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별 독립채산제 시행도 적극 추진...전력IT분야, e비즈 집중 육성, 시장 우위 다지기 활발

2000년 1월 한전KDN 신임 사장의 취임식날. 의례적인 인사치레가 오가기 마련인 자리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사장은 식장 연단에서 난데없이 마커를 집어들고 화이트 보드로 다가갔다. 그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그가 정연동(55)사장이다. 정사장은 처음 한전KDN에 왔을 때 직원들에게 ‘이익’ 개념조차 없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아남그룹 등 민간기업에서 경력을 쌓아온 그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그러나 사정을 듣고 보니 직원들이 왜 그러는 지 왜 이같은 구조가 자리잡게 됐는 지 차차 이해가 갔다. 그때까지 공기업 한전의 자회사로서 그저 앉아 있어도 일거리가 있었고 수익이 척척 올라갔다. 직원들 입장에선 그저 사고만 내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월급은 때되면 나오고 진급도 되는 그런 직장이었다.하지만 문제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 한전 자회사인 공기업이라 해도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시기는 머잖아 끝날 것임이 정사장의 눈에 보였다.한전KDN은 92년 한전의 정보통신부문 자회사로 설립된 SI 업체다. 정보 시스템 컨설팅 및 통합운영, 초고속통신사업, 전력계통 자동화 시스템구축, 솔루션 개발 등이 주요 사업 영역. 그간 한전의 정보통신분야 업무를 수주해 다시 소규모 SI업체에 하청을 주거나 직접 맡아하는 방식으로 업무가 이뤄져 왔다. 그러나 공공부문 개혁 정책이 추진되면서 한전의 민영화 계획 등과 함께 수의계약이 금지되는 등 한전KDN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했다.연공서열위주 인사 관행 뿌리뽑아정사장은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즉시 개혁을 시작했다. 98년 한전KDN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구상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사장 취임과 동시 실행에 옮겼다. 맨 먼저 손을 댄 것은 인사 정책.무사안일에 젖어 있고 연공서열위주의 공기업 인사 관행을 뿌리뽑기 위해서 능력과 성과에 따른 인사 정책을 펼쳤다. 6개월 단위로 조직 평가를 시행하고 그 결과를 인사에 가차없이 반영했다. 직급은 높은데 성과가 적은 직원의 경우 지방영업소로 발령을 내거나 보직을 주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고 직급이 낮다 해도 성과를 보여주면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정사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팀별 독립채산제 시행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각 부서가 목표를 정하고 부서장이나 팀장이 인원 예산 등에 관해 자율적인 권한을 행사토록 할 방침이다.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이자 당연히 반발이 뒤따랐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저항에도 부딪쳤다. 안팎으로 거부감도 많았다.정사장은 “생각과 문화를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역시 직원들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거나 냉소적 반응이 돌아올 때였다. “내가 안 해도 누군가 한다” “사장 임기는 3년, 괜히 사장 눈에 띄어 열심히 일했다간 다음 사장때 벼락맞는다”는 식의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정사장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지 이제는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정사장은 어느 정도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자평한다. 지난해와 올해 대형 프로젝트가 줄고 경쟁사는 늘어나면서 시스템 통합(SI)시장에서 다른 경쟁업체들의 매출은 줄고 있는데 한전KDN은 지난해 오히려 늘어난 4천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80%에 달했던 모기업에 대한 매출의존도도 40%까지 낮췄다. 한전 자회사 경영평가에서 사장평가 1위를 받았고 올해 공기업 대표적 경영혁신사례로 꼽혀 산자부 디지털 경영대상도 탔다.그러나 할 일도 많고 갈 길도 멀다. 국내 SI산업은 그룹 계열 SI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다. 현재 국내 SI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 기업군이 삼성SDS LGEDS시스템 쌍용정보통신 현대정보기술 SKC&C 등 대그룹 계열의 SI업체들이다.여기에 정부투자 공기업 내지는 중견 그룹의 자회사 형태를 취하고 있는 포스데이타 한전KDN 신세계I&C 농심데이타시스템, 동양시스템즈 등이 중견기업 군에 속해 있다.금융 의료 등의 전문 분야에서는 KCC정보통신 비트컴퓨터 등을 비롯한 1백50여개 중소 SI업체들이 각종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중간에 끼어 있는 한전 KDN은 앞으로 전문업체들의 도전을 받으면서 그룹계열 대형업체들을 추격해야 하는 형편이다.정사장은 “전력 IT부문 광전송망 및 케이블TV망 분야 패키지사업 인터넷사업, IT컨설팅, 무선통신사업 등 시장경쟁력과 수익성이 높은 사업군을 집중 육성함으로써 시장우위를 공고히 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6천억원 이상의 매출을 실현할 계획이다.80% 달했던 모기업 매출 의존도 40%로 낮춰이의 일환으로 한전KDN은 우선 전력산업 구조개편에 따른 IT관련 사업을 강화할 계획이다. 또 전력 e마켓플레이스 등 전력분야의 인터넷사업과 전력 자회사의 솔루션 및 전력거래 컨설팅사업을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IMT 2000, 디지털 케이블TV, 전력선 통신망 등 거대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신규 통신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핵심 기술 개발에도 투자를 확대할 예정이다.정사장은 “워낙 변화의 속도가 빨라 6개월 이상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좋은 인재를 보유하고 이들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조직을 갖고 있다면 어떤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다” 면서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철밥통을 깨뜨린 남자정연동 지음/삼보아트/278쪽/9천원‘철밥통을 깨뜨린 남자.’ 이 도발적인 제목의 책은 정연동 사장의 좌충우돌 공기업 개혁기다. 재직중인 공기업 경영자로서는 처음으로 책을 낸 것이다. 한전KDN 사장에 취임한 후 회사를 개혁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개혁을 주도한 정연동사장은 공기업 혁신의 우수사례로 한전KDN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CEO로서 우리 기업의 사례를 널리 알리면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악역을 자처하면서 다 내보일 수 없었던 속마음을 전달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직원들에게 그토록 개혁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를 알리면서 미안하고 고마운 뜻을 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정사장의 경영론과 자신의 경험담 등이 실려 있으며 그간 매체에 기고한 칼럼 모음도 포함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