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섬에서 골프와 섹스관광을 즐기며 카지노에서 수십억원대의 도박판을 벌인 혐의로 중견 기업체 대표와 범서방파 해외 도박단 총책이 검찰에 적발됐다.」지난 3월26일 신문지상의 사회면을 장식했던 기사다. 돈많고 할 일없는 부자들이 해외에서 도박과 섹스 레저 등으로 돈을 뿌리고 다닌다는 이런 내용의 기사는 새삼 새로울 것도 없다. 경제가 어렵든말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 눈꼴 사나운 소비행태는 어제 오늘의 얘기도 아니다. 이 기사가 최근 새삼스런 이유는 한창 나라 경제가 어려운 참에 수백억원의 돈을 도박판에 대는 사람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기업들은 쓸 돈이 없어 목말라하는데 해외호화관광이나 사치성 소비재 구입에는 적지않은 돈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모피의류 9백35억원 수입내 돈 내 맘대로 쓰는데 무슨 참견이냐는 식으로 유흥과 사치품에쏟아지는 돈이 우리 경제를 휘청거리게 하는 주범 중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산업에 투자돼야 할 돈이 호화해외관광이나 사치성소비재를 구입하는데 쏟아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치성 소비재가 대부분 외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먹고 놀고 꾸미고 호사를 부리는데 소중한 외화가 함부로 낭비되고 있는 셈이다.사치성 소비재 수입은 전반적인 경제 불황속에서도 호황을 누리고있다. 지난해 1∼2월 중 전체 소비재 증가율은 2.0%에 그쳤다. 표면적으로는 소비재 수입 증가세가 수그러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곡물류와 육류 수입이 줄어든데 따라 전체 소비재 수입이줄어든 것일 뿐이고 사치성·비내구성 수입 증가율은 소비재 전체수입 증가율의 3∼4배를 넘어서고 있다. 품목별 수입증가율을 보면컬러TV가 1백17.5%, VTR가 64.7%, 가구가 10.0%, 바닷가재가37.8%, 신발이 30.2% 등으로 지칠 줄 모르고 늘어나고 있다.고가 사치성 소비재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품목은 가구. 서울 강남의 웬만큼 산다는 집은 「촌스럽게」 국산 가구를 들여놓지 않는다. 이탈리아산이니 영국산이니 하는 유럽 가구나 미국 가구를 들여놓아야 「격이 살아난다」. 이런 고가 수입가구의 경우 소파 하나가 1천만원을 넘는게 보통이다. 국산 소파의 경우 보통이 2백만원, 고급이라 해봤자 4백만∼5백만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외제고가 가구의 가격이 어느 정도 비싼지 알 수 있다. 외제 침대의 경우 어디에서 판매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5백만원 내외다. 외제 장롱의 경우 3개 세트로 구입하려 할 때 1천5백만원은 보통이다. 서울 청담동과 논현동 일대의 외제 가구점의 경우 『불황이라장사가 안된다』고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단골 「부자집 마나님」들과 연락이 끊이지 않는다는게 정설이다.가구점 뿐만이 아니다. 불황이다, 불황이다 볼멘 소리를 해도 그건서울 남대문시장이라든지 별볼일 없는 백화점 얘기일 뿐이다. 서울강남 일대의 「진짜」 고급 매장과 고급 백화점은 불황을 모른다.가구점과 의상점의 경우 어차피 「부유한」 단골들과만 거래를 하기 때문에 단골들이 한꺼번에 망하지 않는한 불황을 타지 않는다.이탈리아의 고가 패션브랜드인 「프라다」가 올초 IPI코리아를 설립하고 직접 진출을 단행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고급 사치품 시장으로 유망한 시장인지가 드러난다. 잘 팔리니까 불황속에서도 우리나라에 진출하려는 것이다. 서울 압구정동에 사는K씨(28세)는 『프라다는 다른 외제 브랜드에 비해 국내에서 구하기가 힘들다는 희소성 때문에 꽤 인기가 있었던게 사실』이라며 『남들이 잘 모르는 외국 고급브랜드여야 인정을 받는다』고 말했다.품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혹은 브랜드의 유명 여부를 떠나서「상류층」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수 있는 고가 사치품이라면 무조건 좋아한다는 말이다.