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제 354호 (2002년 09월 16일)

통신기기회사로 ‘환골탈태’… 고속성장

기사입력 2006.09.04 오전 11:55

“내가 부탁하는 제품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말로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1991년 9월25일 밤 일본 나고야 시내의 한 조그만 음식점. 나이 서른을 갓 넘긴 것으로 보이는 남자 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주먹을 불끈 쥔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말을 마치고 난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주위를 돌아봤다. 좌중이 숙연해지며 함께 있던 남녀 30여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눈과 얼굴에 꽂혔다.

“알았다. 무엇이든 만들어주마. 한번 해보자고.”

어디선가 맞장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우레 같은 뜨거운 박수가 뒤를 이었다. 박수를 치는 참석자들의 눈자위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꼬박 10년을 거슬러 올라간 이날 모임은 일본 ‘부라더공업’의 직원들이 미국 출장길에 오르는 동료의 장도를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동료들 앞에서 각오를 다진 주인공은 상품기획을 담당했던 나카오 히데오씨. 86년에 입사해 아직 평사원을 벗지 못한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자리 분위기가 말해 주듯 평사원 한 명의 출장환송회가 이처럼 무겁고 숙연하게 치러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이 몸담고 있는 회사 부라더공업이 백척간두의 벼랑 위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나카오 사원은 “회사를 위기에서 건져낼 묘수를 찾아오라”는 특명을 띠고 출장을 떠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라더공업. 중년 이상의 한국 성인, 특히 주부들에게 ‘부라더’라는 회사이름은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태부족했던 60년대 전후, 서민 가정의 재산목록 최상위에 들어갈 만큼 소중한 대접을 받았던 ‘미싱’(재봉틀)의 대표적 브랜드로 ‘부라더’는 한국 성인들의 머릿속에 일찍부터 깊숙이 자리잡아왔다.

하지만 미싱메이커로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정감을 주고 있는 것과 달리 부라더공업이 가지고 있는 실체와 이미지는 엉뚱하게도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일본뿐만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더 널리 알려진 이 회사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정보통신기기메이커다. 정보통신기기 중에서도 팩시밀리와 프린터가 이 회사를 말해주는 간판상품이다.

팩시밀리와 프린터가 부라더를 어느 정도로 먹여 살리는 효자상품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난 95년 이후의 성적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쿄증시에서 부라더의 주가는 지난 7월25일 820엔을 기록하면서 1년 전의 4배 수준까지 도약했다. 이는 과거 10년간의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최고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주가상승률은 74.5%로 세가, CSK에 이어 도쿄증시 전체에서 3위를 차지했다.

2002년만을 놓고 본다면 연초부터 7월 말까지 주가가 2배 이상 뛴 것은 NTN이라는 업체와 부라더 등 단 2개사뿐이다. 도쿄증시의 2002년 주가하락률은 거의 20%에 육박했었다.

영업실적도 주가에 뒤지지 않는다. 정보통신기기의 판매호조를 발판으로 내년 3월 말 결산에서는 매출이 3,900억엔, 순이익은 150억엔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 3월 말에 비해 매출은 2.5%, 순이익은 14.2배가 늘어난 수치다. 순이익은 부라더가 창립(1934년)후 가장 호황을 누렸던 지난 84년 이후 13년 만에 최고치가 될 전망이다.

정보통신기기로 일본 재계와 증시의 가장 주목받는 기업 중 하나로 탈바꿈했지만 부라더에도 시련과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91년 9월에 열린 나카오 사원의 환송회 역시 부라더가 겪었던 고난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다.

‘엔고태풍’ 맞은 뒤 통신기기시장 뛰어들어

부라더는 전자타이프라이터에 손을 대 해외시장 개척에 성공하면서 80년대 초반 이후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85년의 플라자합의를 계기로 급격히 몰아닥친 엔고태풍은 이 회사에 1차 위기를 몰고 왔다. 원가절감을 위한 체질개선과 사업다각화 준비가 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엔고태풍에 직격탄을 맞은 부라더는 87년부터 팩시밀리와 컬러복사기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시장에는 강자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특히 컬러복사기는 100억엔에 가까운 개발비만 잡아먹은 채 이렇다할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참패의 수모를 당했다. 후지제록스, 캐논 등 기라성 같은 선발업체의 벽을 넘기에는 힘이 너무 달렸기 때문이다.

팩시밀리도 사정은 다를 바 없었다. 무려 35개사가 엇비슷한 제품을 내놓고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전투를 벌이는 싸움터에서 최후발업체인 부라더가 딛고 설 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임원회의에서는 하루빨리 걷어치우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이 빗발쳤다.

부라더는 이때 마지막 시도를 결심했다.

“컬러복사기의 실패는 제품을 내기 전에 소비자들의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장이 원하고, 소비자가 찾는 제품을 만들자. 시장에 먹혀 들어갈 수 있는 기능, 가격을 찾아내고 여기에서 거꾸로 출발하자.”(야스이 요시히로 사장)

나카오 사원에게 떨어진 미국출장 명령은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계 어느 시장보다 경쟁이 치열한 미국에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떤 제품인지,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지를 밝혀내 이를 돌파구로 삼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당시 나카오 사원으로부터 전해온 소식은 “꼭 필요한 기능만 갖추고 있으면서 가격은 399달러를 넘지 않는 팩시밀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 한 가지였다. 미국시장에서 이때 팔리는 팩시밀리의 주요 가격은 대당 799달러였다. 말하자면 기존 제품들의 절반까지 값을 잘라낼 수 있다면 미국에서도 살고, 일본에서도 통할 수 있다고 나카오 사원은 진단한 것이었다.

기존 제품들의 반값에 팔 수 있는 팩시밀리를 만들어야 살 수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부라더의 임직원들은 난감했다. 하지만 생각을 뒤집어 도전해 보기로 했다. 개발과정에서는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최대한 단축해야만 했다.

경쟁사들도 원가절감 노력을 등한시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부라더는 전원부문은 A사에, 드럼부문은 B사에 개발을 맡기는 등 협력사를 총동원해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그리고는 정확히 1년 만에 399달러짜리 팩시밀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갖춰야 할 기능은 다 갖고 있으면서도 값은 절반에 불과한 부라더의 399달러짜리 팩시밀리는 가는 곳마다 대히트였다. 때마침 불어 닥친 재택근무형 사업 붐도 염가보급형 부라더 제품에 날개를 달아줬다. 판매점을 비롯한 시장에서는 ‘크기가 작아 불필요한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값은 싸고, 기능은 뛰어난’ 부라더 제품에 인기를 몰아줬다.

전문가들은 부라더의 승리의 방정식을 무섭도록 철저한 ‘한 우물 파기’ 전략에서 찾고 있다.

자신의 실력과 장기를 한데 모아 한두 가지 상품만으로 승부한 선택과 집중 전략이 부라

더를 우량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분석이다. yangs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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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