산업 규모가 크다고 해서 그 나라를 패션선진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패션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세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우선 세계 고급 패션의 유행을 선도하는 위치에서 있어야 한다. 자기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도보유해야 한다. 또 세계적인 규모의 의류업체의 존재도 필요하다.세계를 대상으로 활약하는 패션 디자이너는 고국을 떠나 다른 국가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나라의 GNP(국민총생산)를 올리고 있다 하더라도 애국자다. 그 이름과 작품이 이미 고국의 분위기를 풍기며 그나라의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패션의 가치는 돈 이상이며 세계적인 디자이너는 한 나라의 바꿀수 없는 자산이다.◆ 프랑스 - 예술적인 세계최대 컬렉션프랑스의 수도 파리. 세계 패션의 중심지다. 유행을 창조하고 선도하는 도시다. 파리 컬렉션은 파리의상조합 산하의 행사로 79년부터1년에 두 번씩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열리고 있다. 파리 컬렉션은 랑방, 지방시, 장 폴 고티에, 존 갈리아노, 파코라반 등 수십명의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세계 각국의 기자, 바이어들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컬렉션이다. 밀라노 컬렉션이판매에 치중하는데 비해 파리는 예술적이고 전위적인 경향이 강하다. 외국 디자이너에게도 개방적이어서 프랑스 출신의 디자이너 외에 영국 스페인 일본 한국 등 다양한 국가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하고 있다.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는 장 폴 고티에를 꼽을 수 있다. 고티에는 52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으며 18세 때 피에르 카르댕에 채용돼 1년간 근무한 후 디자이너인 장 파투 밑에서 일하며경력을 쌓았다. 76년에 장 폴 고티에라는 이름으로 컬렉션을 발표,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아방가르드와 전통주의가 융합된 독특한 작품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프랑스 패션을 얘기할 때 이브 생 로랑을 제외할 수 없다. 「현대의상의 아버지」 「프랑스 패션의 제왕」 「모드의 제왕」 등으로불리는 이브 생 로랑은 36년 알제리에서 출생했다. 17세 때 국제양모사무국이 주최하는 디자인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수상, 세계패션무대에 등장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메종에 들어가 몇 년간일하다가 재능을 인정받아 디오르가 사망한 후 21세의 나이에 디오르의 후계자로 임명된다. 디오르 메종에서 몇 년간 활동하며 무릎길이의 폭이 매우 좁은 스커트와 거리 패션 감각의 스타일을 발표했으나 디오르의 엘레강스와 어울리지 않는다 해서 불평을 듣고 사실상 디오르에서 제적당한다. 62년 이브 생 로랑이라는 이름으로메종을 개설,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65년에 대퇴부까지 올라가는 롱부츠와 사파리 룩으로 호평을 받고 70년대에는 러시아 코사크 민족 의상에서 힌트를 얻은 스타일을 발표, 모드계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브 생 로랑은 비즈니스에도 성공, 「YSL그룹」을 탄생시켰다. YSL그룹은 전세계에 2백여개가 넘는 부띠끄를 보유하고 있으며 연간 4천5백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며 전세계 1백대 패션기업 중 19위를 차지하고 있다.크리스티앙 라크로와도 현대 프랑스 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의한 사람이다. 라크로와는 51년에 프랑스 아를르에서 출생, 72년에소르본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에르메스사에서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81년 장 파투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됐다.87년에 자신의 이름으로 독립했으며 독특한 색채와 밝고 화려한 이미지로 오뚜꾸뒤르(맞춤복)의 인상파라고 절찬받고 있다.◆ 이탈리아 - 기성복 중심, 실용성 강해이탈리아는 원래 패션강국은 아니었다. 프랑스와 미국 등 패션선진국의 하청을 받아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수출을 하던 국가였다.이탈리아가 패션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때는 70년대부터다. 섬유도시인 밀라노를 고급 기성복의 중심지로 부각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세계 패션시장의 중앙에 등장했다. 