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말 새천년을 앞두고 서울에서 열린 병원관리 종합학술대회. 이 행사의 화두는 의료서비스, 즉 총체적 품질관리(TQM)와 지속적 품질관리(CQI)였다. 21세기 국내 병원산업을 지탱할 대들보로 두 가지를 지적했다. 의료기술과 함께 경영기술이 병원생존의 열쇠로 부각했다는 방증이다. 조우현 연세대 의대 교수는 “이제는 공급자 중심에서 고객이 요구하는 품질에 초점을 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몇천만 원이나 몇억 원을 투자해 자격증을 취득한 의사 초년생은 또 의료시장이라는 새로운 경쟁에 부딪쳐야 한다. 자본이 부족한 전문의들은 넘어야 할 또 다른 장벽이다. 서울 보건대에서 병원경영을 강의하는 김영훈 교수는 “이제 병원도 바뀔 때가 왔다”며 “이미 오래 전부터 환자들이 우수한 의사와 서비스를 찾아가는 선택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고 의료시장의 변화를 지적했다.바야흐로 병원의 시스템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병원=기업, 환자=소비자’란 인식이 확산되면서 병원들마다 첨단 경영기법을 도입, 좀더 많은 환자(고객)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특히 IMF 이후 경기침체에 따른 전반적인 의료시장 위축과 의약분업이라는 ‘충격’을 받으면서 병원들이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동네 의원와 대형 병원 사이에서 의료전달의 징검다리 노릇을 했던 중형 병원들의 도산 증가가 이를 증명한다.대한병원협회가 2001년 1월부터 11월까지 병원 도산실태를 분석한 결과, 전국 941개 병원 가운데 8.1%인 77개 병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거나 소유권을 이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기관 종류별로는 병원급 의료기관이 663곳 중 11%에 이르는 73곳이 문을 닫았고, 종합병원은 278곳 가운데 4곳이 도산했다. 병원기업의 도산율은 일반기업의 몇 곱절이 넘는 놀라운 기록이다.이에 의료 전문가들은 병원경영 패턴이 공급자(의료기관) 중심에서 수요자(환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하고 예전과 다른 차별화된 병원만의 독특한 마케팅을 펼쳐야 생존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수익성을 담보하면서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병원들의 노력은 전문화 협력과 공생이라는 이슈도 나타나고 있다.병원경영 환자 중심으로 바뀌어안양에 있는 봄빛 병원은 얼마 전까지 1층에 놀이방과 커피숍을 운영했다.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함께 운영한 것이 소아과였는데, 기다리는 어린이를 위해 미끄럼대와 정글짐 등 놀이방을 마련했다. 결국 아이들은 병원에 진료간다기 보다는 놀러가는 것이다. 당연히 산모와 아이들은 이 병원을 찾게 된다.미즈메디 병원은 서구의 전문병원 이상으로 전문화한 것이 특징. 또 고객의 범위를 여성으로 좁혔다. 산부인과를 중심으로 전문병원으로서의 명성을 쌓기 위해 내시경을 이용한 다양한 의료기술도 발표했다. 지역적으로는 부유층과 식자층들이 밀집한 대치동에 자리잡음으로써 지역병원을 이끌고 있다.키닥터는 소아전문 한방병원으로 어린이 환자를 타깃으로 시장을 공략해 성공한 케이스다. 한방으로 키를 키우는 클리닉을 비롯해 어린이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아토피성 피부질환 치료제와 어린이들이 복용하기 쉽도록 만든 무색무취의 한약 제품을 출시해 인기를 끌었다.신촌연세병원은 미세수지접합 분야에서 확보한 명성을 기반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기업형 병원이다. 절단사고가 난 현장에 즉각 출동할 수 있는 응급시스템과 대규모 무료 시술 서비스 등의 지역밀착 마케팅으로 고속 성장하고 있다.한편 병원간 협력을 통한 성공사례도 늘고 있는 추세다. 전문화와 함께 병원간 협력은 그동안 경쟁으로 인해 막혀 있던 의료전달 체계를 확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동네 의원에서 1차 진료를 받은 환자가 중·소형 병원으로 가지 않고 다른 동네 의원을 전전하는 이른바 닥터쇼핑(Dr. Shopping) 현상도 줄일 수 있다.병원협력으로 닥터 쇼핑현상 줄여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인천의료원과 청주의료원. 인천의료원은 2000년 5월 개방병원 제도를 도입한 이후 줄어든 외래환자 수입을 개방병원을 통한 입원수입으로 대체, 경영난을 타개하고 있다. 인천의료원은 올해 전체 의료수입의 35%를 개방병원으로 벌어들인다는 목표다. 병원간 협력과 공생은 개방병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현재 보건복지부가 전국 40여개 병원을 지정해 시범운영하고 있다.