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기업의 상징인 ‘현대왕국’은 과연 해체의 길을 걸을 것인가.5월 마지막날. 정주영 명예회장이 친필사인하고 김재수 현대구조조정위원장이 대독한 정회장 3부자의 경영일선퇴진 소식은 재계는 물론 나라 전체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현대가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던 만큼이나 한국식 재벌체제의 마지막 보루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게다가 오너 3부자의 ‘동반퇴진’ 시나리오는 정주영 회장 측근을 비롯해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파격적인 조치. 오너의 한마디가 그룹의 생사까지 결정하는 것이 재벌그룹의 생리라고는 하지만, ‘사망선고’까지 스스로 할줄은 몰랐다는 놀라움과 더불어 과연 ‘왕회장 답다’는 역설적인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정회장 일가의 경영일선 퇴진을 둘러싼 파문의 핵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번째는 정씨 일가가 현대그룹 운영에서 ‘진짜로’ 완전히 손을 뗄까 하는 것, 다음은 이번 퇴진이 갖는 의미 및 다른 재벌그룹에 미칠 영향이다.우선 정주영 명예회장의 선언대로라면 현대그룹은 이제 ‘오너경영’ 체제에서 벗어나 전문경영인체제로 거듭나게 된다. 김재수 현대구조조정 위원장은 3부자의 경영일선 퇴진 선언문 대독에 이어 “이날부터 ‘현대’라는 그룹이름은 일체 사용하지 않고, 정주영 명예회장 일가의 직함인 명예회장과 그룹회장 호칭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이사직에서도 물러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현대그룹 37개 계열사는 전문경영인들의 책임 아래 스스로 ‘살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한국재벌사 큰 획 긋는 계기 기대그러나 현대가 진정한 전문경영인 체제로 나아가는데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우선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정 명예회장의 ‘동반퇴진’ 발표에 불복, 이사회를 통해 자동차회장으로서의 현행 경영체제를 고수할 것임을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록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고는 하지만, 정씨 일가가 실질적인 기업 소유주로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정명예회장은 실제로 퇴임발표 당일 “나는 뒤에서 감독만 할 것”이란 해석의 여지가 있는 말을 남겼다.이런 몇몇 의혹에도 불구하고, 정명예회장 일가의 동반퇴진 선언은 한국재벌사에서 ‘소유와 경영의 완전분리’를 최초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97년 기아에서 지난해 대우에 이르기까지 30대 그룹들이 잇달아 무너지면서 한국의 재벌시스템은 한국경제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암적인 존재’로 변했다. 그러나 그 ‘암’을 스스로 잘라내려는 그룹은 없었다. 그만큼 ‘아픔’이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대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룹경영권을 둘러싼 ‘왕자의 난’ 이후 ‘황제식 경영’의 폐해에 경각심을 느낀 투자자들이 현대그룹에 등을 돌리고, 심각한 자금난을 겪은 것이 ‘백기’를 들게 된 주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여기에는 정부가 암암리에 오너퇴진 압력을 가한 결과라는 관측도 있다.한국경제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재벌체제에 대한 존재가치가 어느 때보다 의문시되고 있는 이때 ‘왕회장’의 퇴진선언은 53년의 역사를 가진 ‘현대왕국’의 해체 못지 않게, 한국재벌사에 큰 획을 긋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한국의 독특한 족벌경영 그룹체제로 옥스퍼드 사전에까지 올라 있다는 ‘재벌(Chaebol)’이란 단어가 또 다른 뜻 혹은 ‘추억속의 단어’가 될 날이 현대로 인해 앞당겨질지 주목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