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방배동 우성지도 사무실에는 발명특허증이 줄줄이 걸려 있다.국내 뿐 아니라 일본 미국의 특허증도 눈에 띈다. 이 회사 박세준사장(53)은 지난 9월엔 특허청으로부터 발명가 최대영예인 세종대왕상을 받기도 했다. 도로구분이 쉬운 지도를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 이 지도는 도로를 명확히 표시, 새로운 주소체계사업에큰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되는 아이템이다. 세계에서 첫 개발된 제품인만큼 미국 일본 유럽의 업체들이 기술을 팔라고 아우성이다.이에따라 이들 세 지역에 총 50만달러의 로열티를 받기로 하는 기술수출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우성지도는 발행부수면에서 국내 최대 도로교통지도 업체다.◆ 초등졸업이라도 그림·서예 등‘다재다능’박사장은 뿐만 아니라 펌프와 음식물쓰레기 퇴비화장치 등 60여건을 만든 발명가. 이중 20여건이 제품화됐다. 동시에 화가이며 서예가이기도 하다. 사장실에 걸린 동양화나 호랑이그림은 직접 그린것이다.다재다능한 박사장의 학력이 초등학교졸업이고 다섯번 망했다 일어난 기업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박씨는 초등학교 졸업후 농사를 짓다가 계룡산에 들어가 한학과 그림 서예를 배웠다. 군생활을 마치고 대전으로 진출, 서예학원을 연 것은 70년대 초반. 돈을 좀 벌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우후죽순처럼 서예학원이 설립돼 과당경쟁에 휩싸였다.짐을 싸들고 상경했다. 학원을 정리한 돈 25만원으로 노량진에 있는 11평짜리 시민아파트의 문간방 한칸을 사글세로 얻었다. 식구는아내와 자식 두명 등 모두 네명.종로 2가에서 서예학원 강사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강사생활은고달팠고 봉급도 적었다. 그림을 그려 파는 생활로 전직했다. 그림솜씨는 타고나 동양화와 동물화 등을 그린뒤 인사동 화랑가로 팔러다녔다. 무명화가인만큼 한장에 받는 돈은 고작 5백원에서 7백원.그나마 원매자에게 팔리면 돈을 받는 조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어느날 인사동 화랑에 갔다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7백원에넘긴 그림을 일본인이 무려 8만원에 사가는게 아닌가. 그런데도 화랑주인은 외상그림값을 나중에 주겠다며 차일피일 미뤘다. 그림만그려선 도저히 밥먹고 살기 힘들겠다며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붓과 종이 먹을 가방에 담아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주는화가겸 화상을 하기로 작심한 것. 하지만 사무실에 들어갈 용기가나지 않았다. 높은 빌딩 여러군데를 꼭대기까지 몇차례 올라갔다내려갔다 했지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들어갔다간 목덜미를 잡혀 끌려 나올 것 같았다. 저녁때가 되자 자식 생각이 났다. 몇푼이라도 벌어가야 할텐데. 마침내 용기를 내 보성산업이라는 업체의 사무실에 들어갔다.『원하시는 그림이나 글씨를 써드릴테니 마음에 들면 차비나 좀 보태 주십시오.』그는 지필묵을 꺼내 「보성산업이여 영원히 번성하라」는 붓글씨를일필휘지로 갈겨 썼다. 몰려있던 사람들은 솜씨에 깜짝 놀랐다. 가훈을 써달라는 등 주문이 쇄도했다. 그날 저녁에 번돈이 20만원.기껏 한달에 2만원 벌던 그가 하루저녁에 10배를 번 것이다. 그날밤 자식들이 가장 먹고 싶어하던 삼겹살을 듬뿍 사가지고 들어갔다.자신을 얻은 박씨는 명동 종로의 사무실을 누볐다. 석달동안 꽤 돈을 벌었다. 아예 화랑을 차렸다. 순차적으로 4개의 화랑을 열고 자기 그림과 유명화가 그림을 취급하기 시작했다.79년 제2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갑자기 그림시장이 얼어붙었다. 망하는 것은 순식간. 화랑을 정리하고 사당동에 집한칸 마련한뒤 핸드페인팅 사업으로 전환했다. 테이블보나 소파커버 등에 수작업으로 그림을 그려 파는 것. 회사명은 대주물산. 종업원은 어느새80명으로 불어났다. 유망사업이라고 판단해 뛰어들었으나 결과는반대였다. 종업원을 놀릴 수는 없어 열심히 제품을 만들어 냈다.하지만 수요가 없다보니 재료비 인건비 재고부담은 날로 커졌다.안쓰려고 결심했던 어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어음액수는 1억7천만원에 달했다. 매일같이 5백만원, 1천만원씩의 결제가 돌아오는데갚을 길이 막막했다. 밤에는 잠을 잘수가 없었다. 소주 세병을 마시고 누워도 30분 이상 잠이 오질 않았다. 회사를 매각하고도1억3천5백만원의 빚이 있었다.그는 채권자들에게 사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갚을테니 시간을달라고. 다시 그림을 생각했다. 여주와 이천지역 도자기촌으로 들어갔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주고 임금대신 도자기를 받았다. 닷새동안 일해주고 4백개의 도자기를 받았다.서울로 올라와서 잘 아는 화가들을 찾아다녔다. 도자기를 주고 그림을 구해왔다. 전공인 그림장사를 해야겠는데 돈이 없자 물물교환을 한 것. 도자기를 들고 대만에 건너가 대만화가들의 그림과 바꿔들고 들어왔다. 대형건물의 1층로비를 빌려 한·대만화가 현대작품비교전을 열었다. 이어 일본으로 건너가 한·대만·일본화가전을개최하기도 했다. 물론 즉석에서 그림을 팔았다. 3개월만에 빚을전부 갚고도 남았다. 이후 비슷한 사업을 하는 업체가 줄줄이 생기면서 더이상 돈벌이가 되질 않았다. 다시 문을 닫고 나무장사, 돌에 사진을 붙여넣는 사업 등을 전전했다.배운건 별로 없었지만 불편한 것은 고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성격이었다. 사업차 여러곳을 다니면서 지도를 볼 때마다 불편한게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어느 빌딩을 찾을 땐 무려 5시간이나주위에서 헤매기도 했다. 지도에 건물이 자세히 표기돼 있지도 않았고 그나마 있어도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 찾아내는 것도 쉽지않았다.◆ 다섯번 망했다 일어난 기업인그는 쉽게 찾을 수 있는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궁리에 궁리를거듭하던중 몇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우선 도로를 여러가지 색으로표기하는 것. 도로가 한눈에 들어와야 그다음에 원하는 것을 잘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3색도로 지도가 탄생했다. 이어 지도내에 구체적인 거리를 표기했다. 가로 세로 대각선거리가 얼마인지를 표시, 거리감각을 금방 익힐 수 있게 했다. 이어 색깔별 색인부를 도입했다. 마치 사전의 측면에 A B C 구간을 표기하듯 지도의앞면과 옆면에 색깔별로 지명을 표기,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간단한 아이디어지만 이는 세계에서 처음 고안된 것. 한국은 물론미국 일본 유럽에서 특허를 받았다. 지도업체 최초로 올해 벤처기업으로 등록하기도 했다. 우성지도에서 만드는 지도는 모두 10여종. 도로교통도를 비롯, 관광지도 드라이브코스지도 별미집지도등.『정부가 추진중인 새주소체계사업은 지도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만드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지도는 이 사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효자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박사장은 여러가지 발명품이 많지만 일상생활에 요긴한 지도사업에큰 애착을 갖고 더욱 편리한 지도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02)53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