개방병원 도입붐과 함께 그동안 환자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왔던 의원과 병원간의 협력 사례가 속속 나오면서 의료시장에 새바람이 불고 있다. 의약분업 이후 전문의 이탈, 환자 감소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병원과 한정된 시장을 놓고 출혈 과당경쟁을 벌여왔던 동네 의원간 ‘윈윈’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하고 있는 것. 대표적인 사례가 개방병원, 콘도미니엄, 조합식 병원들이다.올 5월 오픈 예정인 부산성결병원은 처음부터 개방병원 형태로 설립되는 케이스. 2004년부터 시범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개방병원은 기존 병원에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부산성결병원은 개방병원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이 병원은 입원 수술에 필요한 마취·방사선·임상병리과 전문의사만 있고, 내과 ·외과·정형외과 등 일반 진료과목 전문의사는 동네 의원들을 통해 공급받기로 했다. 200병상을 갖춘 이 병원은 정형외과·내과 특화병원으로 응급실도 동네 의원들에게 개방했다. 이에 따라 부산성결병원과 동네 의원들은 지역내 환자를 두고 경쟁하지 않고 서로 윈윈할 수 있게 됐다.콘도미니엄·조합식 협력모델 등장한때 부도를 맞아 문을 닫았던 병원이 병원내 외래진료 부문을 개업의에게 분양해 주는 콘도미니엄식 병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부천에 있는 늘푸른병원은 올 4월에 15개 외래진료 과목을 개업의에게 분양할 계획이다.300병상 규모의 늘푸른병원은 내과·외과·소아과·치과 등 진료과목을 동네 의원에게 내주고 입원 수술시 필요한 시설을 빌려주는 개방병원으로 운영키로 했다. 늘푸른병원 박철우 이사장은 “임대 분양가를 1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며 “그동안 경험에 비춰 개업의는 월 3,000만원의 순이익이 예상된다”고 말했다.늘푸른병원에 입주한 의원들은 외래환자 진료수입과 함께 입원 및 수술을 통해 나온 수입을 병원측과 나눠갖는다. 늘푸른병원은 총 진료비의 약 30%를 의원들에게 제공할 계획이다.이 병원은 외래과목의 분양 외에도 편의점, 도서대여점 커피숍 등 다양한 부대 시설을 입주시켜 수입을 올릴 예정이다. 박이사장은 부도 전 연 140억원 매출을 올리던 병원을 콘도미니엄식 개방병원으로 전환, 올해 약 200억원의 매출을 목표하고 있다.산부인과 등 전문분야 의사들이 모여 만든 공동 개원의 문제점을 개선한 조합식 병원도 주목할 만하다.사실 공동 개원은 그동안 의료수입을 올리기 위한 환자 유치경쟁으로 내부 갈등을 겪어왔다. 따라서 이를 개선하기 위해 나온 것이 의사 개인들이 지분을 갖고 수입을 공동 분배하는 조합식이다.경북 밀양의 제일의원은 의사 10명이 공동투자해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정조합원 7명과비조합원 3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매달 수입금을 약정한 조건에 따라 서로 나눠갔고 있다. 월급을 주고 남는 금액은 의원 운영비로 적립, 재투자하는 데 사용한다. 제일의원은 이 제도를 97년초 실행해 경기침체 기간인 IMF 때 병원을 신축하는 등 흑자경영을 해오고 있다.한편 의료산업 전문가들은 병원의 궁극적 목표는 의료 서비스에 있다는 점에서 경영활성화가 영리추구의 이윤사업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이평수 보건산업진흥원 보건의료사업단장은 “병원경영 활성화는 병원의 이용자인 국민들이 바라는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효율적으로 제공해 병원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고, 국민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상황으로의 전환과정”이라고 말했다.INTERVIEW김영훈 서울 보건대 교수“이제는 고객을 위한 상품개발할 때”“이제까지 병원은 상품(의료서비스)을 먼저 만들어놓고 환자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객을 위한 상품을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변화의 시점입니다.”국내에서는 드물게 병원경영을 강의하고 있는 김영훈 박사의 지적이다. 연세대에서 병원행정을 전공한 김박사는 “현대 병원경영의 핵심은 변화관리이다. 여기서 변화란 의료소비자의 구전광고 효과를 창출하고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생산수단으로서의 투자 도구”라고 강조했다.