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인사중 김선홍전기아그룹회장만큼 영욕이 교차한 경영인도 드물다. 그는 사원에서 출발, 그룹총수까지 오른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으로서 재계에서 그동안 스포트라이트를 화려하게 받았다. 그를표현할 때면 「한국의 아이아코카」「대표사원 김선홍」「차박사」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었다.그러나 그의 「40년 자동차인생」은 이런 명성에 걸맞지 않게 끝을맺었다. 지난해말 경영일선에서 모양사납게 물러났던 그는 최근 검찰수사에서 이사회 승인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부실계열사에 자금을 지원하고 지급보증한 사실이 드러나 끝내 영어의 몸이 됐다.성공한 전문경영인에서 「피고인」신분으로 전락한 것이다. 죄명은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이다.진실은 재판과정에서 가려지겠지만 검찰이 조사한 내용만을 놓고보면 그가 과연 「한국의 아이아코카」인지 의문이 간다. 경영권을지키기 위해 임직원주식 취득자금으로 회사자금 1백40여억원을 무상공여하고 3백80여억원은 무이자로 빌려주었다.또 기아특수강, 기산등 4개 계열사가 부도위기에 몰리자 이들 계열사에 2조4천억원과 외화 2억5천만달러를 신규로 지급보증해줘 기아자동차는 물론 그룹전체를 부실덩어리로 만들었다는 것이 검찰의구속영장요지이다. 전문경영인이라면서 재벌총수에 버금가는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김전회장은 비록 피고인 신분으로 전락했지만 그가 한국자동차공업사에 남긴 업적은 가볍게 여길수만은 없다. 57년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전신) 기술과장으로 기아와 인연을 맺은 그는 입사 3년만에공장장으로 승진하는등 승승장구했다.그가 전문경영인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81년10월 기아산업 사장에 취임하면서부터다. 당시 기아산업은 중화학산업 합리화정책에 의해 동아자동차에 흡수합병될 위기에 처했다.이때 그는 흡수합병의 부당성을 5공정권에 설득, 기아산업을 살려내는 수완을 발휘했다.그는 곧바로 신차개발에 들어가 회사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봉고신화가 대표적인 사례. 이 차는 1t봉고트럭을 승합차로 개조해 만든 것으로 나오자마자 대히트를 쳤다. 이를 계기로 기아는 만년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며 자동차회사로서 위상을 재정립했다. 한국의 아이아코카라는 수식어는 이때 붙었다.여기서 자신감을 얻은 김전회장은 과욕을 부리기 시작했다. 80년말부터 자동차회사로서 전문화를 기하기 보다는 다른 재벌들과 마찬가지로 문어발식 확장에 열을 올렸다. 자동차를 팔아 번 돈을 건설,특수강분야에 쏟아부었다.◆ 몰락 블랙홀은 건설·특수강그러나 건설, 특수강은 기아그룹을 잡아먹는 「블랙홀」이 돼 버렸다. 잇따른 사업확장으로 재계 랭킹은 7위로 성큼 뛰어올랐지만 주력업종인 자동차는 속으로 멍들어 갔다. 김전회장은 이같은 사업확장을 통해 전문경영인의 틀을 깨고 오너가 되고 싶은 야심을 드러냈다.정치든 경영이든 장기집권하면 썩기 마련인법. 김전회장도 이 법칙에서 자유로울수는 없다. 그룹내에서 오너와 같은 위상을 갖게되면서 「김선홍 인맥」이 형성됐고 이들은 핵심포스트를 독차지했다. 이들은 신차개발시 김전회장에게 잘보이기 위해 사사건건 간섭하는 바람에 처음 의도했던 대로 차가 나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기아자동차노조의 강성기류도 어느 측면에서는 김전회장의 책임이라는 시각이 많다.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김전회장은 자신의인기를 의식한 나머지 이를 들어준 전례가 많다고 업계관계자들은지적한다. 경영인이 정도를 걷지 않고 인기에 영합,과욕을 부리면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김전회장의 몰락은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