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M2 발생. 엘리베이터 대기요. 정문 통과 …」. 3월 00일,오전 8시. 삼성그룹 본관 경비책임을 맡고 있는 경비요원들의 무전기가 시끄럽게 기계음을 내기 시작했다. M2 상황은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이 본관으로 출근한다는 뜻이다. 본관경비를 담당하고 있는에스원요원들은 언제나 긴장 속에서 살지만 이럴땐 특별하다.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회장이 움직이는 동선을 명확히 파악해두는 건 기본이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 앞까지, 또 28층 사무실까지 정확히 몇분 몇초가 걸린다는 것까지 계산해 두어야 한다.이건희 회장은 격식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집무실 문제도 그렇다.언제 어디서든 일을 하면 그곳이 바로 집무실이 된다. 그래서 삼성그룹 본관 28층의 회장실은 대체로 비어있다. 회장실은 비어 있지만 그룹은 매일매일 바쁘게 돌아간다. 회장이 발로 뛰어다니는 여느 그룹 못지 않다. 아니 조직력이나 치밀함으로 따지면 오히려 그이상이다.그 비결은 무얼까. 이회장 자신의 카리스마를 우선 꼽을 수 있다.조직을 긴장하도록 만드는 리더십이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또하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있다. 바로 재계의 청와대로 불리는「비서실」이다. 삼성 비서실의 기능과 그 경쟁력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재계 청와대로 불리기도삼성그룹 비서실은 타 그룹의 기획조정실에 해당한다. 대그룹의 기획조정실은 총수의 절대적 신뢰와 막강한 권한, 능력을 인정받는인재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명실상부 대그룹의 심장이며 두뇌조직이다. 그룹회장들이 수십개 계열사들을 직접 챙기지않고도 경영상태나 임원들의 동향을 손금보듯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은 기조실이란 스태프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요그룹의 기조실은 총수의 비자금과 개인재산·로열패밀리 관리까지 담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삼성 비서실은 자타가 공인하는 그룹내 최고 브레인. 삼성의 비서실조직은 그간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현재의 비서실조직은 이학수 비서실장 밑에 비서 인사 기획·홍보 재무 감사 등5개팀이 있다. 총 인원은 1백34명(이중 이사급 이상 임원이 30%)으로 지난해(2백명)에 비해 상당수가 줄었다. 이른바 슬림화를 추진했기 때문. 스태프조직으로 실장 보좌역이 있다. 이제훈부사장과이승한부사장이 실장보좌역.비서실은 팀조직이 골간을 이루고 있으며 팀장은 전무급이다. 인사팀장에 이우희전무, 재무팀장에 유석렬전무, 기획·홍보팀장에 지승림전무가 각각 포진하고 있다. 이밖에 비서팀장은 오동진상무가담당한다.팀별 업무를 보면 비서팀은 회장의 스케줄을 짜는 비서역할과 함께비서실 전체의 안살림을 담당한다. 이를테면 총무부다. 최근엔 또하나의 역할이 추가됐다. IOC위원으로서의 이건희회장 앞으로 오는각종 서신에 답하고 대외연락을 담당하는 임무가 그것이다. 회장수행비서는 차장급 한명이 맡고 있다.인사팀은 그룹 전무급 이상 인사와 그룹의 복지후생정책, 교육·인사제도, 노무정책 등을 담당한다. 인사팀 내에 있는 신경영실천사무국은 삼성이 추진하고 있는 신경영의 이념을 전파하고 고객만족도조사나 종업원만족도조사 등 각종 조사업무를 병행한다.재무팀은 그룹의 재무정책 전반을 관리한다. 경제연구소와 연계해환율 국제금리 등과 관련된 예측을 하며 그룹과 관련된 제반 관재업무도 재무팀의 일이다.기획·홍보팀은 기획과 전략홍보를 담당한다. 신사업이나 그룹 차원에서 진행되는 구조조정,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밑그림을 짜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그룹의 현안인 자동차사업도 기획팀 소관이다. 전략홍보팀은 그룹의 광고와 홍보를총괄한다. 사장단회의에 그룹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 올리는 일에서부터 그룹 사보, 정기적인 그룹의 CI전략 등을 맡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그룹 홍보나 대행사 관리, 해외정보와 국내정보도 전략홍보팀에서 주관하는 일이다.감사팀은 말 그대로 감사업무를 하는 곳. 지난 95년 이후 실제 감사를 나가기 보다는 감사정책 쪽으로 감사팀의 역할이 바뀌었다.계열사 감사팀에 감사 노하우를 전파하는 것에서부터 그룹 보안과각종 감사정책에 대한 연구를 담당한다. 이밖에 보좌역실은 라인조직은 아니지만 그룹의 현안, 이를테면 한남동 복합타운이나 초고층빌딩 건립사업등을 추진하고 있다.