세계 4대 컬렉션의 하나인밀라노 컬렉션도 78년부터 시작됐다. 이탈리아 패션협회에서 주관하는 밀라노 컬렉션은 조지오 아르마니, 지아니 베르사체, 로메오질리, 장 프랑코 페레 등 이탈리아를 세계의 패션 중심지로 끌어올린 수많은 이탈리아 출신 패션 디자이너들이 참여하고 있다.올 봄 밀라노 컬렉션은 3월 2일부터 1주일간 열렸으며 이 기간동안에 80번의 패션쇼와 1백여개의 프리젠테이션이 있었다. 그러나 밀라노 컬렉션에도 문제점은 있다.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되는 문제점이 폐쇄성이다. 밀라노 컬렉션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들은 독일 출신의 질 샌더와 한국의 김영주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들이다. 질 샌더도 독일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40년 이상 밀라노를 근거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이탈리아적인 디자이너로 분류할 수 있다. 밀라노 컬렉션의 폐쇄성은 집안 잔치와 같은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젊은 디자이너를 영입하는데도 소심해서 컬렉션 분위기가 점점 정체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런 폐쇄성으로 인해 영국 출신의 캐서린 햄넷은 런던 컬렉션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으며 베르수스도 무대를 뉴욕 컬렉션으로 바꿨다.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라노 컬렉션은 최근설립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밀라노 패션계는 패션의 중심지가 부동의 패션 왕국으로 군림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로부터 점차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들떠있다. 실제로 밀라노 컬렉션은파리 컬렉션보다는 조용하지만 실속은 더 챙긴다는 평을 듣는다.이 때문에 밀라노 컬렉션은 지나치게 판매에 열중해서 파리에 비해독창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듣는다. 그러나 최근엔 프라다, 돌체앤드 가바나, 구치 등이 패션 흐름을 유도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계속 발표하고 있고 많은 디자이너들이 실용적인 새 브랜드를 선보이고 있어 활기를 더하고 있다.오늘날의 이탈리아를 패션대국으로 만들게 한 일등 공신은 현재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들이다. 지아니 베르사체, 조지오 아르마니, 올레그 카시니 등. 지아니 베르사체는46년에 이탈리아 남부에서 태어났으며 의상실을 경영하던 어머니밑에서 디자인에 대한 실질적인 업무를 배웠다. 66년에 20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제니, 캘러한 등 여러 디자이너밑에서 경력을 쌓았다. 78년에 독립, 베르사체 브랜드를 시작했으며 이 때 밀라노 컬렉션에도 첫 선을 보였다. 81년에는 지아니 베르사체 회사를 설립했다. 지아니 베르사체는 세계에 1백23개의 부띠끄와 3백20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간 매출액은 6천억원규모다. 베르사체의 미는 독기와 과장성에 있으며 보편성에서 일탈해 스릴이 느껴질 정도로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미래적인 첨단 기술과 천연소재를 교묘하게 다루어 여성미를표현하는게 특징이다. 베르사체가 지향하는 디자인의 근본 철학은「지성」이다.조지오 아르마니의 이름도 이탈리아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다. 조지오 아르마니는 35년생이며 밀라노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우연히 이탈리아의 리나생떼 백화점에서 신사복에 관련된 일을 한 인연으로 패션계에 입문했으며 75년 48세의 나이에 독립된 디자이너로 회사를 설립했다. 「과장이나 허례가 일체 배제된 숨막히는 천재의 묘기」「여성 실루엣의 근본적인 혁명」 「재킷의 제왕」 등의 찬사를 받으며 이탈리아 패션의 자존심으로 올라섰다. 현재 전세계 26개국에 1백51개의 부띠끄를 소유하고 있으며 연간 5천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다. 조지오 아르마니는 평소 「전세계 사람들의 3%만 내 옷을 이해해 주면 된다」는 신념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다. 아르마니의 의류는 크게 조지오 아르마니와엠포리오 아르마니로 대별된다. 최근에는 합리적인 가격과 고품질을 내세운 아르마니 익스체인지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다. 조지오 아르마니는 「사람들이 패션의 희생이 되지 않도록옷을 통해 스타일을 세련되게 만들고자 한다」는 패션 철학에 따라인체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가벼운 옷을 만드는데 주력한다. 이 신념에 따라 심지나 패드가 없는 옷을 생산하고 있으며 소재도 주로자연소재를 이용한다.