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통화전쟁의 서막유럽 단일통화 「유러」 가맹국이 11개국으로 최종 결정됐다. 영국과 덴마크 등 이탈 국가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유러는 로마 제국의 화폐였던 데나리우스 이후 최초로 「제국의 화폐」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지 않을수 없다. 그동안 경제학자와 통화론자 정치인 일반 기업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는 논객들간에 격렬한 논란을 불러왔던 「유러」였다.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것은 각국이 국가권력의 원천으로까지 인식되어왔던 화폐주조권(시뇨리지)을 스스로 포기하고 경제운용과관련된 주권마저도 상당부분 유보했다는 점이다. 「최적 화폐권역」(optimum currency area)을 둘러싼 쟁패는 사실 식민지를 둘러싼 쟁패 그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종주국은 끊임없이 주변부에빈곤을 수출하는 그런 모순의 상황에서 유럽의 다양한 나라들이 동일한 화폐를 써보겠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도박이 아닐수 없다.그런 점에서 유러의 탄생은 19세기의 파운드화나 20세기의 달러화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화폐는 언제나 장강의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듯이 주도권을 이어왔다. 파운드는 해가 지지않는 영국의 상징이었으나 이미 1870년에 영국의 총생산이 미국에기울었고 1차대전이 닥치면서는 미국의 생산이 독일과 영국의 3배에 달해 이미 달러우위를 기정사실화했다.◆ 유러·엔·달러 3자정립 시대파운드화의 몰락이 달러화의 등장을 재촉했다면 지난 70년 이후 달러의 형편없는 몰락이 결국 유러의 탄생을 가져왔다고도 할수 있다. 최근의 미국경제가 유례 없는 활황을 구가하고 있고 동아시아금융위기에서 보듯이 달러의 위력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와중에 유러가 탄생하고 있음은 실로 묘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수없다.미국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이제 세계의 통화는 유러와 엔 달러의 3자정립 시대로 들어서게 됐다. 이는 단순히 미국의 위신이 추락했다거나 유럽이 공동시장을 만들었다는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바로 총성 없는 통화전쟁의 막이 이제 본격적으로 오른 셈이다. 사실 닉슨이 71년 달러의 금태환을 정지했을 때 이미 달러는 세계화폐로서는 수명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달러의 금태환 정지 이후세계가 겪은 것은 거대한 인플레의 파도요 오일쇼크며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달러의 노후화 징후같은 것이 본격화되었지만 세계화폐를 찍는 나라는 국내의 문제를 고스란히 해외에 전가하는 소위 화폐조세(money tax)를 걷게 되는 것과 같은 특혜를 향유하게 된다. 그러니 유럽이 가만 있을수 없다. 우리는 왜 달러로 대외지불을 준비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거듭됐다. 물론 엔블록 구상은 동남아를 강타한 통화위기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만일 달러 유러 엔이 3자 정립한다면 지불준비자산으로서의 금의가치는 재인식될 것이다. 현재 금은 미국이 2억6천만 온스 유럽(11개 가맹국)이 4억6천만 온스를 갖고 있다. 중국은 이미 유러를 준비자산으로 사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혀놓은 바 있다. 볼만한싸움이 된다. 환율체계 역시 거대한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만일 유러 가맹국들이 내부의 경제력차이등 각종 곤란을 극복하게된다면 전세계에 유통되는 달러발행액의 3분의 1정도는 잉여의 달러가 된다. 이는 달러가치의 대폭락을 의미한다.물론 이런 일들이 하루이틀에 나타날 현상들은 아니다. 유러 자체의 시험적 출범은 내년이지만 유럽의 유일한 화폐로 사용되기에는아직 요원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계 경제가 이제 거대한 실험실로 들어서고 있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프리드만은 자칫 유럽에 내전적 상황을 초래할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유러가 과연 달러를 굴복시킬 것인지는 이제부터의 관전 포인트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