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서울 태평로 삼성전자 대회의실.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이같이 말했다. 『반도체 경기침체를 운운하는 것은 패자들의 이야기다. 삼성은 승자다. 승자가 왜 패자의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우리에겐 승자의 논리가 있을 뿐이다.』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8월 현재 유감스럽게도 김부회장의 자신에찬 목소리는 허망한 메아리로 돌아오고 있다. 지난해 단일품목으로한국 수출의 18%를 차지,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던 대들보로서의자리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오히려 올해 수출부진의 주범으로 눈총을 받고 있는 처지로 전락했다. 삼성전자 현대전자 LG반도체 등 반도체3사의 욱일승천하던 기세가꺾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도 그럴것이 올 상반기 매출실적은차라리 애처롭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삼성은 반도체부문의 매출실적을 따로 발표하지 않았지만 상반기에 반도체부문에서만 3천억원정도의 이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이는 지난해 1조원(추정)보다 70%나 줄어든 액수다. 현대전자나LG반도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현대는 1천7백60억원, LG는 1천7백억원으로 각각 55%와 60%씩 이익이 축소됐다.반도체 산업이 이처럼 급속도로 위축된 것은 반도체 가격하락 때문이다. 올초부터 반도체 값은 거의 수직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작년말 개당 50달러씩 하던 것이 지난 6월 14달러로 주저앉았다. 불과6개월만에 판매가격이 3분의 1수준으로 밀린 것이다. 이익이 절반이상 줄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이정도 이익을 낸 것도가격이 개당 35달러선으로 비교적 높았던 지난 1/4분기의 매출을포함했기 때문이다. 개당 14달러선에서 시작한 올하반기에는 『적자나 면하면 다행』 (반도체 산업협회 관계자)인 셈이다.사실 『올해 가격이 떨어질 것이란 건 어느정도 예측됐던 일』(삼성전자 L이사)이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세계 1위업체인 삼성전자도 올 연말까지 개당 가격이 25달러선으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었다. 세계 반도체 업계가 너나할 것없이 16메가D램으로 주력 생산품을 전환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값이 이처럼 빨리 많이 하락될 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반도체 산업협회 김치락부회장). 문제는 반도체 경기가 회복될지 아니면 침체의 길을 계속 갈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데 있다. 『반도체의 좋은 시절은 다 가고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아예 앞이 안보인다』는 비관론부터 『반도체라는 게 원래 경기부침이 심하다. 올한해만 잘 넘기면 내년부터는 호시절이 다시 온다』는 장미빛 전망이 엇갈리고 있어서다.◆ 반도체가격 하락은 구조적 모순서 비롯최근 미국 컨설팅 업체인 메릴린치사는 올 하반기부터 수요초과 현상이 재현된다는 극단적인 낙관론을 제시해 눈길을 끌고 있다. 메릴린치는 지난해 반도체 가격하락을 가장 먼저 정확하게 예측한 명성을 갖고 있는 회사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침체의 긴 터널에 갇혀 있는 반도체 업계가 드디어 불황에서 탈출하는 게 아니냐는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메릴린치의 전망은 반도체 시장의 구조조정이 끝나가고 있다는데근거하고 있다. 메릴린치는 올해 가격을 하락시킨 원인을 PC업체들의 재고정리와 반도체 메이커의 주력생산품 전환에 따른 시장의 구조조정에서 찾고 있다. 작년말 세계 PC판매가 예상외로 부진, 재고가 쌓인데다 메이커들이 4메가D램에서 16메가D램으로 주력 생산품목을 바꾸면서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깨졌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이같은 구조조정이 끝났고 따라서 다시 정상궤도를찾을 것이라는 게 메릴린치의 주장이다. 메릴린치는 한 발 더나가 펜티엄프로나 네트워크PC등의 보급으로 메모리 수요가 오는 99년까지 작년의 8배로 확대돼 만성적인 수요초과 현상이 재현될 것 이라고까지 예측했다.또 반도체의 경기 순환주기에 따라 내년부터 경기가 회복될 수밖에없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반도체 경기 순환론에는 10년 주기설이란 게 있다. 