강남의 고급 매장의 경우 한달 매상이 얼마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없다. 세금문제도 있지만 물건을 사려는 단골 손님이 아닌 경우 아예 접근 자체를 꺼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봤자 매장 점원이 쪼르르달려나와 「뭐 찾으세요」라고 떨떠름하게 쳐다본 뒤 졸졸 뒤를 쫓아다니며 물건도 못 보게 한다.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면 『원하는게 구체적으로 뭐냐, 살거냐』부터 묻는다. 청담동의 한 가구점의 경우 『상품에 따라 다 다르다』며 『앉아서 뭘 원하는지 상담부터 하자』고 나온다. 가격이 워낙 천차만별이라 얼마라고 딱 집어 말할수 없다는게 이들 상인들의 대답이다.지난해 국내에 들여온 수입가구는 2천5백만달러어치. 환율을8백50원으로 따졌을 경우 대략 2백10억원어치 가량이 수입된 셈이다. 의류의 경우 종류가 워낙 다양해 일괄적으로 따질 수 없지만모피의류 하나만 따졌을 경우 지난해 1억1천만달러어치가 수입됐다. 마찬가지로 환율을 8백50원으로 계산했을 때 9백35억원에 달하는 양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모피의류라면 사죽을 못쓰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수입 승용차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해 승용차 수입에 쓰인돈은 4억1천3백만달러. 3천5백10억원(1달러를 8백50원으로 계산할경우)이 승용차 수입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중동의 왕족이나 부호들이 즐겨 타는 1대에 1억원이 넘는 벤츠 600-L(1억8천1백50만원)BMW 740IAL(1억2천5백만원) 아우디 A84.2Q(1억1천만원)등이 국내에서도 쏠쏠찮게 팔리고 있다. 지난 한해동안 국내에서 판매된 수입차는 1만2천대(비공식수입업체 판매포함). 이 가운데 2천여대가 한대 가격이 1억원이 넘는 스포츠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외제 스포츠카를 구입하는 소비자는 주로 부유층2세들이라고 귀띔한다.◆ 사치성 소비재 수입 3~4배 증가고가 사치품 소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천만원이 넘는 수입카펫,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달하는 수입보석, 억원대를 호가하는 수입악기에 이르기까지 저렇게 비싼 걸 누가 살까 하는 제품들이 불황을 모르고 팔리고 있다. 수입악기의 경우 음악을 전공하는사람들에게는 교습비를 능가하는 경제적 부담이 되고 있다. 수백만원짜리 외제 바이올린 정도는 기본. 1억원이 넘는 바이올린도 수두룩하다. 지난해 국내에 수입된 악기는 1억달러(약 8백50억원) 규모. 국산악기가 품질좋고 가격이 저렴해도 일단은 유명한 수입악기를 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악기 사는데 쓴 돈이다.해외여행 가서 사오는 고가 외제품도 만만하지 않다. 서울 양재동에 사는 K(26세)씨는 『지난해말 미국에 여행갔다 오면서 겐조 핸드백을 사왔다』며 『외국에 나갈 때마다 한꺼번에 많이는 못사지만 옷이나 화장품, 목걸이 등을 사온다』고 밝혔다. 한쪽에서는 돈이 없다 없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금쪽같은 외화가 「밑빠진독에 물 쏟아붓듯」 고가 사치품 구입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정부와 신한국당은 지난 2월말 당정회의를 열어 상속 증여세를 물지않고 부모가 1억원까지 20세 미만의 자녀에게 물려 줄 수 있는저축상품을 빠르면 올 상반기 중에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이 저축상품이 고소득층을 위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부추기는 이런 상품을 신설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호화 관광과 고가 사치품 구입에 쓰이는 고소득층의 자금을금융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얼마나 돈이 금융권에 들어오지 않고 고가 사치품과 흥청망청식의 유흥비에 들어갔으면 「하석상대(下石上臺)」식의 정책이 나왔을까 동정이 가지 않는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