◆ 조직이 일하는 시스템이 경쟁력비서실에선 매일 크고작은 회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것은 매주 금요일 열리는 비서실 팀장회의. 5개 팀장들이 참석해각 팀간 정보교류와 업무조정을 한다. 비서실 전체 임원이 참석하는 임원회의는 매주 수요일 열리며 이순동 기획홍보팀 상무가 주재한다. 차석회의는 부장급 간부사원들이 참석하며 매주 목요일 열린다.공식적인 비서실 조직은 아니지만 올해부터 신설된 기구로 각 소그룹 전략기획실장들이 참석하는 전략기획실장단이 있다. 전자 기계금융·보험 화학 물산 등 5개 소그룹의 전략기획실장으로 구성돼있다. 과거 비서실 내 운영팀이 맡아 하던 각 계열사 살림을 전략기획실장이 직접 챙기고 비서실과의 업무조정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다.비서실 업무의 독특한 점은 모든 간부·임원이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인다는 것. 개별적으로 주어진 일이 있고 보고체계는 바로 윗선의 상사와만 연결돼 있다. 다른 팀에서 하는 일은 알려고도 하지않고 실제 알지도 못한다. 보안의식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룹 비서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계열사 영업실적을 챙기는 운영팀, 그룹 임원인사를 담당했던 인사팀, 내부비리를 적발하는 감사팀, 각 계열사별 자금을 배분하는 재무팀 등은 말 그대로 막강한 파워를 지녔다. 운영팀 과장이 계열사사장에게 호통치는,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일도 드물지 않았다.그러나 지난 93년 이건희회장이 신경영을 선포하면서 비서실의 역할도 「군림하는 비서실」에서 「지원하는 비서실」로 탈바꿈하고있다는게 대다수 관계자들의 평. 특히 이회장은 『비서실은 비행기가 잘 뜨도록 도와주는 관제탑이어야 한다』는 이른바 관제탑론을주창해 비서실의 권력이 계열사로 대폭 이양되는 전기를 마련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비서실에 얽힌 각종 비화는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보의 풍부함과 신속함에 대해선 재계내 타그룹의 추종을불허한다는게 대체적인 평가다. 기획·홍보팀내에 별도로 구성돼있는 정보팀은 정치권 재계 관계 등 각계의 정보를 수집해 그룹 상층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삼성의 정보력에 대해선 몇가지 전설적인 얘기가 있다. 대표적인 것들만 꼽아도 「김일성 사망정보를 가장 먼저 접했다」느니 「지난 대선에서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될 것을 정확히 예측해 미리 대응력을 키웠다」느니 하는 것들을 들 수 있다.그러나 그룹 내부에선 비서실이 이같이 정보의 산실로 인식되는 것에 대해 『상당부분 사실이 아니며 과장돼 있는 측면도 적지 않다』고 부담스러워한다. 그룹 정보팀의 한 관계자는 『외부에서 바라보듯 삼성정보팀이 정보를 만들거나 의도적으로 유통시키는 일은없다. 단 각층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조직적으로 취합하고 분석하는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보의 유용성이 높을 뿐』이라고 지적한다.비서실의 경쟁력을 얘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게 바로 시스템 경쟁력이다. 개인이 일을 하는게 아니라 조직이 일을 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것. 이는 삼성 특유의 관리문화와 연계돼 실제 삼성비서실을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은 유난히 해외출장이 많다. 지난해 IOC위원으로서의 업무도 보태졌기 때문이다. 이회장이 해외에 나가면 평소보다 더욱 바쁘게 움직이는 곳이 바로 비서실이다. 이회장은 시간과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비서실 각 팀 앞으로 각종 특명을 시달한다.93년 신경영을 시작할 땐 독일 일본 미국 등에서 장기체류하면서비서실을 6개월 이상 긴장시켰었다. 지난 3월초 일본에서 긴급히소집된 전자 전략회의도 이틀 전 비서실로 통보돼 이학수실장을 비롯한 기획 등 관련 임원들이 급히 일본으로 출국해야 했다.본관 26층과 27층을 사용하는 비서실의 하루일과는 새벽 7시부터시작돼 공식 퇴근시간인 오후 4시를 넘기기 일쑤다. 일본 사장단회의 같이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엔 자정 가까이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기도 하다. 밤 12시를 넘으면 비서실 각 사무실의 불은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한다.그러나 비서실 직원들의 마음과 머리속에 있는 불빛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다. 그런 불빛이 있기에 삼성호의 미래는 그다지 어둡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