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비즈’ 변신 몸부림 대량 해고·채용 동시 진행 … 지난해 7백여개 기업 인력 재편

미국 경제학계에 최근 또 하나의 신조어가 등장했다. ‘처닝(churning)’이라는 용어다. ‘휘젓기’ 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말의 경제학적 의미는 ‘대량 해고와 대규모 채용의 동시 진행’. 한 기업 내에서 대규모의 해고와 채용이 동시에 진행될 때 ‘처닝’을 한다고 한다. 미국 기업계에서 요즘 이 ‘처닝’이 맹렬한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한쪽 부서에서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어온 종업원들에게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며 해고 통보를 하는 동안, 다른쪽 사업부에서는 “높은 연봉이 보장되는 인재를 모십니다”라며 신규 채용에 부산을 떨고 있다.‘처닝’의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인터넷 혁명과 ‘e-비즈니스’ 열풍에 따라 산업 구도와 시장 판도에 일대 변혁이 일고 있는 게 ‘처닝’의 배경이다.미국의 간판 통신회사인 AT&T사가 전형적인 예다. 이 회사는 일찌감치 1990년대 중반부터 사업 구조를 재구축하면서 매년 일정한 규모로 ‘처닝’을 진행하고 있다. 96년에 회계담당, 마케팅 요원, 전화 교환원, 정비 기사 등을 대상으로 4만명을 정리한 것이 ‘처닝’의 신호탄이었다. 이어 98년에도 1천8백명을 정리해고하는 등 모두 1만8천명의 일자리를 없앴다. 반면 이 회사가 96년 이후 인터넷, 소프트웨어 개발 등의 분야에서 신규 채용한 인력이 1만명을 넘는다. “시장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어떤 부서는 쓸모없게 되고, 반면에 새로운 사업부가 필요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리안 그래딕 AT&T 인사담당 부사장의 얘기다.공중전화기 제조회사인 엘코텔사도 시장 환경의 격변에 따라 인력 구조를 재구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경우다. 휴대폰이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공중 전화에 대한 수요가 급속히 낮아짐에 따라 주력 사업 구조를 컴퓨터를 이용한 화상 통신 장비 개발로 바꾸기로 했다. 이 회사는 이에 따라 최근 전화기를 생산하는 2개 공장 가운데 1개 공장을 폐쇄했다. 그 바람에 70여명의 종업원들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다.◆ 디지털 시대 … 인력 수요 패턴도 급변엘코텔사는 이렇게 해서 매년 절감하게 된 2백만달러의 인건비로 컴퓨터 엔지니어와 소프트웨어 개발 전문가 20여명을 채용키로 했다. “최저 임금 수준인 시간당 8달러를 받던 단순 기능공들은 설 땅이 없어지고, 연봉 10만달러 이상을 받는 고급 엔지니어들은 없어서 뽑지를 못하는 시대다.” 엘코텔사의 마이클 보일 사장이 담담하게 털어 놓는다.인터넷 혁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업종에서도 ‘처닝’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보험업체인 올스테이트사다. 이 회사는 작년 11월 정리 해고와 자연 감소, 인력 재배치 등의 방법으로 모두 4천명의 일자리를 정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를 통한 회사의 인건비 절감 효과가 연간 6억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계산 결과까지 덧붙였다. 올스테이트사는 이렇게 절감된 돈의 대부분을 인터넷 관련 신규 비즈니스 개척에 투입키로 했다. 올해부터 2년간 10억달러를 투입해 인터넷 및 통신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키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수백명의 소프트웨어 개발 및 컴퓨터 전문가 등을 고액에 스카웃한다는 것도 사업 계획에 들어 있다.미국 기업계에 휘몰아치고 있는 ‘처닝’의 강풍은 기업의 대소와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AT&T나 엘코텔과 같은 통신 회사인 벨 사우스사에서부터 회계-컨설팅 법인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사, 심지어는 첨단 인터넷 소프트웨어 회사인 아도브 시스템즈사에서도 ‘처닝’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경제학자들은 미국으로 하여금 최근 10년에 걸쳐 초장기 호황을 구가할 수 있게끔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기업들의 이런 발빠른 ‘조직내 신진대사’라고 말한다. 미국 기업들이 ‘처닝’을 통해 보다 경쟁력 있는 사업 구조로 변신해 나가는 것은 물론, 인력 시장의 전반적인 고급화 및 고기능화를 유도하는 효과까지 낸다는 것이다.