서울보건대학의 병원경영 교수이기도 한 김박사는 “변화관리를 위해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변화지향의 사고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그는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급속한 의료환경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을 헤쳐나갈 수 있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김박사는 을지중앙의료원 기획실장을 겸임하며 변화관리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그는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를 중시한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고객만족을 이끌어내야 하며, 이를 위한 수단으로 고객 중심의 사고 즉 마케팅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한방병원 ‘환골탈퇴’환자·질병따라 특화병원 속속 개업병원경영의 변화 바람은 양방(洋方)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다. 한방병원도 2~3년 전부터 양방병원 못지 않은 ‘환골탈태’를 시도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바로 ‘전문화 바람’이다.이런 변화는 양방에 외과·내과·산부인과 등이 있는 것처럼, 한방에서도 이에 걸맞는 전문 분야가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이른바 한방에도 전문의가 출현한 것이다. 키닥터 어린이클리닉처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한방병원을 비롯해 여성 환자들에 특화한 한방병원, 남성전문 한의원 등 치료 대상에 따라 전문화된 병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질병의 종류에 따라서도 세분화된 한방병원들이 생겨났다. 피부질환 전문 한방병원을 비롯해 비만치료, 산후조리, 교정 전문 등 틈새를 공략한 다양한 한방병원들이 나타난 것이다.소아전문만 보더라도 키닥터 외에 함소아도 어린이 고객을 대상으로 특화한 경우다. ‘사랑이 꽃피는 한의원’은 아예 병원 이름부터 시적으로 표현해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다. 서울에만도 이런 소아전문 한의원이 20여곳에 이를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들 소아전문 한방병원들은 아기자기한 실내 인테리어부터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놀이방 시설을 갖추고 꼬마 손님들을 경쟁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여성 전문 한의원도 언제부턴가 하나둘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여성 한의사들이 주축이 돼 설립한 이은미여성한의원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30~40개의 여성전문 한의원들이 생겨나고 있다.서울 성수동에 있는 미래한의원처럼 산후비만을 치료하는 전문한방병원도 생겼다. 이밖에도 꽃마을한방병원이나 십장생한방병원처럼 불임 상담과 클리닉으로 특화한 한방병원들도 있다.드물긴 하지만 남성을 대상으로 한 전문한방병원도 있다. 미스터엠이 대표적인데, 이 병원은 벤처기업들과 제휴해 보양과 스태미나 강화 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까지 운영한다.피부질환을 전문적으로 보는 뉴코아한의원이나 휜 다리 등을 바로잡아주는 교정 전문 한방병원인 헬스메카한의원, 허리 디스크 치료로 이름을 얻은 자생한방병원처럼 특정 질병에 초점을 맞춘 한방병원들도 여럿 있다.작은 키나 비만 등 신체 콤플렉스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한방병원들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서정한의원은 키를, 기린한방병원과 나라한방스포츠클리닉 등은 비만치료와 몸매 관리로 전문성을 갖춘 한방병원들이다.이쯤 되면 한방병원은 침을 맞거나 보약을 지으러 가는 한의원이 아니라 전문클리닉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전문 한방병원들이 늘어나면서 노인이나 중년 부인이 아닌 아이들과 젊은이들까지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됐다.이들 전문 한방병원들은 경쟁업체들까지 하나둘 생겨나면서 한층 더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이유에서 전문한방병원들은 대부분 전문성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브랜드 전략을 구사한다.또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한방병원들끼리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등 갖가지 마케팅 전략도 쓴다. 실제로 여러 곳에서 성공사례들이 나타나면서 한의대생들도 2~3명씩 동업 형태로 벤처식 전문한방병원을 개원하는 일도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