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ㆍ남기환 월드콤 여행기자/ 사진ㆍ최동국 KaMP 스튜디오취재협조ㆍ주한남아프리카공화국대사관아프리카 어느 나라치고 식민의 상흔이 없는 곳이 있을까. 17세기가 지나면서 유럽에서 찾아온 이방인들은 앞선 문명으로 대륙을 지배하려 했고, 늘 서로에게는 그만큼의 대가가 뒤따랐다. 그 가운데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원주민과 유럽인들간의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요하네스버그에서 자동차로 40여분 거리에 있는 행정수도 프레토리아 중심가 남부에 위치한 개척자박물관(Voortrekker Monument)은 피비린내 나는 개척의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93m 높이의 황토빛 외관은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웅장하다. 백인들의 승리와 개척의 역사를 되새길 목적으로 세워진 까닭에 건물은 19세기 당시의 통나무 요새를 본떠 지어졌다.17세기 백인들의 남아프리카 이주가 시작된 직후에는 백인들과 흑인들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물물교환을 했다. 하지만 보어(Boer)인으로 불렸던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목초지를 찾아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은 새로운 땅이 필요해졌다. 1830년대 이후 본격화된 보어인들과 원주민들간의 대립은 여기서 시작됐다.백인들과 가장 강력하게 맞섰던 이들이 당시 남부아프리카를 주름잡던 줄루족이었다.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고 그중 1839년의 전투는 가장 치열했다. 49명의 백인과 3,000명의 줄루족이 벌인 총과 창의 싸움. 이날의 전투에서 줄루족은 전멸했고, 백인들은 마침내 그들의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초원에 피의 강(Blood River)이 흘렀다고 현지 가이드는 설명했다.박물관 입구의 정원은 당시의 상황을 조각으로 재현하고 있다. 백인들은 그들이 타고 왔던 포장마차로 울타리를 설치, 줄루족과 맞섰다. 남자들은 총을 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 뒤에서 실탄을 장전해주며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다.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벽에는 포장마차의 부조가 새겨져 있고, 박물관 앞에는 백인여성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조각상이 넓은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다.박물관은 까마득히 높은 천장이 인상적인 홀과 꼭대기층의 전망대, 그리고 유물전시 공간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홀은 벽면의 스테인드글라스 채광창 덕분에 신비스러우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중앙은 지하전시실이 내려다보일 수 있게 마치 우물처럼 뚫려 있다.그 아래로 ‘우리는 당신을 위해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비가 내려다보인다. 매년 12월이면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이 조형물을 비춘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 건물 5층 높이 정도에 마련된 전망대는 요새의 관측소를 떠올리게 한다.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프레토리아 시내는 물론 드넓은 아프리카 평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일품인 곳이다.지하전시장에 들어서는 관람객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기념비 둘레를 장식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9개 주의 깃발. 자치주 고유의 문장과 상징을 아로새긴 깃발들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다. 사방의 벽을 따라 19세기 백인들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는데 전화번호부 두세 권 정도의 두께는 족히 됨직한 성서와 아기인형, 화약통, 장총, 회중시계, 농기구 등이 빛바랜 역사를 전해준다.1893년에 만들어졌다는 아기용 턱받이와 자수용품, 옷 등을 비롯해 1830년에 쓰여진 편지와 당시 백인들이 발행했던 신문 등은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들로 대접받는다. 전시장 둘레에는 당시의 전투와 생활을 알려주는 벽화가 있다.부어트레커(Voortrekker)는 보어인들이 아프리카에 상륙한 뒤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를 응용해 새로 만들어 쓰던 아프리칸스인데 ‘대장정’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원주민들을 몰아내기 위해 오랜시간 싸워온 백인들에게 국가의 건설은 대장정의 화려한 종착역이었다. 그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이 박물관을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백인관광객들. 현지 흑인들은 그저 정원을 손질하거나 박물관 주변을 청소하는 허드렛일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다.땅을 지키려는 이들과 그것을 차지하려는 이들이 빚어낸 피의 역사. 이방인들은 이후 150여년 동안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 노릇을 해 왔다. 비록 식민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지금도 매년 12월16일이면 승리자들은 이 박물관에 모여 그들만의 기념식을 잊지 않고 있다.◆ 여행메모찾아가는 길: 한국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직항편이 없어 홍콩을 경유하는 편을 가장 많이 이용한다.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캐세이퍼시픽 등이 매일 1~2회씩 인천~홍콩간을 운항하고 있고, 홍콩~요하네스버그 구간은 화요일을 제외한 매일 1회씩, 오후 11시50분에 출발하는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박물관까지 차량으로 약 40분이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