반도체산업의 발전속도가 빨라 10년마다 구조적인변환기를 맞이하고 이때 대불황의 여파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실지난 86년에도 그랬고 75년에도 큰 불황이 왔었다. 올해 나타난 불황은 이같은 10년주기설에 따른 것일뿐 대세는 지속적인 성장세를유지하는 방향이 된다는 얘기다.또 지난 2년간의 대호황은 비정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거품이 제거된 내년부터는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사실 반도체 경기순환론인 올림픽 사이클대로라면 지난 94년과95년은 침체기여야 했다.그러나 이 기간동안 메모리 반도체는 사상최대의 호황기를 구가했다. 이같은 좋은 시절은 PC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데 따른 비정상적인 버블이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따라서 올초 나타난 구조조정으로 버블은 없어지고 대호황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성장세로 다시 들어설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이같은 낙관론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업계의 체감지수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장상황을 종합해보면 낙관보다는 비관론이 우세할 수 밖에 없다』(현대전자 K상무)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오히려 불황이 타개될 조짐은 커녕 침체국면이 언제 끝날지 희망이 안보인다고 말하고 있다.반도체 메이커에서는 이같은 낙관적 전망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장애요소가 너무나 많다고 말하고 있다. 비관론자들은 우선 현재의상황을 「생산메이커들의 투자확대→생산물량 증가→공급과잉에 따른 가격하락」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이는 엄청난 투자를 하고 단기간에 이익을 뽑아내야 하는 반도체사업의 특성을 감안할 때 메이커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있다.예컨대 16메가D램 생산공장을 하나 짓는데는 약 7천억원의 설비투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장을 돌리고 이익을 낼 수 있는 기간은길어야 3~4년이다. 시장의 주력제품이 다음세대 제품인 64메가D램으로 넘어가기 전에 투자자금도 회수하고 다음 공장을 지을 때 쓸돈도 벌어야 한다. 왕창 돈을 쏟아붇고 반짝 공장을 돌려 돈을 챙겨야 하는데 공급과잉이 나타났으니 메이커로서는 비명이 안나올수가 없다는 것이다. 올 상반기 메모리 반도체 업계가 유례없이 낮은 가격에 반도체를투매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엄청난 자금을 투자했는데 장사는안되니 투자자금이라도 회수하려면 값을 내려 하나라도 더 파는 길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쟁업체들이 가격을 내리면 울며 겨자먹기로값을 더 깎아줘야 했다. 『결국 각 메이커들이 손을 잡고 절벽아래로 떨어진 꼴』(삼성전자 C이사)이 된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같은 상황이 내년에 더 악화될지 모른다는 데있다. 바로 대만업계의 신규참여 때문이다. 대만업계가 반도체를본격적으로 쏟아낼 시기는 내년 상반기. 지금 한창 건설중인 공장들이 생산할 물량은 줄잡아 8인치 웨이퍼 월 21만장 가공 규모다.이미 월 15만8천장을 가공할 수 있는 라인이 돌아가고 있으니까 대만업계의 생산규모는 내년에 한국(3사합계 월 25만장 가공)보다많아진다. 따라서 지금도 남아도는 반도체가 내년부터는 아예 넘쳐흐를지도 모른다는 것.이 경우 반도체 값이 지금보다 더 떨어질건 불문가지다. 대만업계가 제품을 본격적으로 양산할 경우 『16메가D램 가격은 개당 8달러선으로 내려올 것』(LG반도체 관계자)이란게 일반적인 전망이다.작년말 가격(개당 50달러)에 비교하면 6분의 1수준이다. 이는16메가D램의 손익분기점인 메가당 0.7달러를 밑도는 값이다. 한마디로 생산원가보다 못한 가격으로 제품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올수 있다는 것. 물론 대만업계가 최근 반도체 경기 침체의 여파로 공장건설에 주춤해 있어 내년에 본격 양산에 들어갈 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미 막대한 투자를 집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언제고 라인에 스위치를 넣을 수 있는 준비를 할 것은 분명하다.