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액 1백30억원, 당기순이익 33억원. 안철수연구소가 지난해 거둔 실적은 평범한 중소기업체 수준이다. 코스닥에 등록하는 올해 매출목표도 3백50억원을 넘지 않는다. 영업실적으로 보면 다른 등록업체들과 비교해 눈여겨볼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데 사람들은 이 회사 사장인 안철수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칭찬한다. 서울대 의대 출신의 벤처사업가라는 것 때문일까. 술수와 작전이 난무하는 벤처업계에서 묵묵히 정직하게 승부하는 안철수식 원칙 때문인가. 아니면 설립 이래 한번도 적자를 내본 적이 없는 경영실적 때문인가.아마 이 세 가지 이유가 적당히 버무려져서 안철수 찬양론이 나오는 것일 게다. 벤처거품시대엔 실적 경영의 표본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영자들에겐 도덕경영의 대표자로, 그리고 사장의 독단보다 회사의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원칙경영의 주창자로 그는 알려져 있다.서울대 의대 출신 벤처사업가그러나 시장은 생존하는 자에게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준다. 오늘 백 번의 찬사를 듣는 것 보다 내일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퇴보하고, 퇴보하다 보면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안사장 앞에 놓여 있는 시장은 어쩌면 냉혹하고 잔인한 CEO의 이미지와 그런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선 벌써부터 안사장의 도덕경영은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예측을 내놓는다. 그가 주목하는 시장과 고객의 변화도 안사장에게 적극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IT시장조사기관인 IDC에 따르면 세계 정보보호 산업의 규모는 지난 99년 80억달러였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엔 2백20억달러로 늘어난다. 연평균 31%씩 고속성장하는 셈이다. 특히 아시아 인터넷 시장이 해마다 40%씩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인터넷 보안시장 역시 커질 것으로 보인다. 방화벽 침입탐지시스템 접근제어 공개키시스템 보안카드 등 새로운 보안시장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동시에 통합되는 추세다.안사장이 백신업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통합보안업체로 가겠다고 공언한 배경은 이처럼 시장이 다양화되면서 급팽창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안분야 업체들을 인수합병(M&A)하고 조인트 벤처를 세우는 것도 이런 시장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안사장은 그의 최근 행보를 ‘공격적 경영’보다 ‘적극적 경영’이라고 설명한다.그가 걱정하는 것은 외국업체의 식을 줄 모르는 공격적 경영과 발빠른 대응이다. 4백50개에 달하는 세계 보안업체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시장팽창에 대응하고 있다. 수백명의 엔지니어들이 10여년간 방화벽(Firewall)만 연구하는 업체도 수두룩하다. 전문화하면서 서로의 장벽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지난 4월 세계 보안업체들이 모인 RFA컨퍼런스에 참가한 안사장은 “3년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국내시장에서도 생존할 수 없다”는 비장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세계 시장은 몇몇 거대 보안업체들에게 장악되고 있으며 이들의 영향력에서 한국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통합보안업체 변신 선언반면 국내 보안시장은 2백개의 업체들이 난립해 있는 상태다. 정보공유는커녕 누가 어떤 경쟁력을 갖춰 사업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다. 영세한 업체들은 좁은 시장에서 생존하기 바쁘다. 이런 이유로 국내 보안업체들의 단합이 요구되고 있다. 올 하반기부터 이합집산을 통해 보안시장이 일대 격변기에 돌입한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시장을 주도하는 업체도 나타나고 방향도 잡힐 것이다. 안사장은 “누군가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하고 서로의 실력이 상생할 수 있는 전략과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그가 주목받는 또다른 요인은 국내 최대 컴퓨터 백신업체를 경영한다는 점 때문이다. 백신 매출규모로 따지면 세계 6위. 물론 앞서가는 외국계 업체들과 매출규모면에서 견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백신을 직접 개발한 업체는 세계적으로 몇 개국에 불과하다. 