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15일 미국 텔레비전에는 여성과 관련한 나름대로 역사적인 사건이 두가지 일어났다. 첫째는 아프가니스탄여성들의 얼굴이 TV에 비쳐진 것. 카불 등 아프간의 주요 도시에서 탈레반이 퇴각하면서 아프간 여성들이 얼굴을 감싸고 있던 부르카를 벗어던지고 거리에 나온 모습이 처음으로 TV에 방영됐다.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프간 여성들의 얼굴은 새로 찾은 자유의 상징처럼 비쳐졌다.두번째 사건은 바로 몇 시간 후에 이뤄졌다. 아프간 여성들이 얼굴을 감싼 천을 벗어던진 것처럼 미국 여성들이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을 벗어던졌다. 속옷만 걸친채…. 이날 ABC방송에서 방영한 속옷업체 빅토리아 시크릿의 패션쇼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하이디 클럼, 지즐 번드첸, 타이라 뱅크스, 캐롤리나 쿠르코바 등 세계 최정상급 수퍼모델들이 총동원돼 늘씬한 몸매에 아슬아슬한 속옷을 선보였다.공중파든 케이블이든 속옷 패션쇼가 TV를 타고 가정에 중계되기는 미국 역사상 처음이었다. 중계를 한 ABC측에서는 당초 생중계를 고려했다가 ‘혹시’ 해서 아슬아슬한 장면을 편집한 뒤 패션쇼 이틀 뒤에 방영했다. 뉴욕 맨해튼 브라이언트 공원의 천막시설에서 진행된 이날 패션쇼를 가장 앞줄에서 지켜본 <나홀로 집에 designtimesp=21714>의 주인공 매컬리 컬킨은 패션쇼가 끝난 뒤 “빨리 집에 가서 찬물로 샤워를 해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을 정도였다.패션쇼는 한마디로 대성공. ABC방송이 ‘품위를 잃었다’는 방송위원회의 경고를 듣기도 했지만 치솟는 시청률은 방송사나 주최측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90캐럿짜리 최상급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1천2백50만달러(우리돈 약 1백60억원)짜리 브래지어 등은 흥미를 더욱 고조시켰다. 미국 언론들도 연일 패션쇼 사진들을 게재하며 관련기사를 쓰는 등 한동안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아프간 여성들이 ‘자유’를 상징하고 있다면 미국 여성들의 속옷은 무엇을 상징할까. 한마디로 올 겨울 미국 기업들의 마케팅포인트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미국 기업들은 테러와 전쟁으로 소비자들의 구매심리가 잔뜩 얼어붙자 수퍼모델들이나 스타들을 동원해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그중 하일라이트는 역시 ‘섹시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 때문에 올 크리스마스와 연말 미국 소매시장은 어느 해 보다도 섹시한 분위기 속에서 보내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소매업체들은 올해 ‘추수감사절-크리스마스-연말연시’로 이어지는 연중 최대 쇼핑시즌의 매출이 지난해보다 조금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가장 낙관적으로 잡아도 매출이 고작 4~5% 늘어날 것이란 예측이다. 따라서 소비자들을 사로잡기 위해선 이처럼 ‘공격적’인 마케팅이 필요하다는 전략이다. 비싼 모델료를 지불하면서 ‘미인계’를 쓰는 것이 실속없는 엄청난 할인공세보다 실리적이라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빅토리아 시크릿이 TV의 황금시간대에 ‘가장 섹시한 크리스마스 쇼’라는 이름의 속옷패션쇼를 연출한 것처럼 전자제품 소매체인점인 베스트 바이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남성 밴드그룹으로 ‘섹시’함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N싱크’를 동원하고 있다. 유명제품 할인매장인 타겟은 중년층을 겨냥, 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다이아나 크롤 등과 계약을 맺었다.미국 소매점협회의 안젤라 셀던회장은 “지금 미국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마음속에 뭔가 색다르고 특별한 것을 심어주려고 한다”며 “그런 노력이 소매업체들의 제살 깎아먹기식의 가격할인으로 이익이 날아가는 것을 막아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소매광고 및 마케팅협회의 톰 헐러데이 회장도 “요즘같이 어수선한 때에 이런 전략은 정말 현명한 방법”이라며 “소비자들의 반응도 매우 좋은 편”이라고 밝힌다.빅토리아 시크릿지난 3분기(7~9월) 매출이 전년동기보다 5% 줄어드는 것을 봐야 했던 회사로선 뭔가 특별한 카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준비한 게 ABC방송과 함께 제작, 1시간 동안 TV에 방영하도록 한 속옷 패션쇼.회사측은 이날 입장료 등 4백만달러의 수익금은 테러희생자들을 위해 써달라고 뉴욕시에 기부하는 등 혹시 있을지 모르는 선정성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애를 썼다. 일부 가위질이 이뤄졌지만 실제 패션쇼의 90% 가량이 TV로 나갔을 정도로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방송국에서는 이 패션쇼 바로 앞에 방송된 미국 최고의 인기프로 <누가 백만장가가 되는가 designtimesp=21734>라는 프로부터 시청자들을 계속 묶어둘 수 있어 좋았고 회사측도 이날 행사로 엄청난 광고효과를 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회사측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인 숫자를 밝히기에는 빠른 시점이지만 패션쇼 이후 매출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밝힌다.베스트 바이젊은 여성층에 절대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N싱크를 판촉소재로 삼았다. N싱크 멤버 5명의 인형을 각각 만들어 한번에 25달러 이상을 구입하는 고객에게 9.99달러짜리 인형을 무료로 증정한다. 행사기간은 36일간으로 행사기간 중 1주일에 한명의 인형을 구입하면 5명의 인형을 모두 모을수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 판매 수익금중 1백만달러는 테러 희생자 가족들에게 전달할 계획이다.회사측은 인기 그룹 U2도 파트너로 삼았다. U2의 공연을 후원하고 2주 동안 콘서트 DVD를 구입하는 고객에게는 무료샘플을 준다. 마이클 린턴 전략마케팅담당 수석부사장은 “고객들의 관심을 끄는 재미있는 마케팅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타겟주요 고객들이 중년층인 이 할인매장은 고객들을 유혹하기 위해 왕년의 섹시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내세웠다. 1967년 이후 첫 연말연시용 앨범을 매장에서 판매하기로 한 것. 다른 가계에서도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앨범을 살 수 있지만 타겟에서 살 경우 스트라이샌드의 공전의 히트앨범인 ‘God Bless America’를 공짜로 하나 더 준다. 회사측은 또 재즈싱어인 다이아나 크롤의 히트 앨범인 ‘The Look of Love’를 독점 판매하는 등 인기 스타들을 활용한 마케팅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