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7월 25일. 한여름의 더위에 아침부터 땀을 흘리며 반월공장으로 들어선 권혁홍 신대양제지사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작업복차림으로 갈아 입었다. 냉커피 한잔을 들면서 한국경제신문을 펼치던 그는 대문짝만하게 자기 회사 이름이 실린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놀라움은 이내 잔잔한 미소로 바뀌었다. 신문에 대서특필된내용의 골자는 능률협회가 상장사를 포함한 국내 5천개기업의 우량도를 조사했는데 이 조사에서 신대양제지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을통틀어 3위로 뽑힌 것이다. 1위는 초우량기업인 삼성전자, 2위는성미전자, 3위는 신대양제지가 선정됐다. 특히 소형사부문에선 랭킹 1위를 차지했다. 이 조사는 능률협회가 이른바 국내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모두 분석해 내놓은 자료로 성장성 안정성 활동성등을 검토해 작성한 기업체의 종합성적표이다. 그런데 창업한지 불과 10여년밖에 안된 업체가 기라성같은 대기업이 즐비한 5천개 기업중 3위를 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권사장은 비로소 지난 10여년동안 한눈을 팔지 않고 열심히 기업을일궈온 보람을 조금이나마 느낄수 있었다.◆ ‘품질이 좋으면 수요는 저절로 창출된다’권사장이 사업을 시작한 것은 지난 82년 반월공단에 신대양제지를창업하면서부터이다. 성균관대를 나와 형인 권혁용 대양제지회장밑에서 임원으로 10년동안 제지일을 해온 그는 40세가 되던 나이에독립했다. 나도 한번 멋지게 제지업을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서였다. 불혹이란 나이는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볼때 강한 성취욕을느끼기 시작하는 때인지도 모른다.반월공장에 하루 60t생산의 설비를 갖추고 골심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골심지는 골판지 내부에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종이를 말한다. 골판지는 사과 배 등 농산물뿐 아니라 전자제품 식품 등의 포장용기로서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다.골심지는 골판지의 충격을 흡수, 내용물을 보호하는데 가장 중요한역할을 한다. 당시 국내에는 60여개 골심지업체가 있었다.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제품의 장래성으로 보아 한번 도전해 볼만한분야라고 판단했다. 산업이 발달하면 필연적으로 포장수요가 늘게마련이고 자연스레 골심지 수요도 크게 늘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그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원칙을 정했다. 최고급설비를 갖추고 제품의 품질을 최고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품질이 좋으면 수요는저절로 창출된다는 게 경험에서 배어나온 신념이었다. 소비자인 골판지업체들이 제품의 품질을 더 먼저 알아보고 구매한다는 확신을갖고 있었다.그는 외국을 두루 다니며 최고급설비를 갖췄다. 기존 업체들의 설비투자비보다 2배가량이 더 들었다. 이 설비는 기존의 환망식 골심지와는 달리 장망식골심지를 생산하는 설비였다. 장망식은 강도가높아 박스를 만들때 아주 튼튼해지는 장점이 있었다. 외국에선 일반화된 제품이지만 국내업체들은 설비부담때문에 쉽사리 도입하기를 주저했다. 권사장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 설비를 도입한다는부담 때문에 설비가 들어와 설치될 때까지 공장에 상주하면서 일일이 설치과정을 지켜보고 문제점을 점검했다. 제지는 원료배합과 기술개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설비를 제대로 갖추는것이다. 장치산업이기 때문이다. 또 장기적으로 수출도 해야한다는생각에 고급설비를 갖추게 됐다. 2년여에 걸친 공장건설을 마쳤을땐 예상대로 수요업체들이 몰려들었다. 따로 영업을 할필요가 없었을 정도였다.신대양제지는 창업이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마침 불어닥친 호경기도 회사성장에 순풍이 되었다. 권사장은 남는 이익을 과감하게재투자,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유지하면서 설비를 지속적으로 확장해갔다. 