◆ ‘지루하지만 치열한 전투’ 계속될 듯업계는 이같은 시장구조의 변화로 세계반도체 산업에 「월남전」과같은 전선이 펼쳐졌다고 보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밖에 없지만 어느 누구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지루하지만 치열한」 전투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 물론 변수는 있다. 한일업계가 공멸의 위기를 맞지 않기 위해 감산이라는 공동의 전략을 펴고 있는 게 대표적 예다. 지난 6월부터 삼성전자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삼성은 1년 3백65일 쉬는 날 없이 가동하던 반도체 생산라인을 34개월만에 정지시켰다. 현대와 LG도 마찬가지다.일본업체들도 잇달아 감산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서로를 향해 날아오는 총탄을 함께 거둬들이자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같은 대증적 요법으로 반도체 경기를 다시 부추길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가격하락의 탄력이 아직도 살아있어 PC메이커들이값이 더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각 업체의 증산에따라 물량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메모리 반도체는투자연기등 물량증산을 억제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치가 있지 않는한 현재의 침체국면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이런 면에서 시험대에 올라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험은 체질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메모리에특화된 「절름발이」식 산업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한 언제 또 침체의 덫에 걸려 속을 태울지 모른다.시장상황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시장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는 숙제를 빨리 해결해야 제2의 반도체 기적을 만들수 있다는 애기다.★ 반도체 '법칙'들반도체에는 몇가지 「업의 법」이 있다.그 법은 경기순환론에서부터 투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워낙 기술발전 속도가 빠르고 경기부침도 심하다 보니 이러저러한 원칙이 생긴 것이다.대표적인 게 올림픽 사이클이다. 2년을 주기로 경기의 부침이 반복된다는 게 골자다. 침체기와 상승기가 교체되는 해에 올림픽이 열린다고 해서 올림픽사이클이라고 불린다. 이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은 반도체 투자패턴 때문이다.반도체 시장이 활황기에 접어들면 많은 업체들이 신증설 투자를 한다. 그러면 공급과잉으로 시장 상황이 나빠진다. 따라서 다음 세대제품에 대한 투자는 위축된다. 생산물량이 적어지니까 다시 호경기가 온다. 이같은 투자패턴에 따라 반도체 경기가 부침을 거듭하는것이다. 경기순환론에는 10년 주기설도 있다. 10년마다 대불황이 온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반도체의 기술발전속도와 관련이 깊다. 10년을단위로 기술이 한 차원 높게 발전하면서 시장의 구조조정기가 온다는 것. 올해 나타난 불황도 반도체의 집적도가 고도화되는데서 나타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투자이론중에는 1.7배 공식이 대표적이다. 세대교체를 하면서 공장에 대한 투자비용이 1.7배씩 늘어난다는 것. 예컨대 4메가D램 생산라인을 세우는데 5천억원이 들어가면 다음세대 제품인 16메가D램생산공장을 건설하는 데는 8천5백억원이 필요하다는 것. 물론 이이론은 반도체의 집적도가 높아지면서 그 유용성을 의심받고 있는게 사실이다. 기가급으로 넘어가면 1.7배가 아닌 3배 이론이 적용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시장확대에 대한 것으로는 무어의 법칙이 대표적이다. 인텔의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만든 이 법칙은 「반도체 수는 18개월마다 2배로늘어난다」는 것.트랜지스터에서 본격적인 IC(집적회로)로 넘어가던 시기에 나온이론이지만 반도체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한 이론이다. 원칙은 아니지만 반도체 경기를 나타내는 지표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게 BB율이다. BB율은 쉽게 말해 반도체를 1백원어치 생산했는데주문은 얼마어치가 들어왔느냐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컨대 BB율이0.9면 생산량은 1백원어치인데 90원어치의 주문이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