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부진의 굴레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허약체질의 일본 유통업체들이 거대 자본과 과감한 판촉전략그리고 초염가 가격으로 무장한 다국적 자본의 공세를 어떻게 막아낼지 관심거리다.일본을 여행하면서 쇼핑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를 던지는 대목이 몇가지 있다. 편의점이건 슈퍼마켓이건 유통업체 매장마다 구석 구석까지 가득찬 종업원의 친절과 청결이 그것이다. 한술 더 떠 자로 잰 듯이 잘 정돈된 상품의 진열상태도 낯선 여행자들로 하여금 ‘역시 일본’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하지만 국민들 모두가 천부적 장사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는 일본에서 유통업체들의 이같은 매너와 매장관리는 새삼스러운 것이 못된다. 오히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아 도태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24시간 쉴새 없이 벌어지는 업체간 가격전쟁은 유통업체들을 불안과 긴장으로 떼밀어넣기에 충분하다. 전문가들은 그래서 일본 유통시장이 외국 상품과 자본의 상륙을 허용치 않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고 입을 모은다.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대리점, 도매상등의 중간 유통조직과 신뢰, 신용을 중시하는 인간관계도 외국업체들의 일본 시장 접근을 허용치 않는 장애물로 손꼽힌다.그러나 일본, 그중에서도 심장부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 일대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외국자본의 대공습경보가 내려졌다. 프랑스, 미국, 영국 등 구미국가를 중심으로 한 다국적 거대 유통자본의 상륙 때문이다. 일본 매스컴은 다국적 초대형 유통기업들의 일본 진출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과 관련, 도쿄 일대(도쿄는 항구임)에서 지금 걸프(灣岸)전쟁이 터졌다고 법석을 떨며 싸움의 결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프랑스계 할인점 까르푸가 도쿄 인근 마쿠하리에 세운 일본 1호점 매장 내부.‘유통 걸프전 터졌다’ 매스컴 호들갑일본 매스컴의 보도태도는 호들갑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치다는 인상마저 줄 수 있다. 구미 외국업체들이 매장을 한 두개 연 것 가지고 전쟁이라는 단어까지 동원한다는 것은 냉정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최근 일본에 상륙한 외국 유통자본의 ‘질’과 ‘양’을 따져 보면 일본 업체들의 긴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현재까지의 판세로만 본다면 일본 시장 공략의 선두 주자는 단연 할인점업계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프랑스의 까르푸와 미국의 코스트코 홀세일이다. 이들 업체는 도쿄역에서 전철로 40~5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치바켄의 마쿠하리 신도심에 지난해 말 잇달아 초대형 점포를 열고 일본 유통업체들과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12월8일부터 영업에 들어간 까르푸는 첫 점포를 4층 건물에 9천73평의 매장면적을 가진 매머드급으로 오픈했다. 일본 2호점을 마쿠하리에 개설한 코스트코 홀세일은 까르푸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일본 업체들을 긴장시키기 족한 5천평 정도의 매장면적을 갖추고 있다.점포 수로만 본다면 다국적 유통업체들이 일본 시장에 몰고온 태풍은 영향력이 약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일본 유통업체들과 매스컴은 그러나 싸움이 벌어진 지역이 갖는 상징성과 소비자들의 반응, 그리고 다국적 유통자본이 앞으로 펼칠 전략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마쿠하리는 땅값이 싼데다 대형건물 신축이 용이해 유통업체들의 점포개설 후보지로 각광을 받아 왔다. 따라서 최근 수년간 일본업체들의 출점도 러시를 이뤄 타지역에 비해 업체간의 가격전쟁이 유난히 치열한 곳으로 소문나 있었다. 일본의 간판급 할인점업체중 하나인 쟈스코는 이곳에 아예 본사를 두고 일선 점포들의 전투를 지휘해 왔다. 또 일본의 최대 유통업체인 이토요카도는 마쿠하리점의 중요성을 의식, 전사적 영업력을 집중시키며 전략적 점포로 육성해 왔다. 지난해 12월1일에는 일본 자본이 세운 대형 쇼핑센터 ‘하이퍼 몰 메르크스’가 문을 열며 고객확보 싸움에 이미 회오리 바람을 몰고 온 상태다.