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어때요?』 『만물상이 절경이라던데 정말멋있어요.』현대 봉래호에 승선, 금강산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11월25일. 주위로부터 이런 질문이 쏟아졌다.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한참을 망설였다. 가보지 않은 사람들의 「금강산 호기심」을 풀어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이궁리 저궁리 끝에 한마디가 떠올랐다. 『좋아요』였다. 옛 선인들은 시나 화폭으로 절경을 전했지만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탓에 그저 『좋다』는 말만을 금강산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연발했다.그런 뒤 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가보세요.』 반세기만에 자태를 드러낸 금강산은 「전할 산」이 아니고「가서 보고 느낄 산」이기 때문이었다. 일만이천봉 봉우리 이름을 다 알 필요가 없다. 골짜기마다 있는 폭포와 용소의 이름과전설 또한 몰라도 된다. 그저 단맛이 나는 공기를 들이빨면서 있는 그대로를 보고 느끼면 된다. 그런 산이 금강산이었다.있는 그대로를 느끼기 위한 금강산탐험은 구룡폭포코스부터 시작됐다. 「금강산 관광」이라고 새겨진 버스를 타고 온정리를 지나산초입에 다다르자 쭉쭉 뻗은 소나무숲이 나타났다. 러시아와 금강산에만 있다는 미인송 군락지였다. 높이가 15~20m쯤 되는 잘빠진 소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 모습이란 마치「북녀(北女)」들의 열병식을 보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목련관을 거쳐 옥류동에 이르자 장관이 펼쳐졌다. 잎이 져버린잡나무와 소나무들을 조연삼아 하늘로 치솟은 문필봉과 관음연봉, 그리고 이름모를 기암괴석들. 그 골짜기를 따라 하얀 포말을일으키며 흐르는 물들은 50년만에 금강산을 찾은 남쪽 사람들의넋을 뺐다.상팔담과 구룡폭포에서 떨어진 수정같은 맑은 물이 잠시 숨을 돌리는 곳은 옥류동과 연주담. 여기저기서『저 물좀 봐라』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연못에 고인 물은 비취색 그 자체였고 오죽 물이맑았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관광가이드의 말을 그때야 실감했다.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금강문을 지나 20여분 숨을 고르며오르자 우리나라 삼대폭포라고 하는 구룡폭포가 그 웅장함을 드러냈다. 계절이 겨울문턱에 도달한 탓에 폭포수는 꽁꽁 얼어 있었다. 장대한 얼음기둥만이 남쪽 손님들을 맞았다.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봄날 얼음기둥이 녹아 74m높이에서 떨어질땐 어떤 소리가 날까.』 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노라니 영상 2도의 날씨가 영하 20~30도의 스산함으로 다가왔다. 날이 어두워져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린 상팔담은 다음을 기약해야했다.이튿날 삼일포와 해금강으로 가는 길은 또다른 볼거리와 맛을 제공했다. 전날밤 5cm가량의 눈이 내려 봉래호에서 바라본 금강산자락은 백색으로 새로 단장, 개골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이런 정취에 빠져 삼일포로 가는도중 TV나 사진 등을 통해 「간접화법」으로 대화했던 북한사람들의 삶의 언저리를 훔쳐 볼수있는 것도 큰 수확이었다. 삼일포와 온정리로 갈라지는 삼거리부근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한창 집을 짓고 있었고 그들은우리가 손을 흔들 때면 같이 따라했다. 철조망과 2백여m 간격으로 배치돼 있는 군인들만 없다면 그들은 다가와 손을 잡을 것만같았다.장전항에서 삼일포까지 가는 20여km는 나지막한 평야지대였고 멀리보이는 산들은 대부분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다. 드문 드문군청색이나 카키색 옷을 입은 남녀들이 2~3명씩 짝을 지어 일을하러 나가거나 포대자루를 메고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할머니의 모습도 목격됐다.이런 모습을 보면서 비포장길을 달리길 20여분. 북한군 검문소앞에서 버스가 멈췄다. 전날 눈이 내린탓에 삼일포안 단풍각까지는 차가 갈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염화칼슘을 뿌리면될텐데…』라고 다소 원망섞인 얘기를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뿐이었다. 금강산일대 물은 북한 주민들이 샘물로 이용하고 있어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화학약품을 쓰지 않고 군인이나 주민들을 동원, 빗자루로 쓸어 제설작업을 한다고관광가이드는 전했다. 제설작업이 이뤄지지 않은것이 수긍이 갔다.단풍각에서 바라본 삼일포는 마치 바다와 같았다. 특히 조선시대양사언이 수련을 했다는 봉래대에서의 조망은 미사여구를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36개의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을 뒷배경삼아 와우도, 사선정등이 한 점으로 떠있었고 밑바닥이 휜히 보일만큼 물은 맑았다. 그래서 삼일포는 신라시대 어느임금이 하루 머물러 왔다 절경에 취해 삼일을 머물다 갔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문득 삼일포와 설악산 인근에 있는 영랑호가 교차됐다. 『과연삼일포가 남쪽에 있었다면 이정도로 보존됐을까』하는 생각이었다. 답은 「천만의 말씀」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호수주변에 수많은 위락시설과 음식점들이 들어서 삼일포물은 오염될대도 오염됐을 것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존된 삼일포는 의미가 더 컸다. 그것이 비록 개발여력이 없어서였든, 금강산일대를 혁명 이념지화한 북한당국의 강력한 통제에 의해서였든간에 말이다.신선들이 살아서일까. 만물상 오르는 길은 겁부터 주었다. 만상정 주차장까지 버스가 오르지 못해 1백8굽이의 반을 걸어서 입구에 도착하자 숨고를 사이도 없이 눈앞에 귀신형상을 한 귀면암이앞을 가로 막는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깎일대도 깎인 절벽에 둥근 돌이 덩그렁 놓여 있는 귀면암은 마치 만물상을 지키는초병처럼 우뚝 서 있었다. 