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전통 매듭 있지 않습니까. 이걸 기존의 시계줄에 연결시켜 놓고 그 스케치를 보여줬더니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며 감탄들합니다. 또 아마 잘 모르실텐데요, 옛날에도 휴대용 시계가 있었습니다. 시계 자체의 크기는 지금 것과 비슷한데 평소에는 나무곽에 끼워 넣고 다니다가 시계를 볼 때는 빼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 제품이면 지금 바로 복제해서 내놓는다해도 틀림없이시장성이 있습니다.』(은병수 (주)212 디자인 대표)『천원짜리 지폐 앞면에 보면 「투호」라고 있습니다. 화살같이 가늘고 긴 막대기를 던져 넣는 여가용 놀이기구인데 퇴계 이황 선생이 정신을 맑게 한다며 선비들에게 권했다고 합니다. 이 기구는 서양의 다트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차별성이 뚜렷한 한국의 문화유산입니다. 이를 현대적 디자인 감각을 가미해 약간 변용시키면 국제시장에서도 통하는 문화상품이 될 겁니다.』(최재관 인타디자인소장)디자인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전통문화는 아이디어의 보고다. 면적을 많이 차지하는 대형 문화재는 물론이고 일반 생활용품이나 과학기자재, 소품, 그림 등에 이르기까지 주변에서 쉬 접할 수 있는물건 가운데 상당수가 고부가가치 상품으로서의 잠재력을 지니고있다. 따라서 약간만 손을 보거나 산업 디자인적 기법을 적용할 경우 얼마든지 개성있는 상품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전문 디자이너들은 말한다. 탁월한 조형미와 기능성,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외국에는 없는 한국적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한국의 전통 문화 요소를 최근현대적 산업 디자인의 감각으로 재탄생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전통 공예상품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또는 박물관에서 「잠을자고」 있는 문화유산에 산업 디자인적 개념을 도입해 세련되면서도 현대적 이미지를 갖는 상품으로 다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 물품들을 단순히 복제 생산하는 차원과는 다르다. 각 문화재들이 갖고 있는 특성이나 고유성 공통성 등의 이미지를 추출, 일정한 기본틀을 설정해 놓은 뒤 이를 토대로 각 개별 상품 디자인에파생적으로 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일종의 데이터베이스구축 사업이다.이 작업은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KIDP·원장 노장우)과 디자이너,관련 학계 등이 힘을 모아 추진하는 산업 디자인계의 대역사(大役事). 그런 점에서 사실상 한국적 디자인의 전형을 찾고자하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전통문화와 현대 산업 디자인간 접점이 이뤄지게 된 것은 KIDP가디자인 분야의 기초·응용연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산업디자인기반기술개발사업」을 추진한 것이 계기가 됐다. KIDP는 디자인 정보 전반에 관한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대규모의 디자인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구상, 지난 4월 기반기술개발사업 시행공고를 냈다. 그리고 6개월여 지나 환경, 감성 및 인간 공학, 조형, 색채, 트렌드 등 17개 분야의 기반기술개발사업을 발표했고 이가운데 문화분야의 프로젝트가 선정된 것이다. 지원 대상 사업은△문화상품 디자인 개발에 관한 연구(과학문화재 상품화디자인 방법론을 중심으로)(총괄책임·강은엽 계원조형예술전문대 교수) △한국전통문화요소의 시각적 상징화에 관한 연구(나재오 단국대 교수) △한국전통문양의 현대적 표현을 위한 디자인 개발 연구(조영제 서울대 교수) △우리 제품문화의 산업디자인적 분석을 통한 객관적 고유성 발견과 적용방안에 대한 기초연구(은병수 212디자인대표) 등 4개 과제. 이중 「한국전통문화요소…」와 「한국전통문양…」은 시각적 측면, 「문화상품…」과 「우리 제품문화…」는입체 디자인 측면에서의 접근이다.과거에도 전통문화 유산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유물적 또는 역사적 가치에 중점을 둔 것이대부분이었다. 