미국 기업들이 얼마나 큰 규모로 ‘처닝’을 단행하고 있는지는 몇가지 통계만으로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인사관리 컨설팅 회사인 챌린지 그레이 앤드 크리스마스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이 지난 98년과 99년에 발표한 정리 해고 규모만도 각각 67만8천명과 67만5천명에 달한다. 10년전인 89년(11만1천2백85명)에 비해 여섯배 가량 늘어난 역대 최대 기록이다. 이는 기업측에 의해 발표된 숫자만 집계한 것이고, 노동부가 종업원 50명 이상 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지난해의 정리 해고 규모는 1백57만명에 이른다.경쟁력없는 임직원들을 쳐내는 미국 기업들의 ‘칼춤‘은 올들어 더욱 매서워지고 있다. 코카콜라사가 지난 1월 전체 임직원의 20%에 해당하는 6천명을 정리할 것이라고 발표했는가 하면, 백화점 체인 회사인 J C 페니사는 3백여개의 부서와 산하 약국들을 모조리 폐쇄할 계획이라고 최근 밝혔다.◆ 개인 업그레이드 자극 촉매 역할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에서 내몰리고 있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많은 규모로 신규 채용이 이뤄지고 있다. 미국의 실업률이 최근 30여년만의 최저 수준인 4%선으로 내려앉은 것이 웅변으로 설명한다. 물론 이런 ‘처닝’은 기업 내부가 아닌 기업간에 더 많이 이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재래 방식의 금융 통신 유통 분야의 회사들이 인원을 정리하고 나면, 이들을 인터넷과 연계된 새 비즈니스 회사들이 흡수하는 식으로. 그러나 최근 기업들의 발빠른 변신 행보에 따라 기업내 ‘처닝’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 경영자협회(AMA)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2천여개의 회원사 가운데 36%가 ‘처닝’을 실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도의 27%에 비해 크게 높아진 수준이다.월가의 경영 분석가들은 미국 기업들의 이런 ‘처닝 강풍’을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인 조셉 슘페터가 지난 1930년대에 갈파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에 빗대기도 한다. 슘페터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는 혼돈스런 변혁기를 맞으면 환경 적응을 위해 스스로의 구조를 재구축하는 본능적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최근 기업들이 앞다퉈 ‘처닝’에 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인터넷 혁명에 따라 온통 뒤바뀌고 있는 시장 경쟁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한 당연한 귀결이라는 얘기가 된다.이런 ‘처닝’ 돌풍과 관련해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그 속도다. 과거에는 보일러 생산이나 구두 수선, 엘리베이터 조종 등의 일자리가 빛을 잃기까지 수십년이 걸렸다. 그러나 요즘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처럼 ‘첨단 직종’으로 보였던 일자리도 몇년 사이에 ‘한물 간 재래 직종’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아도브 시스템즈사가 최근 3백여명의 소프트웨어 기술 지원 요원들을 정리해고하고 대신 인터넷 마케팅 분야의 ‘정예 요원’ 20여명을 신규 채용키로 한 것은 이런 현실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인터넷 신데렐라 기업’의 대명사로 꼽히는 아마존 닷 컴사도 지난 1월 ‘처닝’ 계획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전체 임직원의 2%인 1백50명을 정리하고 대신 소프트웨어 개발 등 분야의 전문가를 다수 채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이처럼 숱한 사람들이 직장에서 졸지에 쫓겨나고 있음에도 사회적 파장이 별로 일지 않는 것은 이들 대부분이 어렵지 않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엘코텔사에서 ‘불필요한 인력’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해고당한 S씨처럼 내친 김에 인터넷을 공부, 웹 전문가로 재탄생하는 개가를 올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처닝’은 이처럼 기업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업그레이드’까지 자극하는 촉매제로도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