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 산업에서 경영으로 확대 ... 풀러ㆍ맥루한 통해 기술이론 접근

◆ 교육자로서의 출발 그리고 교육관드러커는 1939년 뉴욕 교외 브롱크스 빌에 있는 사라 로렌스 여자대학에서 시간강사 자격으로 1주일에 하루씩 경제학과 통계학을 가르쳤다. 그러는 동안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대학으로부터도 강의 권유가 왔다. 당시 드러커에게 있어서는 흑인이란 불황 이상으로 커다란의미를 지닌 영속적인 실존적 사실이었다.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이 『공정한 신(神)의 존재를 상기할 적마다미국의 장래를 생각하면 전율을 느낀다』고 한 말을 드러커가 접한것은 훨씬 후의 일이지만, 드러커는 뉴욕에 도착한지 한달만에 흑인들의 삶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스스로 겁쟁이라고 생각했던 드러커는 도저히 남부에서는 살 수 없음을 통감했다.그때까지 얘기가 있었던 교육계에서의 일자리로 가장 매력적이었던것은 애틀랜타의 에머리대학의 학부장직이었다. 『이 직무를 제의받은 것은 1940년 말로서, 그 당시는 아직 남부에서는 완전한 흑백분리가 실시되고 있었다. 나는 부득이 이 요청을 거절했다』고 회고했다.그 당시 드러커는 『이제 미국의 흑인이 해방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이미 흑인은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문제는 단 하나, 백인이 그 사실을 인식하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 하는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드러커는 1942년 버몬트에 있는 소규모 대학인 베닝턴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드러커는 주로 철학,정치 그리고 종교를 강의하는 한편 자문위원으로서 정부의 일을 맡기도 했다. 1949년까지 7년 동안 이 대학에 자문위원으로 근무하면서 주로 다룬 문제는 산업과 기업의 문제였으나 나중에는 금융문제에서부터 조직문제와 경영방침에 관한 문제에까지 확대했다.드러커는 1950년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이후 드러커는 교수로서 그리고 컨설턴트로서 산업과 기업의 문제에관심을 기울였다. 컨설턴트로서의 일의 영역은 점차 국제적으로 넓어졌고 드러커의 명성은 세계적인 것으로 되어 갔다.드러커는 『참다운 교사. 참다운 교육학자에게는 됨됨이가 나쁜 학생도 없거니와 됨됨이가 미련한 학생도 없고 게으른 학생도 없다.있는 것은 오로지 좋은 교사냐 엉터리 교사냐 하는 것 뿐』이라고쓰고 있다. 이런 교육관은 미국의 여러 대학을 거치면서 검증한 것이겠지만 어릴 때 빈의 교사들로부터의 배움과 추억에서 큰 영향을받았다.◆ 헨리 루스와 토마스 왓슨과의 만남1943년경 드러커는 이미 명성높은 자유기고가가 되어 있었다. <하퍼즈 매거진 designtimesp=19095>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었다. 또한 <하버드 비즈니스리뷰 designtimesp=19096>에 여러 편의 논문을 기고했다. 그 가운데 몇편은 맥킨지 상을받았다. 뿐만 아니라 드러커는 <월간 애틀랜틱 designtimesp=19097> 그리고 <포린 어페어즈 designtimesp=19098>와 같은 잡지에도 자주 기고했다. 또한 1975년부터 1995년까지20년간 <월 스트리트 저널 designtimesp=19099>에 칼럼을 고정 기고했다. 그 무렵 드러커는 신문 이외에 집필활동도 시작하고 있었다.<타임 designtimesp=19102>지의 창간자 헨리 루스(Henry Luce, 1898∼1967)가 1930년에창간한 격주간 경제지 <포천 designtimesp=19103>은 이미 미국의 기업이나 경제에 대한기사작성 방법 및 보도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고 있었다. <포천 designtimesp=19104>에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던 미국 회사에 대한 「기업이야기」는 오늘날「철저히 조사한 저널리즘」으로 알려져 있는 수법을 개척했다. 또한 「포천식」 그래픽스, 「포천식」 일러스트레이션, 특히 독자의취향에 맞춰 디자인한 광고는 미국인에게 광고를 현대적 시각에 의한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처음으로 일상적인 체험으로 만들어 주었다.드러커의 저서 <경제인의 최후 designtimesp=19107>가 1939년 봄에 출판되자 루스로부터자필 편지가 왔다. 대충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 책에 대해의견을 나누고 싶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 드러커는 <타임 designtimesp=19108> <포천 designtimesp=19109> 등에 기고하고 편집에도 관여했다. 그러는 동안 IBM의 창업자토마스 왓슨 1세(Thomas Watson, Sr.)와도 만났다. 드러커는 IBM에대해 『컴퓨터에 손을 대기 전의 IBM은 아직 보잘 것 없는 회사로서, 겨우 중간 규모의 기업으로 막 성장하려고 하던 단계였다.그러나 IBM은 이미 몇가지 아주 특이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예를들면, IBM은 단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파산의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사원을 정리해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장노동자에게 주급이나 월급 형태로 지불했고, 사원 전원에게 계속적으로교육과 훈련을 제공했다』고 쓰고 있다.◆ 기술 진보에 대한 신념 : 물러와 맥루한과의 만남드러커는 버크민스트 풀러(Buckminster Fuller, 1895∼1983)와 마셜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80)이 명사가 되기 훨씬 전부터 친구 사이로 지냈다.풀러의 세계는 범신론의 세계이며 그 세계에서 인간이 만능의 테크놀러지와 동일화하면 할수록 그 자신의 신성(神性)에 접근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풀러는 <포천 designtimesp=19118>의 기술고문이었다. 그의 그래프는 기묘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누구나가 대공황(1929년) 전의 번영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고작이었을 그 무렵 풀러는 이미 미국은 물론 히틀러의 맹습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던 유럽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와 같이 경제가 침체해있고 정치위기가 항다반사로 되어 있는 후진 지역에 있어서도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는 오직 하나의 요인, 즉 에너지에 대하여 몇개의 기하학적 곡선을 그려서 이 믿기 어려운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1940년 후반 풀러의 예측은 정확했고, 세계경제는 회복기에 들어섰다.맥루한은 풀러와는 달리 테크놀러지를 신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것으로서 파악했다. 맥루한은 테크놀러지를 인간의 확장으로생각했다. 백여년 전에 찰스 다윈과 동시에 진화론을 발견한 알프레드 월레스(Alfred Wallace)는 『의도적으로 비유기적·비생물적 진화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맥루한은 월레스의 이름은 들은적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월레스와 시종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맥루한에 있어서 테크놀러지는 인간의 자기완성이며 스스로를 확장하고 변화시키고 완성하는 수단이다. 마치 동물이 자연진화에 의하여 새로운 별개의 기관을 발달시키고 나아가선 별개의 동물이 되는것처럼 인간도 새로운 별개의 도구를 개발해 자기를 확장하고 나아가서는 별개의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40년대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싶어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미디어」(media)라는 용어에는 오늘날과 같이 정보전달 수단이라는 의미는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당시에도 그가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최소한 미디어는 메시지를 규정하며 메시지를 형성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