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 소원은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다섯시에 퇴근해 발 닦고 침대에 누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종일 책을 읽는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삶이란 없다고 생각했다.”작가 장정일이 쓴 <독서일기 designtimesp=20288>의 일부분이다. 지식과 감동을 얻는 가장 중요하고, 때로 유일한 창구가 책이었던 시절에 성장한 인물의 이야기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이상 책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제 ‘행복한 책읽기’의 기억보다는 영화보기의 추억을 떠올리며 <시네마천국 designtimesp=20289>에 공감하는 영상세대, 컴퓨터를 벗삼아 자란 인터넷세대들로 정보의 주요 소비자층이 교체되고 있다. 출판 시장은 해마다 하강곡선을 그리고, 대학·인문학의 위기와 함께 지난 몇세기 동안 대표 콘텐츠였던 책은 독점적인 지위를 내줘야 할 시기를 맞았다.영업 현장에서는 이같은 사정을 피부로 느낀다. 김영사 마케팅팀의 신창우과장은 “요즘 도매상에서 월 1억원 이상을 수금해가는 출판사가 60개도 안된다”고 말한다. 투입한 제작비와 광고비에 따라 다양하기는 하지만 1만원 안팎의 단행본의 경우 2천여권을 팔아야 일반적인 손익분기점에 도달한다는 것이 일반론인데, 2천권이 팔리는 것은 전체 출간되는 서적의 20%에도 미치지 못한다.출판사의 수도 줄어들고 있다. 전체 등록출판사는 해마다 늘어 99년말 1만1천5백개에 이른다지만, 실제 운영되는 출판사는 갈수록 줄어든다. 출판사 설립은 신고제로, 새로 문여는 곳은 계속 등록하고 문닫는 출판사는 폐업 신고를 하지 않는 탓이다. 정확한 수치 파악이 불가능하지만 1년에 한권 이상의 책을 내 실제로 회사가 운영되는 곳은 80%도 안된다고 출판업계에서는 말한다.서점가도 마찬가지다. 97년 5천4백여곳, 98년 5천1백여곳이던 서점은 99년에 4천5백곳이 됐고, 올해도 감소세는 누그러들지 않는다. 소매상의 폐업은 곧장 출판사의 반품 증가로 이어져 관계자들은 한숨을 내쉰다. 대형서점은 작년보다 전체 판매량이 12~13% 증가했지만 지방 소형서점들의 매출은 뚝뚝 떨어진다.이와중에 인터넷서점만은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아직 인터넷서점의 수익구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외형만큼은 놀라운 속도로 커졌다. 숫자도 현재 1백50여개로 늘어났으며 이들의 매출이 전체 책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를 넘어섰다.◆ 매출도 줄고 출판사수도 줄고IMF 이후 지난 2년간 종적을 감추었던 밀리언셀러가 양산되는 등 서점가에 활기가 돈 것도 사실이지만 베스트셀러가 등장했다고 출판 자체가 활성화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특히 전통적으로 출판 시장에서 가장 큰 위치를 점유했던 소설 등 순수문학과 인문, 사회과학서 시장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 그 자체다.대한출판문화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2000년1월부터 9월까지 출협을 통해 납본된 도서의 발행 종수는 2만6천4백37종으로 전년 동기 대비 3.0%가 감소했다. 발행 부수는 8천5백3만3천2백3부로 집계돼 전년 같은 기간(9천63만5천9백86부)에 비해 6.1% 줄었다. 만화, 아동 등을 제외하면 발행 부수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줄어들었다.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은 공급자들이 독자의 달라진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아날로그 시대는 분절화된 지식이 각광받았다. 책은 장과 절로 구분되어 있었고, 이때 인기 필자이던 대학 교수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는 전체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요구된다. 한소장은 “국내에는 이같은 관점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필자가 별로 없고, 출판사들의 순발력과 변화 의지도 약하다”며 “특히 요즘 인기가 있는 경제 경영서의 90% 이상이 번역서 일색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출판사들의 일차적인 대응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때문에 인문학으로 이름을 떨친 출판사, 새로 생기는 출판사들이 예전에 하찮게 보았던 경제·경영·실용서와 아동물 시장에 뛰어들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방편으로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 제공자로 거듭나기 위한 시도들도 이뤄지고 있다. ‘e-북’이다.디지털 시대는 ‘내용’뿐 아니라, 유통과 새로운 형태의 마케팅 등 내용밖 구조에도 영향을 미쳐 일대 격변이 예고되고 있다. 그 첫번째는 도서정가제라는 뜨거운 감자다. 출판사, 서점과 도매상, 인터넷서점 그리고 소비자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와 입장에 따라 끝없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공청회, 토론회가 잇따라 열렸지만 어느 자리에서도 묘책은 나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출판계는 변화의 격랑을 헤쳐나가야 할 상황이다.과연 미래는 없는가. 정보 혁명의 와중에 새로운 제자리를 마련할 것인가. 출판시장은 지금 ‘시험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