여기에다 회사성장을 가속시킨 것은 노사분규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87년 6·29 선언으로 촉발된 민주화운동과 이에 편승한 노사분규는 반월공단에도 불어닥쳤다. 인근의 제지업체들도 모두 홍역을 치렀다. 회사 문이 닫히고 사장이 공장안으로 못들어가는 일이 종종 생겼다. 때로는 폭력도 발생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신대양제지만큼은 노사분규는 커녕 노조마저 결성되지 않았다. 회사측에서 노조설립를 막은 것도 아닌데 노조는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종업체에 비해 월급이나 복리후생이 월등 뛰어난 것도 아니다. 업계 평균보다 조금더 잘 해주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노조가 없고 분규가 없었던 것은 웬일일까.『저는 기업을 하면서 한번도 종업원을 부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욕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오로지 인격적으로 대할 뿐이지요.』권사장은 자신은 경영이라는 직책을 맡은 것이고 생산직 근로자는생산이라는 직책을 맡은 것일뿐 똑같은 회사 식구라는 생각으로 이들을 대했다. 특히 일이 잘못되면 간부를 야단치면 야단쳤지 말단직원을 혼내는 법이 없었다. 공장에 들어서면 이들과 똑같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현장을 누비며 점심때는 똑같이 줄서서 배식을 받는다.사장이라고 밖으로 나가서 외식을 하는 일이 없다. 서울 사무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종업원이 자주 이용하는 빌딩 지하 1층의 김치찌개집이 그의 단골이다. 누가 사장이고 종업원인지 구분이 안갈정도이다.◆ 96년 R&D비율 2위 기업으로 꼽혀그가 이런 경영철학을 갖게 된것은 어린 시절 추억에 많은 영향을받았다고 한다. 광복전인 42년에 태어나 초등학교시절 6·25를 겪었고 가장 배고팠던 50년대와 60년대초에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같은 반의 극소수 부유한 친구들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때론부잣집 친구들이 피우는 거드름에 비위가 상하기도 했다. 「비록그들은 호의호식하고 나는 어렵게 생활하지만 인간적으로 내가 뒤지는 것은 없다. 나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성공할수 있다. 또 성공한 뒤에도 절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겠다」.그는 기업을 하면서 이 결심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노조가 없는 대신 노사협의회를 갖는다. 여기서 근로자측의 주장은들어줄 만한 것은 과감하게 들어주고 상식적으로 수용할수 없는 것은 납득할수 있도록 설명해 거절한다. 근로자측에선 사장이 자기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것을 너무 잘알고 있어서 별다른 마찰없이협의회를 끝낸다. 이런 공로로 노동부로부터 96년도 노사협력우량기업으로 뽑히기도 했다.권사장은 사업을 하면서 몇가지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우선 국내 최대 골심지업체로 발돋움한 것이다. 97년 현재 하루 생산능력은 1천2백t에 이른다. 이는 국내 업체 총생산량의 30%에 이르는 것이다.또 하나는 해외수출에 본격 나선 것이다. 골심지는 그동안 내수산업으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권사장은 한단계 도약을 위해선 국내시장에만 의존해선 안되며 해외를 겨냥해야 한다고 보고 96년부터 동남아 중국 홍콩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첫해 수출은 8백만달러에 달했다. 97년엔 2천만달러를 목표로 삼고 있다.권사장은 94년엔 모범납세자로 뽑혀 대통령상을 받았다. 96년 증권거래소는 전년도 12월말 결산법인 4백42개사 가운데 매출액대비 연구개발투자비율이 두번째로 높은 기업으로 신대양제지를 꼽기도 했다.지난 10여년 동안의 경영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권사장은 21세기를겨냥, 제2의 도약을 위해 두가지 중요한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하나는 2000년까지 일산 6백t을 증설, 단일회사로서 세계적인 생산규모를 갖추는 것이고 또하나는 사업다각화에 나서는 것이다. 다각화는 우선 종이 타이어 고무 등의 재활용을 위한 환경사업이고 정보통신 등 여타분야로의 진출도 추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