◆ 미국 - 도시풍. 편리함이 특색뉴욕 컬렉션은 세계 4대 컬렉션의 하나로 지안 프랑코 페레, 요지야마모토, 지아니 베르사체 등이 참여하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많이 참석하기로 유명하며 이 때문에 뉴욕 컬렉션에 대한 기사는 어느 디자이너가 무엇을 발표했다는 내용보다 어느 스타가 관람하러 와서 무슨 옷을 주문했느냐가 더 많은 비중으로 채워진다. 이에 반해 생겨난 컬렉션이 뉴욕 프리미에르며 기성복 위주로 진행된다.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디자이너는 단연 도나 카란이다. 48년미국 뉴욕에서 출생했으며 파슨즈 디자인 학교를 졸업한 후 앤 클라인사에 입사했다. 84년에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 단순하고 세련된 도시풍 정장으로 인기를 끌었다. 현재 일본 커리어우먼들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다. 도나 카란의 지난해 매출액은 4천억원이었다. 도나 카란은 가장 미국적이면서 현대적인 비즈니스 우먼을 위한 도시 정장이라는게 특징이다. 도나 카란보다 좀더 저렴하고 대중적인 DKNY 브랜드도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도나카란은 광고전략에서도 파격적이다. 현대 여성은 섹시함과 지성을모두 원한다. 도나 카란의 광고는 이 점을 파고든다. 아름답고 늘씬하고 관능적인 여성인데 사회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서류가방을 들고 자가용 비행기에서 내리는 여성의 모습과 남자들과 토론하는 장면, 화려해 보이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쉬는 모습 등은 여성들의 호응을 받기에 충분했다.도나 카란이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디자이너라면 남자 대부로는 폴로 랄프로렌을 들 수 있다. 영국의 전통에 바탕을 둔 트러디셔널한스타일을 미국에 도입, 평범하고 보편적인 미를 창조한 디자이너다. 39년에 미국 뉴욕에서 출생했으며 뉴욕 시립대를 졸업한 후68년 남성 의류 전문회사 폴로 패션을 설립했다. 71년부터 여성 컬렉션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골프웨어와 향수 등으로 사업을 넓히고 있다. 미국에 56개의 매장을 비롯, 유럽과 아시아에 1백45개의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86년에 파리에 매장을 오픈한 최초의 미국디자이너로 찬탄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연간 매출액은 3조2천억원(40억달러)에 달한다. 「스타일은 패션이 아니다」라는 광고에서 나타나듯 실용적이면서도 전형적인 영국풍을 추구한다. 인간의회귀본능을 만족시켜주는 안식처로 돌아온 듯 편안함과 우아함으로소비자의 구매의욕을 자극하며 오래된 것에 가치를 부여, 상품화하는 것이 디자인 철학이다.◆ 영국 - 독창적. 실험적 데뷔무대영국 패션하면 떠오르는 브랜드는 버버리 닥스 아쿠아스큐텀 등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스타일의 영국 브랜드는 전세계 상류층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영국의 런던 컬렉션은 파리밀라노 뉴욕 도쿄에 이어 5대 컬렉션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지난 몇년간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파리와 밀라노에 밀려 바이어와 언론의 외면을 받아왔던 것. 93년부터 세계적인 헤어 디자이너인 비달 사순이 런던 컬렉션이 열리는 패션주간에 자금지원을하는 등 회생시키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런던 컬렉션이 최근 조금씩 활기를 찾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전위적인 젊은디자이너의 출현에 있다. 런던 컬렉션은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이너의 데뷔무대로 각광받으며 신인 디자이너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파리와 밀라노가 기성 디자이너의 무대라면 런던은 젊고 실험적인 신인 디자이너의 컬렉션이다. 최근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캐서린 햄넷의 런던 컬렉션 복귀 선언도 런던 패션가에 고무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국 출신으로 밀라노 컬렉션멤버로 활약해온 햄넷은 고향에서 자신의 컬렉션을 발표하고 활동하기로 결정했다.영국 출신 디자이너로는 캐서린 햄넷과 존 갈리아노를 꼽을 수 있다. 캐서린 햄넷은 48년에 영국에서 출생했으며 센트머천스 예술학교에서 디자인의 기초를 배운 후 75년에 캐서린 햄넷사를 설립했다. 바랜 듯한 느낌의 거친 소재를 이용한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해졌으며 「패션은 게임이다. 일부 패션 엘리트를 위한 옷은 만들지 않는다」고 공언하고 있다.존 갈리아노(36)는 지브롤터 태생이지만 6세때부터 영국에서 자랐다. 캐서린 햄넷과 마찬가지로 센트머천스 예술학교 출신이다. 