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성과 집착에서 벗어나 장기적으로 고객과의 관계 유지에 주력

뒤늦게 프라이빗 뱅킹(PB) 사업을 시작한 국내 금융회사들이 주로 미국계 증권사인 메릴린치를 벤치마킹한 이유는 메릴린치 본사의 영업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메릴린치는 우선 증권회사의 영업을 고객의 자금규모별로 세분화해 그에 맞는 서비스 수단을 연결해 주는 데서 출발했다. 메릴린치는 지난 99년 ‘By mouse, By phone, By human being’(온라인, 전화, 대면접촉을 적절하게 활용하자)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맞춤서비스를 시작했다.즉 직접 인터넷으로 증권거래를 하고 싶어 하는 고객들에게는 그에 맞는 싼 온라인서비스를 연결하는 것부터 콜센터를 통해 거래하려는 고객, 그리고 일정한 수수료를 부담하더라도 전문가에게 자산운용을 맡기기를 원하는 고객까지 즉시 응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던 것이다.미국 본사에서 이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메릴린치는 지난 2000년 PB 부문 사업을 서울지점에 열었다. 기업고객이나 투자은행 업무에만 주력하던 메릴린치 서울지점은 이때부터 개인 거액고객을 잡는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메릴린치는 단기간의 성과에 급급하지 않고 고객들과 장기적인 유대관계를 맺는 데 주력했다. 이를 위해 전사적으로 철저한 연봉제를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별 재무설계사(FC)들에게 영업개시 후 일정 기간 고정급의 지급을 보장했다.성과가 전혀 없더라도 적지 않은 연봉을 최소 1년은 보장해준 것이다. 또한 FC의 자율성도 최대한 허용했다. 보안문제 정도만 회사에서 간여하고 나머지는 전적으로 FC에게 위임한 것이다.발족 초기부터 메릴린치 PB팀에 합류한 박병립 이사(45·미국 재무관리사)는 “회사에서 고객관리나 자기계발 등에 간여하진 않지만 연봉제인 만큼 스트레스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며 “그래도 1년 정도는 일정한 수준의 급여가 보장되는 만큼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국내 금융회사의 PB를 찾지 않고 굳이 미국계 증권사인 메릴린치를 찾는 사람들은 어떤 점을 중시하는 걸까. 이에 대해 박이사는 “미국 금융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도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외화표시상품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인 것 같다”고 답했다.박이사의 말처럼 메릴린치 서울지점은 고객의 자산을 넣어 운용하는 금융상품을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팀을 별도로 해외에 두고 있다. 주로 홍콩 등지에서 운영되는 상품개발팀은 메릴린치의 글로벌네트워크를 십분 활용, 경쟁우위를 갖추고 있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그래서 개인 해외물이나 외화표시상품에 관심이 많은 거액고객이 메릴린치를 자연스럽게 찾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특히 메릴린치는 파생상품 분야에 뛰어난 노하우를 자랑하고 있어 다양한 헤지수단을 보유한 셈이다.보안문제에도 신경써여기에다 회사에서 엄격하게 보안을 강조하는 점도 고객을 안심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메릴린치는 직원들의 통화내용을 모두 녹음하고, e메일도 검색할 수 있도록 내부관리규정을 만들었다. 옆자리의 직원들끼리도 서로의 고객에 대한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사무실과 상담실의 배치도 고객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동선을 배려해 꾸며놓았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정보가 알려지는 것을 꺼려한다는 현실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고객이 처음 왔을 때의 응대방법도 국내 금융사와 사뭇 다르다. 메릴린치는 일단 고객의 연령분포는 철저하게 무시한다. 대부분의 고객층이 50∼60대로 일정한 데다 다른 금융사에서 어느 정도 자산을 굴린 사람들이어서 나이보다는 다른 요소들을 더 중시한다는 설명이다.즉 금융상품을 운용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먼저 알아본다. 이렇게 리스크에 대한 고객의 태도를 분석한 다음 고객의 수익률 타깃을 개별적으로 제시한다. 여타 증권사 PB지점처럼 고객의 성향을 꼬치꼬치 캐묻는 설문지도 돌리지 않는다.그러나 메릴린치가 장기간에 걸쳐 고객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쏟는 노력은 상당하다. PB 부문을 총괄하는 채현종 상무는 “운용수익률 차이도 중요하지만 고객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평생 혹은 대를 이어서도 고객과 동반자적 관계를 맺는 컨설턴트를 키우는 게 회사의 목표”라고 말했다.따라서 메릴린치는 지점을 떠나면 끝나는 관계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고객들을 메릴린치의 팬으로 만드는 전략을 세웠다. 일례로 메릴린치는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개최, 거액고객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려 한다.석 달에 한 번 정도는 업계의 권위자들을 초청해 시장전망이나 거시경제전망 등 중요한 소식들을 소개해주는 행사를 여는 것이다.물론 메릴린치도 약점은 있다. 미국 본사가 불공정거래로 의심받을 만한 영업관행을 일삼아 최근 1억달러 상당의 벌금을 부과받는 바람에 신뢰도가 위협받고 있는 점은 가장 큰 문제점이다.여기에다 예상보다 자금유입속도가 더딘 점도 고민거리다. 삼성증권의 경우 방대한 지점망을 바탕으로 1년6개월 만에 10조원 가까운 자산을 모았지만 메릴린치는 비슷한 기간에 1조원에 조금 못미치는 자금유치실적을 올렸다.고객 수준을 삼성은 ‘5억원 이상’으로 잡은 반면, 메릴린치는 ‘100만달러’(약 12억원)를 하한선으로 정해 유치실적에 차이가 나는 것으로 풀이된다.PB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메릴린치가 영업을 시작한 건 국내 금융사들과 큰 차이는 없어지금까지의 외형만 놓고 보면 삼성증권 등 국내 금융사들이 우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메릴린치가 장기 전략에 따라 뿌려놓은 씨앗이 싹틀 2005년쯤에도 국내 금융사들이 계속 우위를 점할지 지켜볼 일이다.INTERVIEW 채현종 서울지점 상무“‘고급 재테크’ 전략으로 승부”“경험 많은 거액고객을 상대하려면 개별 FC들이 만물박사가 돼야 합니다.” 채현종 서울지점 상무(38)는 메릴린치 PB 부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를 이렇게 표현했다.채상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고객과의 관계를 얼마나 지속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채상무는 “회사가 고객들로부터 믿음을 얻지 못한다면 고객들은 좀더 나은 수익률을 좇아 금방 떠나버린다”며 “금융시장의 흐름은 물론 다방면의 지식이 많아야 관계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게 지론”이라고 강조했다.메릴린치는 이같은 전략을 세워두고 FC들을 뽑을 때 경력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분위기와 매너까지 보고 선발한다고 소개했다. 그래서 작은 실수는 용납하지만 진실성에 의심이 가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냉정하다.채상무는 “일선 지점의 영업사원과 FC는 뭔가 달라야 우리 회사에 더 많은 고객들이 찾아오지 않겠느냐”며 “삼성은 마케팅과 단기 광고에 주력하는 편이지만 우리는 좀더 장기적으로 한국시장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채상무는 요즘 외화자산운용 문제에 대해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고 있다. 최근 고객들의 관심이 달러동향과 그에 따른 외환시장의 변화에까지 닿아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특히 메릴린치를 찾는 고객들은 외화 관련 상품에 대한 신뢰가 높은 편이어서 해외 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재산을 어느 정도 축적한 분이라면 자산 포트폴리오를 외화자산에까지 확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채상무가 권하는 ‘고급’ 재테크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