오를 사람, 못오를 사람 고르기라도하듯이 말이다.선녀를 잃은 나무꾼이 하늘을 오르지 못한 분을 삭이지 못해 도끼를 내리 찍었다는 절부암을 지나 하늘문에 이르자 숨이 턱까지차올랐다.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하늘문 사이로 만물상 한부분이 어서 오라는 듯 빼곡이 시야에 들어왔다.땀을 비오듯 쏟으며 천선대에 오르자 만물상이 좌에서 우로 병풍처럼 펼쳐졌다. 기묘하게 깎이고 다듬어진 바위들이 자태를 뽐내며 마냥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아무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고있으면 됐다. 옛 선인이 읊었듯 「별유천지」가 바로 만물상이었다.등산광들은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고 했다. 이 말은 금강산에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금강산이 있어 금강산에 오르는 행렬」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위락시설 갖추면 '세계적 관광지'금강산은 관광의 보고였다. 본래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개발이이뤄질 경우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잠재력은 충분했다.구룡폭포,만물상 등은 있는 그대로만 보여주면 되고 개발여지가있는 것은 온정리에 있는 금강산온천. 이 온천은 수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수온 또한 높아 각종 피부병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 온천은 북한당국의 특수층만 이용해서인지 시설이 비좁고 낡아 보였다. 대단위 인원이 이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대규모 온천장을 설치할 경우 금강산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을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공연과 북한음식을 맛볼수 있는 위락단지건설도 필요하다. 북한음식으로는 냉면과 단고기(개고기)가 최고인데 이번 금강산구경에 나선 관광객들은 입맛만 다시다 왔다. 목련관, 단풍관 등에서현대측이 제공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을 뿐이다. 이로인해 관광객들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느낄수 없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현대측은 이런 점에 착안, 금강산개발사업을 착착 진행중이다.가장 먼저 착공에 들어간 것은 대단위 공연장과 휴게소. 이 시설은 현재 온정리 입구에 건설되고 있는데 골조공사가 한창이다.준공은 내년 2~3월경이다. 현대는 이 시설을 완공, 북한이 자랑하는 서커스를 공연하고 기념품도 판매할 방침이다.대단위 공연장을 완공한 뒤에는 온천과 호텔,스키장,골프장 등을순차적으로 지어 관광타운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렇게 해서 국내 관광객은 물론 외국관광객을 적극 유치, 외화벌이에 나선다는복안을 현대는 갖고 있다.★ 박춘삼 할머니의 55년만의 귀향 / "이젠 죽어도 여한없어"『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구경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현대 봉래호를 타고 금강산 관광에 나선 박춘삼(81)할머니 또한여느 실향민의 소감과 다르지 않았다. 5남매 낳아 잘 길러 시집,장가보내고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좋은 일」이생겨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박할머니는 이런 감회탓에 눈이 쌓여 20~30대도 오르기 힘든 구룡폭포와 삼일포·해금강코스를 마다하지 않고 다 돌았다. 길이험해 비록 만물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천선대에는 오르지못했지만 후회하는 기색은 없었다. 55년만에 고향땅을 밟았으면됐지 더 이상 욕심을 내서 무엇하겠느냐는 것이다.박할머니의 고향은 봉래호가 닻을 내린 장전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원도 통천군 백양면 계곡리. 현대 정주영명예회장고향과는이웃동네다.고향을 떠난 것은 25살때인 1943년. 결혼 2년만에 서울에서 자동차 정비사업을 하겠다며 고향을 떠난 남편 김진형(88년 작고)씨를 찾아서였다. 사실 박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떠나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당시 대부분의 시어머니가 그랫듯 그녀의 시어머니 또한 엄하기그지없어 서울행은 말도 꺼내지 못했다. 논밭을 일구며 먼발치에서나마 금강산을 바라보는 독수공방생활이 6년째 계속됐다. 보다못한 시아버지가 『아범을 찾아 서울로 가라』고 강권, 고향을등졌다.서울 마포구 도화동에서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던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던 그녀는 6·25전쟁이 터지면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뻔했다. 남편이 『죽더라도 고향에 가서 죽자』며 통천으로 피란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박할머니가 전쟁이 끝난 뒤 가자며설득해 고향방문은 훗날로 미뤄졌다. 이후 40여년이 훌쩍 흘렀고그사이 남편은 고향방문을 가슴에 안은채 88년 세상을 떴다.『남편은 금강산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고향방문 꿈에 부풀었습니다. 같이 고향땅을 밟지 못한 것이 한이 됩니다.』비록 남편과 함께 금강산 관광은 못했지만 박할머니는 쓸쓸하지않았다. 다섯째딸 김영기씨(44)와 막내아들 현기씨(41)가 동행,그녀의 고향방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살폈다. 특히 공무원인 막내아들은 어머니의 금강산관광길을 보살피기 위해 휴가를냈으나 상사로부터 거절당하자 사표를 내고 봉래호를 탔다.『이런 효자가 있어 더 이상 바랄게 없다』는 박할머니에게 한가지 아쉬움은 있다. 아직 생사조차 모르는 언니 박승옥씨와 10살아래인 남동생 승구씨에게 편지를 썼으나 이를 전달하지 못했다.이런탓에 삼일포에서 고향쪽을 가리키는 박할머니의 손끝은 왠지힘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