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 거물들 제작주문 줄이어…"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구두 20여년 수선, 깊은 인상"

“지난 92년 대통령선거 투표 이틀 전이었을 거예요. 회장님(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 비서가 다 낡은 구두 한 켤레를 갖고 왔습니다. 70년대 중반 제가 만든 것이었지요. 갖고 온 구두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는 줄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두 갑피가 헤어질대로 헤어진데다 구멍이 여기저기 나 있고 밑창은 닳아 발 모양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비서 말이 그냥 수선만 해달라는 겁니다. ” 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에 대한 나성실(58) R.SS 잉글랜드 사장의 추억담이다. 나사장은 지금껏 구두 밑창이나 굽을 바꿔준 적은 있지만 구두 갑피를 기워준 것은 고 정명예회장이 처음이었다고 회고한다. 고 정명예회장이 그만큼 검소했다는 얘기다. 나사장이 고 정명예회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인맥 등 배경이 아니라 주문화 제작 노하우가 당대 최고였기 때문이었다.나사장은 73년 가죽계통의 사업을 하다가 주문화사업으로 바꾸면서 지금의 회사(당시 구두점)를 만들었다. 나사장은 “구두 디자인을 재미있게 하면 뭔가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만을 갖고 이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자 구두는 검정색과 밤색 구두 등 딱 두가지로 단순했다. 나사장은 그동안 단조로웠던 구두에 변화를 주면 엄청난 수요가 일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나사장은 먼저 구두 색깔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소털색, 탄색(밝은 갈색), 밀감색, 초록색 등 다양한 색깔의 구두를 선보였다. 경기가 탄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밝은색이 향후 패션을 주도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리고 완전히 낡아야 구두를 바꾸던 시대는 지나가고 다양한 구두를 갖추고 패션에 따라 갈아 신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직감도 작용했다.이 직감은 적중했다. 컬러풀한 구두로 고객들이 몰리면서 매출이 기존 검정 및 밤색 구두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고급식당가에 손님들이 벗어놓은 신발의 50% 이상이 나사장이 손수 만든 것일 정도였다고 한다.그 뒤 세계의 구두패션 흐름을 알기 위해 조선호텔 커피숍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곳을 찾는 외국인들의 구두를 스케치북에 담기 위해서였다. 구두전문지 등 책만 보고 구두를 만들면 70%는 실패한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현장 확인에 나선 것이다. 나사장은 이렇게 담은 외국인들의 구두그림을 토대로 다양한 패션의 구두를 만들어냈다. 자연히 그의 구두점은 국내 구두패션의 근원지가 됐다. “처음엔 다른 구두점들이 ‘과연 저런 구두가 팔릴까’라며 반신반의해 내 구두점을 4∼5년 동안 지켜보다가 따라왔지만 내가 대박을 터트리는 것을 보고 난 후 곧바로 따라 만들더군요.” 나사장의 구두점이 유명세를 타면서 ‘거물’들이 몰려들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야당총재 시절의 김대중 대통령 등 국가수반들이 구두를 주문해갔고 70년대 최고 스타가수인 남진 나훈아 등도 나사장의 구두점을 찾았다. 물론 지금도 정재계 유명인사들은 나사장을 찾는다.70년대 ‘패션화’로 구두시장 ‘싹쓸이’고 정명예회장이 나사장의 구두점과 인연을 맺은 것은 70년대 중반. 당시 그는 바쁜 일로 점원을 보냈는데 입이 크게 벌려진채 다물지도 않고 돌아왔다고 한다. 고 정명예회장의 발 사이즈가 당시 최고인 3백㎜에 달했기 때문. 70년대 한국남자의 평균 발 사이즈는 2백55㎜였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고인의 발은 ‘항공모함’이나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이즈의 구두 한켤레를 만드는데 필요한 가죽량이 2.5∼3평(1평은 30㎝×30㎝)이지만 고 정명예회장의 구두는 가죽 소모량이 60%가 늘어난 4.5평이었다 “당시 정명예회장은 구두 세 켤레를 주문했습니다. 그것도 일반인들이 신는 싼 구두를 샀지요. 비서 말이 값이 비싸면 (고 정명예회장이) 안산다고 하더군요. 그리곤 더 이상 주문이 없었습니다. 그 세 켤레 구두로 평생 헤어지면 수선해서 신었으니까요.”올 유행하는 구두패션은 무엇일까. 나사장은 밑창이 우레탄으로 편하면서 자유롭게 신을 수 있는 구두가 주류를 이룰 것으로 전망한다. 반대로 정통파 구두는 퇴조할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다만 경기가 나빠지면서 구두 선호 색깔이 다시 검정색과 밤색계통으로 회귀하고 있다.나사장은 요즘 고민에 빠졌다. 경기도 좋지 않으려니와 구두 제화공들이 눈을 씻고 봐도 없고 광우병 및 구제역 파동으로 소가죽, 양가죽 등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등 3중고에 빠졌기 때문이다. 구두경기는 지난해부터 한치 앞도 못 볼 정도로 나빠졌고 구두제화공들의 경우 신인들이 배출되지 않아 회사 제화공들의 평균연령이 45∼55세로 높아져 인건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고 한다. 또 유럽 등지에서 광우병, 구제역 파동으로 소와 양을 대량으로 태워 없애기 때문에 구두제작용 가죽물량이 거의 없는 데다 위기를 직감한 이탈리아 구두제작사들이 세계를 돌며 가죽들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바람에 국내에 들어올 물량이 크게 줄었다.이에 따라 나사장은 올 가을엔 ‘가죽파동’으로 구두 및 기타 피혁제품들의 값이 크게 뛰거나 아예 찾아보기도 힘들 것이라며 70년대 후반에 한참 팔렸던 합성가죽 구두가 다시 유행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팁역대 대통령부터 외국 VIP까지 ‘애용’주문제화 명인 나성실 잉글랜드 사장을 찾은 유명인들은 연예인에서부터 역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나사장은 “역대 대통령들은 공히 모두 국산구두만을 고집했고 디자인도 튀지 않는 정통파구두를 좋아했다”고 소개했다. 이들 중 전두환 전대통령은 7년 동안 한가지의 정통파 디자인만을 고수했다고 한다. 전 전대통령은 해외출장 중에는 한 켤레의 구두를 여벌로 갖고 다녔다.나사장은 전 전대통령 및 노태우 전대통령이 해외출장 길에 올랐을 땐 혹시 구두로 인한 사고가 나지 않을까 염려해 귀국 후 비행기 트랩에서 내릴 때까지 텔레비전 앞에서 마음을 졸였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이처럼 대통령들이 애용하다보니 나사장의 구두가 방한한 외국 귀빈들의 선물용으로 자주 이용됐다고 한다. 나사장은 70년대 초반 방한한 아프리카 레소토공화국 대통령 및 수행원 20여명에게 일명 ‘빤짝이 구두(에나멜을 칠한 구두 앞 뒤로 금쇠줄을 박은 것)’를 선물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이들은 특이한 구두를 보고서는 자기 나라에서도 이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나사장에게 여러차례 했었다는 것.경제계에선 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을 비롯해 많은 인사들이 찾고 있다.나사장이 만든 가장 큰 구두의 소유자는 미국 프로농구 선수 압둘자바. 그의 발 사이즈는 4백㎜로 처음엔 한 켤레의 구두를 신어보고선 나중에 열켤레를 더 주문했다고 한다.연예인들 중 나훈아 남진 등 70년대 스타들은 지금도 자신을 찾고 있으나 요즘 젊은 연예인들은 파격적인 신발전문점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게 나사장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