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기메이커 탈피, 플레이스테이션 산업화 추진 … 가전메이커 제압 ‘야심’

3월4일 새벽 도쿄시내 시부야. 차세대 가정용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PS)2’를 사려고 밤을 꼬박 세운 인파 앞에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SCE)의 구타라기 켄(49) 사장이 소형카메라를 들고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오전 7시 판매개시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몰려든 보도진을 곁눈질해 가면서 총총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PS2가 게임기 시장에 지각변동을 몰고왔다. 지난 3월4일 판매에 들어간 PS2의 초기출하분 1백만대가 동이 났다. 이틀만에 72만대가 출하됐다. 본체를 움직이는 메모리카드의 공급만 충분했더라면 ‘발매 2일후 1백만대 판매’라는 당초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었다. 수만엔(3만9천8백엔)짜리 하드웨어 제품이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이 팔린 사례는 없었다.PS2의 돌풍은 이미 예고됐었다. 2월18일 밤12시 인터넷을 통한 예약접수가 개시된지 1분만에 60만건이 접속됐다. 컴퓨터시스템이 약 2시간 동안이나 다운됐다. 비디오대여점인 쓰타야 등에서도 예약접수가 순식간에 마감됐다.PS2 돌풍 원동력으로는 우선 뛰어난 성능을 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영화나 음악 등의 DVD 재생기능, 인터넷 접속 등 다양한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단순한 게임기가 아니라 군사기술에 전용될 수 있는 고도의 기술품목이다. “이 제품은 국내 전용품이다. (중략)통상산업대신의 허가없이 외국에 갖고 나가는 것은 금지돼 있다.” SCE는 2월18일 밤 12시 PS2의 온라인 예약개시를 알리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같은 내용을 올렸다. 리얼한 화상처리를 위한 PS2의 뛰어난 계산처리 능력이 군사기술에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기의 해외반출이 금지되기는 사상 처음이다.성능이 이처럼 뛰어난데 비해 가격은 상대적으로 싸다. 7만∼8만엔에 이르는 DVD전용기 가격의 절반수준에 불과하다. 인터넷판매도 주효했다. PS2는 ‘플레이스테이션 돗트컴’이라는 인터넷판매 전문회사를 통해 판매됐다. SCE는 지난 94년 첫기종인 플레이스테이션 판매에 나선 이래 그동안 소매점을 통해서만 게임기사업을 펼쳐 왔었다.◆ 군사기술 전용 우려 해외반출 금지플레이스테이션 신화창조의 원동력으로 빼놓을수 없는 것이 구타라기사장. 50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와세다고교와 전기통신대를 졸업한후 75년 소니에 입사했다. 주류였던 아날로그에는 관심이 없었다. 디지털에만 정신을 쏟았다. 입사 9년째인 84년에 리얼타임으로 움직이는 컴퓨터 그래픽 화상을 후카키연구소에서 처음으로 보고 윗사람과 담판, 연구소로 옮겼다.닌텐도의 패미콘이 붐을 타는 것을 확인하고는 89년 본사에 돌아오자마자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SME)안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다음해 닌텐도와 제휴, 패미콘 외부에 부착하는 CD롬기를 기획, 게임업에 뛰어들었다. 91년 닌텐도가 일방적으로 제휴를 파기하자 “이대로 소니가 닌텐도에 져도 좋은가. 브랜드에 상처가 남는다”며 오가사장(현 회장)에게 대들었다. 그때 오가사장이 “두 잇(Do It!)”이라고 편을 들었다. 그후 93년에 SCE가 태어났다. 94년말에는 플레이스테이션이 첫선을 보였다. 개발부장, 부사장을 거쳐 99년에 “나밖에 없다”며 사장자리에 올랐다. 최연소 소니집행임원이기도 하다.PS2공세로 SCE가 노리고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 단순한 게임기 메이커에서 탈피, 플레이스테이션의 산업화를 추진한다는 전략이다. 우선 PS2를 바탕으로 하여 게임산업 이외의 부문으로까지 관련사업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그 무기는 로열티의 수입이다. 지금까지 SCE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판매를 통해 대부분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PS2사업을 통해 처음으로 독자적인 소프트웨어 개발머신을 소프트웨어 메이커에 공급하기 시작했다.소프트웨어 개발머신을 기초로 하여 만든 독자서버를 영화관련기업에 판매하고 있다. 앞으로는 DVD소프트웨어 메이커로부터도 로열티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DVD소프트웨어상에서 고도의 기능을 실현하기 위해 PS2의 심장부인 신형 반도체칩을 사용하는 DVD소프트웨어 메이커로부터 로열티를 받을 예정이다. 고속인터넷에 PS2를 접속시키기 위해 내년에 발매되는 통신기능첨부 PC카드 판매 때도 로열티를 받아낼 방침이다.◆ 구타라기 사장 ‘업계 이단아’로 불려SCE는 소매점이나 도매점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하고 있다. 소매점에서의 PS2 본체보급률은 92%. 소매점은 대당 약 3천엔밖에 벌 수 없다. 그런데도 플레이스테이션 돗트컴은 정상가격에서 1천엔 할인한 가격에 본체를 판매하고 있다. 수요에 따른 변동가격제를 도입하고 있는 것. “싫으면 점포에서 하드웨어를 팔지 말라는 SCE로부터의 메시지”라는게 게임전문점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소프트웨어는 인터넷을 경유, 다운로드로 판매될 수 있지만 하드웨어를 팔기 위해서는 점포가 필요하다”는 통설을 깨뜨린 것이다.모회사인 소니로부터 독립,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는 것도 SCE의 노림수의 하나다. SCE는 올1월 소니의 완전한 자회사로 편입됐다. 그러나 소니의 인터넷 판매 사이트에는 PS2를 공급하지 않고 있다. 재생기능이 향상될 경우 이용자는 소프트웨어를 교체하기만하면 된다. 소니를 비롯한 가전메이커의 DVD플레이어를 완전히 제압하겠다는 것이다.구타라기사장은 ‘소니의 세 악역’‘업계의 이단아’‘일행에서 떨어진 새’‘버릇없는 놈’ 등등 수많은 별명을 갖고 있다. 주변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구타라기의 성공은 오가 소니회장의 특별한 배려 덕택이다”“시류를 잘 탔기 때문이다”라는 야유를 받기도 했다. 반도체업계에서도 이단아로 이름을 떨쳤다. 미일 반도체 마찰이 심해진 90년대 초반 통산성 관료가 소니에 미국제 칩을 사용토록 지도하자 격렬하게 반발했다. 소니의 반도체부문 사원들을 늘 심하게 질책했다. 원하는 제품이 나오지 않을 경우 선배도 용서하지 않았다.그는 모회사인 소니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99년3월 그룹재편의 일환으로 소니가 SCE를 자회사화하자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소니)를 아들(SCE)이 돌봐주는 격”이라며 대들었다. 이처럼 모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SCE를 게임기분야 세계 정상으로 키워냈다. 지난 6년 동안 플레이스테이션을 7천만대나 판매, 게임기시장을 사실상 평정했다.구타라기사장이 플레이스테이션 산업화를 선언, 강공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모기업 소니도 SCE지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SCE를 시장개척의 선봉장으로 내세워 그룹성장의 원동력으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PS2를 능가하는‘X박스’로 SCE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을까. 세가와 닌텐도가 SCE를 어떻게 추격할 것인가. 게임기업계가 전운에 휩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