그런데도 까르푸와 코스트코 홀세일은 다른 곳을 마다하고 일본의 최강자들이 버티고 있는 마쿠하리에 뛰어들어 한판 싸움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적진 한복판을 주저없이 택한 까르푸와 코스트코 홀세일은 자신들의 대공세로 벌써부터 일본시장에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다니엘 베르나 까르푸회장은 개점 직후 일본 보도진들과 가진 회견에서 “까르푸의 상륙으로 인근의 물가가 내려가는 징후가 뚜렷하다”며 강한 자신을 보였다.일본 유통업체들은 두 외국 유통업체중에서도 외형으로 전세계 2위를 달리는 까르푸의 동향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동야’로 불리는 중간 유통조직의 결속력과 파워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막강한 일본에서는 이를 통하지 않을 경우 제조업체들이 판매에 상당한 애를 먹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자연 일선유통업체와 제조업체들의 직거래도 적지 않은 제약을 받고 있다. 또 이로 인한 부대비용이 가격거품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는 비판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까르푸 역시 이같은 점을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까르푸는 취급상품의 95%를 일본 시장에서 조달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제조업체들과의 직거래 비율은 55% 정도로 묶어 두고 나머지는 동야를 통해 구입하겠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메이커와의 직거래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의사도 분명히 했다.공격적인 영업 및 상품조달 방식이 기존의 상관행 및 거래방식과 마찰을 빚을 경우 회사 이미지에 좋을 것이 없다는 전략을 바탕에 깔고 있는 셈이다.마쿠하리 지역 외자태풍 진원지하지만 일본 유통업체 관계자들은 까르푸의 점포가 계속 늘어나고 거래규모가 커질 경우 언젠가는 직거래 중심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치고 있다. 까르푸는 이미 생선 등 신선식품은 전체의 4할을 산지에서 직거래 방식으로 조달해 경쟁업체들보다 10~15% 싸게 팔아 일본업체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또 마쿠하리 지역에 머물지 않고 올해는 도쿄 인근과 오사카에 2, 3호점을 추가로 오픈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어 일본 시장을 강타한 외자(外資)태풍의 진원지가 될 것이 확실해졌다. 마쿠하리가 속해 있는 치바켄 지역의 치긴종합연구소는 다국적 유통업체들이 잇달아 진출한 것과 관련, 까르푸 등 4개 대형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인근 도시들로부터 마쿠하리 신도심으로 이동할 소매업 매출이 연간 6백억엔대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한편 일본 유통전문가들은 다국적 유통자본이 일본을 덮치기 시작한 시점과 관련, 일본의 대형업체들이 그 어느 때보다 곤경에 빠져 있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일본형 유통혁명의 기수를 자처하며 PB(자체상표)상품으로 가격파괴 돌풍을 일으켰던 다이에가 무분별한 확장과 차입경영으로 최악의 곤경에 빠진 상황이 다국적 자본의 움직임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경영실패로 오너(나카우치 이사오회장)퇴진의 비운까지 겪게 된 다이에는 2조4천억엔대의 산더미 같은 부채에 짓눌린 나머지 은행들의 출자전환과 협조융자로 연명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관련, 요네구라 세이이치로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 교수는 “월마트보다 소매업에 먼저 뛰어든 다이에가 무너진 것은 변화에의 대응을 외면한 결과”라며 일본 유통업체들의 무사안일을 비판하고 있다.외국 유통자본의 일본 대공습은 까르푸, 코스트코 홀세일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세계 최강자인 미국 월마트도 신년 벽두부터 일본 공략을 선언하고 나섰다. 월마트는 올 여름까지 일본법인을 설립하고 2002년까지는 연면적 1만5천㎡의 초대형 점포를 세우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월마트는 첫점포 후보지로 나고야와 마쿠하리 두곳을 꼽고 있으나 수도권 지역이 갖는 중요성을 감안할 때 마쿠하리에 세울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일본은 대형 슈퍼업체들의 매출이 23개월 연속 뒷걸음질을 치는 등 소비부진의 굴레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대 자본과 과감한 판촉전략 그리고 초염가의 가격으로 무장한 다국적 자본의 공세를 허약체질의 일본업체들이 어떻게 막아낼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