따라서 학술적 의미는 있을지언정 상품 디자인적 관점에서의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할수 있다. 공예품과 관련된 연구도 일부 이뤄졌으나 역시 전통성에 근거해 형태와 제작기법을 되살리려는데 지나지 않았다. 『원상태를 복원하거나 충실하게 재현하는 작업만 진행됐을 뿐 상품화를 위한 실질적 연구는 미흡』했고(나재오 교수) 이 때문에 『스스로 전통공예상품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만것』(은병수 대표)이 현실이다. 은대표는 그런 점에서 현대산업 디자인과의 접목을 위한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하고 있다.디자인 업계가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나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전통문화 요소의 디자인적 활용이야말로 한국산업 디자인계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활로라는 데 있다. 서구적 디자인에서 아이디어를따오거나 아예 드러내놓고 모방하는 따위의 기존 관행으로 국제시장에서 버텨나갈 수 없음은 모두가 인식하는 사실이다.전문 디자이너들은 고객으로부터 『이탈리아식으로 디자인해 달라,또는 일본식 스타일로 해달라』 등의 주문을 받지만 『한국식으로디자인해 달라』는 주문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런 주문을 받을 때 더 난감하고 곤혹스럽다고 토로한다. 뜻있는 디자이너나 기업가들에게 「한국적 디자인」이 없다는 현실은 위기의식으로작용해 온 지 오래다.21세기는 상품이 아니라 문화를 수출하는 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렇게 볼 때 한국적 고유 캐릭터의 창출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이 기업가나 디자이너들의 공통된 지적이다.선진 각국들은 그들만의 전통문화 요소를 모티브로해서 독특한 캐릭터를 개발, 상품화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 제품에서는 정교함과세세함이, 독일에서는 일체의 장식을 생략한 딱딱함과 견고함이,미국에서는 스케일과 실용성 등의 인상이 느껴진다. 이것이 그들의오리지널리티이며 이를 통해 특유의 영향력이라든가 파급효과, 고유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뒤집어 해석해보면 그들은 현대적제품을 개발하는데 있어 자기 문화에 대해 사전적으로 연구 조사해석하고 그 결과를 적용하고 있다는 얘기다.이번에 KIDP로부터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4개 디자인 기반기술개발과제도 디자인 선진국처럼 전통문화에서 고유성을 발견해내고 이를제품 디자인에 적용하기 위한 방안 개발 과정이다. 한마디로 해서상품화를 위한 다양한 기법을 구축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우선 시각 디자인 측면인 「한국 전통문화요소의 시각적 상징화에관한 연구」는 전통 문화요소 가운데 독특하고 개성적인 선과 형태, 일러스트와 색상 등의 조형 가치들을 추출해 캐릭터화한다는계획이다. 우선 1단계로는 연구조사 및 검증을 통해 아이템을 선정하고, 2단계로 상징화 디자인을 하며, 3단계에서는 기본형과 응용형을 체계화한다. 마지막으로는 연구물을 CD에 담아 데이터베이스를 갖춤으로써 이를 필요로 하는 제품에 적용 또는 응용토록 하는과정으로 되어 있다.나재오 교수는 아이템 대상으로는 선사미술과 고분미술, 벽화, 불상, 석탑, 목칠공예, 금속공예, 도자, 서예 회화, 건축, 복식, 민화, 민예품 등 총 18개 부문에서 2백여점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수렵도, 고분벽화, 금동불, 첨성대, 성곽담, 사천왕상, 측우기, 거북선, 대문, 전각, 불화, 궁궐, 매듭, 문방사우, 장승, 하루방, 솟대, 자수, 보자기, 떡살, 등잔, 유기, 소반, 농기구 등이다.「전통문양의 현대적 표현 디자인 연구」도 내용면에서는 비슷하다. 조교수가 현재 구상중인 디자인 개발 범위는 기하학적 문양 5종 30개안, 각종 길상 문양 10종 50개안, 태극 및 괘 문양 5종 40개안, 종교문양 등 5종 40개안, 탈 8종 40개안 등으로 총 33종 2백개안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에는 쉽게 개발할 수 있는 아이템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것도 있어 아직 확정되지는 않은 상태다. 