전자산업으로 세계 경제 대국 반열에 오른 일본도 외국산 백신주사를 맞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산 백신주사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국내 사정은 다르다. 국내 백신주사가 있다. 특히 한 국가의 보안산업이 막대한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 백신업체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이미 중국 대만 등에선 컴퓨터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는 교란작전을 세우고 있으며 미국 등 선진국은 정보보안 작전이 국가의 중요사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바이러스전에서 지면 전쟁에서 지는 것만큼이나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안연구소 백신 매출규모 세계 6위이런 가정은 더 심각하다. 사이버 아파트의 회로망에 해커가 침입했다고 가정해 보자. 게다가 이 해커는 이 집에 적개심을 품고 있다. 이자는 집에 침입하지 않아도 모바일이나 디지털기기를 통해 집 내부 회로에 접속, 도시가스를 켜놓을 수 있고 폭발시킬 수도 있다. 이쯤 되면 가정의 보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하고 남는다. 인터넷과 디지털시대에 보안산업의 중요성은 이런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5척 단신인 안철수 사장의 어깨에는 이렇듯 육중한 책임이 지워져 있다. 직원수도 이미 2백명에 육박한다. 여기서 멈추면 실패다. 끊임없이 회사의 성장엔진을 찾고 비전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직원들과 공유해야 한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에게 “앞만 보고 달릴 것”을 주문한다. 뒤 돌아보지 말고 오직 생존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란 뜻을 안철수도 잘 알고 있다. 그가 이런 부담을 즐길 수만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이다.안철수 사장의 우연, 필연 그리고 숙명 스토리88년 PC바이러스 첫경험 ‘진로 수정’88년7월. 누구에게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있다. 사람에게서 또는 책 속에서 영화의 한 장면에서 우린 우연히 자신의 운명과 마주설 때가 있다. 이걸 운명의 만남이라고 하나.안철수 사장은 서울대 의대 박사과정에 다닐 때 ‘브레인(Brain)’ 바이러스를 만난다. 미생물학 시간에 배운 바이러스가 컴퓨터 속에도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한 ‘호기심쟁이’에게 이 만남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88년7월 밤을 새워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백신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급기야 의학도의 꿈을 접는다.95년2월. 브레인 바이러스 퇴치를 시작으로 컴퓨터 의사 안철수는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기 위해 꼬박 7년을 바친다. 낮에는 의학공부, 밤에는 컴퓨터 공부로 몸을 혹사시켰다.호기심과 집중력으로 빠르게 전문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건강상태는 그와 반대로 달렸다. 아마 서울대 의대 후배인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몰랐다.이즈음 한글과컴퓨터 이찬진 사장(현 드림위즈 사장)은 그에게 창업의 길을 제시한다. 바이러스 퇴치 공익법인을 구상했던 안철수는 현실적인 벽에 부닥쳐 이 방법을 포기하고 한컴의 연구소 형태로 창업하게 된다. 이날이 95년 2월. 박사에서 연구소 소장으로 변신한 날이기도 했다. 그는 점점 이 일이 필연처럼 느껴졌다.2001년7월. 창업한 뒤 안철수는 경영자로서 수업받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려면 확실히 하자는 생각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MBA스쿨에 입학한다. 꼬박 2년을 공부한 뒤 97년5월 기술경영학 석사를 손에 쥐었다.공부에만 몰두한 시절은 아니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e메일과 전화로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연구소 일을 챙겼다. 이틀에 한 번 씩 밤을 새는 고단한 길이었다. 이같은 그의 열정과 연구소를 지킨 직원들의 노력으로 해마다 흑자를 냈다.2001년7월께 안철수연구소는 코스닥에 등록할 것이다. 의대생에서 컴퓨터 의사로 그리고 벤처창업에서 코스닥 등록까지 그는 보이지 않는 숙명의 손에 이끌려 이곳까지 뛰어왔다. 어떻게 보면 잘 포장된 길을 걸어온 듯 보인다. 누구에게나 이런 길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은 그가 적극적으로 만든 길이다. 자신의 운명과 정면으로 승부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곳까지 올 수 없었으리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