학교 졸업 작품인 「아프가니스탄과 유럽의 이상」이 런던의 유명한부띠끄 인 브라운즈 쇼 윈도에 장식되면서 유명해졌다. 데뷔 당시에는 「거꾸로 된 옷」등 형식을 파괴한 과격한 옷을 많이 발표해화제를 일으켰으나 최근에는 엘레강스 스타일의 옷도 선보이고 있다.◆ 일본 - 동양과 서양의 만남일본에서 패션 비즈니스가 본격화한 것은 60년대에 들어와서다. 이때가 돼서야 패션의 주류가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바뀌었다. 특히68년에서 70년은 부인복의 기성복화가 눈에 띄게 신장됐다. 70년대에 들어 경제가 고도성장의 무드를 타면서 국민의 의식도 「양에서질」로 전환이 이뤄졌다. 그 결과 패션에서 브랜드가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특히 미국과 유럽의 유명 브랜드와의 제휴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 시기에 라이선스브랜드도 급증했다. 질로의 변화는 다양화를 촉진시켜 각 패션업체는 여러 가지 브랜드를 동시에 전개하는 다브랜드 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80년대가 되자 국민의 의식은다시 「질에서 감성으로」 변화, 패션 다양화는 더욱 가속화됐다.이에 발맞춰 개성적인 디자인으로 어필하는 디자이너 캐릭터브랜드가 급성장했다. 이른바 감성소비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성장한 패션업계는 90년 들어 버블경제가 꺼지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자신의 가치관을 중시하는 개인의 시대로 바뀌면서 일본 패션업계에도 변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일본은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와 함께 4대 패션강국으로 꼽힌다. 일본이 패션대국으로 성장한데는 일본 정부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일본 정부는 이미 70년대부터 다케다 겐조와 하나에 모리와 같은젊은 디자이너를 프랑스에 입성시키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케다 겐조와 하나에 모리는 당시에 서구 패션계에서는 찾아볼 수없었던 일본적인 분위기로 파리 패션계에 정면 도전했다. 겐조와모리의 뒤를 이어 이세이 미야키와 요지 야마모토, 가와쿠보 레이등이 등장, 일본 패션을 호기심의 대상에서 세계 패션을 리드하는선도적인 위치로 격상시켰다.70년대 초부터 계속 파리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겐조는 이제일본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됐다. 겐조의 모드는 파리 패션계에 많은 충격을 안겨 줬으며 파리 컬렉션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겐조는 색의 사용이나 소재 선택에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지향하고 있으며 성인 중심의 서양문화에 새바람을 불어 넣었다.81년에 파리 컬렉션에 데뷔한 요지 야마모토는 먹색 천을 대담하게재단한 일본적이면서도 서구적인 감각이 공존하는 의상을 발표, 파리 패션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세이 미야키는 패션디자인의 차원을 넘어선 전방위적인 예술활동으로 서양 문화계에 신선한 감동을주고 있다. 78년에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제목의 독창적인작품집을 출간, 패션디자이너인 동시에 조각가이고 무대미술가이며공연 연출가인 다면적인 재능을 보여줬다. 최근 그에게 큰 성공을가져다 준 플리츠 작업은 그의 관심이 유행과 상관없는 보편타당한패션의 창조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최첨단 섬유공학의 도움을 받아 개발된 플리츠는 날아갈 듯 가볍고 우아한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을 지탱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우주적인 감각을 연상시키는옷이다. 이세이 미야키가 첨단 신소재로 만든 드레스는 실용적인동시에 매우 편한 옷이다.파리에서 활동중인 또 한 명의 일본 디자이너로 진 아베를 들 수있다. 진 아베는 일본에서 미술과 패션을 공부한 뒤 파리에 유학갔으며 웅가로 메종에서 일한 적이 있다. 눈이 많이 내려 스키가 생활화된 북일본 출신답게 활동하기 편리한 소재와 스타일을 추구한다. 천연섬유를 즐겨 쓰며 존재의 자유로움과 자연스런 우아함을좋아한다.일본 문화복장학원을 졸업한 뒤 78년에 파리에서 데뷔 컬렉션을 가진 준코 고시니는 가장 파리적인 일본 디자이너로 인식되고 있다.기품있는 소재를 사용, 서구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을 발표하고 있으며 일본 문학의 근원적인 범주인 신 인간 원 네모 등에대한 사상을 디자인에 기본으로 깔고 있다.이외에 파리에서 활동하는 일본 디자이너로는 준 아시다, 가와쿠보레이, 아츠로 타야마, 이치로 기미지마, 코비 니호마츠 등이 있다.70년대부터 세계 패션의 심장부로 젊은 디자이너 부대를 내보낸 일본 정부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