조교수측은 △문양 종류별로 특성을 규정한 뒤 △분류된 문양에 대해 현대조형 기법으로 디자인을 전개하며 △이렇게 개발된 디자인에 현대적 색채 선호 데이터를 적용해 △영상 및 인쇄매체에의 활용 방안을 마련한다는 구상이다.입체 디자인 분야중 「문화상품 디자인 개발 연구」는 과학 문화재,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조선 세종조대의 천문기상과 관계된 문화재를 어떻게 상품화하느냐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강은엽 교수는 먼저 독창적 발명품이거나 그 당시 세계적 수준의 문화재를 대상으로 할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해시계 앙부일구나물시계 자격루, 측우기 등이 대상으로 고려될 수 있으며 선정된 문화재를 형태적 또는 기능적으로 변용할 계획이다. 형태적 변용은크기를 줄인다거나 재질을 바꾸는 것 등이며 기능적 변용은 시간알리는 기능을 응용해 장난감을 만드는 것 등을 일례로 들 수 있다.최재관 소장은 『세계적 문화재는 단순 복제품으로서도 큰 상품 가치를 갖는다』며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소장물을 복제 판매해 큰 수익을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소장은 『복제품도 그 정도의 부가가치를 갖는데 하물며 외국인이 구매동기를 가질만한 디자인으로 상품화할 경우 경쟁력은 얼마나 더 커지겠느냐』고 강조했다. 그는이같은 작업이 완료된 이후 특히 중요한 것은 마케팅이라고 지적하고는, 예를 들어 「세계 최고의 캐릭터인 미키 마우스가 해시계를들고 있는 모습」같으면 한국 문화상품이 빠른 속도로 전세계에 인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제품 문화의 산업디자인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212 디자인측은 일단 고유 제품을 장르 및 시대별로 구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대상은 생활용품, 식생활용품, 문방용품, 탈 것, 농기구류, 가구류, 건축장식류, 잡화 등 다양하다. 이들 물품에 대해 산업디자인기법의 적용이 가능한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조형성, 생산성(재료와 기술측면), 경제성 등 3요소를 분석하고 그 결과에 따라 적용방안을 제시한다는 시나리오다.212디자인의 은대표는 『구체적 적용방안으로는 조형성만 따오거나재료의 변환을 고려하는 방법, 또는 제품이 갖고 있는 사용적 합리성 등을 직접 원용하는 것 등을 구상중』이라면서 예컨대 전통 매듭을 시계줄로 사용하거나 휴대시계를 형태나 기능측면에서 현대적감각으로 되살리는 사례를 들었다.4개분야에서 진행되는 한국적 디자인 모색 작업은 내년 중하반기에CD 등의 형태로 연구 보고서가 나오게 되어 있다. 따라서 시작 단계라고 할수 있는 현 시점에서 이렇다할 가시적 결과를 예측하기는쉽지 않으나 대체적으로는 자원화 기술, 응용화 기술, 상품화 기술의 3단계로 정리될 전망이다.상품화 기술 모델까지 완성된다면 그 효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예상해 볼수 있다. 즉 섬유산업분야의 신상품 개발, 포장디자인 산업의 진흥,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디자인의 기초 자료 구축, 국가적 차원에서의 시각적 캐릭터 창출 등이 기대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현재 대량생산되고 있는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 등의 제품 경쟁력 증대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작업 참여자들은밝히고 있다.이 작업이 의미를 갖는 또 다른 대목은 독자적인 디자인 투자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에 하나의 돌파구를 열어준다는데 있다. 이미 일부 팬시나 문구업체에서는 국적있는 고유 디자인을 개발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인력이나 동원 가능 재원면에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고유디자인을 집대성한 기초자료가 있을경우 이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