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고의 대학으로 일컬어지는 하버드대학은 미국 동북부의 매사추세츠주에 있다. MIT 등 명문대학이 대부분 이곳에 몰려 있어 동북부는 학생들의 선망이 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비디오게임을 좋아하는 학생들의 눈은 동부가 아닌 서북부로 쏠려 있다.워싱턴주 레드먼드에 있는 디지펜(DigiPen)공과대학. 비디오게임 제작으로 학사학위를 주는 미국 유일의 4년제 정규대학이다. 비디오게임을 좋아하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비디오게임의 하버드’로 인식된 지 오래다. 업계에서는 ‘게임프로그래머 사관학교’라는 애칭으로 통하기도 한다.어린이들 사이에 유명한 비디오게임이었던 덩키콩의 이름을 따 덩키콩대학으로 불리는 이 학교에는 한 해 약 200명 정도의 입학이 허용된다. 하지만 매년 평균 2만5,000부의 원서가 접수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경쟁률이 보통 치열한 것이 아니다. 이 학교는 이중 500명 정도를 서류전형으로 골라 시험과 면접을 통해 최종 200명을 선발한다.이 학교가 이처럼 인기가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비디오게임 산업이 최근 들어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가를 몇 가지 예에서 찾으면 즉각 답이 나온다. △지난해 비디오게임 관련산업의 매출은 전년 대비 42.4% 급증한 94억달러로 미국 내 영화관람료(84억달러)를 상회했으며 △최대 비디오게임메이커인 일렉트로닉아트의 연간매출이 20억달러를 넘으며 미국 우량기업인 S&P 500대 기업에 포함됐다. △소니의 지난해 수익 60%가 비디오게임인 플레이스테이션2 부문에서 기록했으며 △미국 최대서점인 반스&노블은 자회사인 비디오게임판매업체 게임스톱이 없었다면 올해도 적자를 면치 못했을 것이며 △최근 히트작인 ‘그랜드 시프트 오토: 사악한 도시’ 게임은 출시된 지 3일 만에 개당 48달러짜리가 140만개 팔려 7,000만달러의 수익을 기록한 것 등이다.이처럼 급성장하는 산업인 만큼 디지펜을 졸업하면 대부분 두 개 이상의 회사에서 취업 제의를 받는다. 보통 첫해 연봉이 5만~6만달러 선이며 유행하는 게임을 만드는 부서로 들어가면 10만달러 이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학교는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졸업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4년 동안 정규과정을 마치고 리얼타임 인터액티브 시뮬레이션 전공 학위를 받은 학생은 지난해 고작 36명에 불과했다.학교 관계자들은 비디오게임을 하는 것과 그것을 디자인하는 것은 아주 다른 재능이라고 얘기한다. 게임디자이너는 우주선 과학자와 똑같은 수준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비디오게임을 만드는 것은 첨단 컴퓨터 프로그램과 디지털 애니메이션은 물론 물리ㆍ수학적인 탄탄한 이론이 뒷받침돼 있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학교가 고교시절 수학과목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은 학생들의 입학원서를 배제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하루 14시간 이상 학교에서 공부디지펜 학생들은 공부 외의 생활을 거의 포기하며 지낸다. 대부분 주 6일이나 7일을 하루에 14시간 이상씩 학교에서 공부한다. 학교에는 기숙사는 물론 동아리 활동도 전혀 없다. 인문학 등 교양과목도 필요 없다. 학교 주변에는 편의점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정도다. 공부가 힘들어서인지 여학생들은 전학년에 14명뿐이고, 학생들의 평균나이도 22세로 다른 학교들보다 약간 높은 편이다. 학비도 1년에 1만3,000달러로 싼 편도 아니다.이 학교의 방문객들은 학생들이 편안한 거실 같은 곳에서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비디오게임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찾아보기란 매우 힘들다. 학교건물 또한 다른 명문대학처럼 고색창연하지 않고 군대 막사같이 삭막한 모습이다. 각 강의실 명칭은 숫자가 아닌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비디오게임기는 교내식당에 몇 개 전시해 놓은 게 전부일 정도다.‘비디오게임’이란 말은 전공 필수과목에서조차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교수들이 프로그래밍 수업에서 컴퓨터 서킷보드를 조립하는 것은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작동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모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게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공부는 하지 않는다. 수업이 끝나고 과외활동의 일부로 게임을 만들 뿐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런 상황을 개의치 않는다. 게임이 좋아 이 학교에 들어왔으니 이를 위한 어떤 고통도 스스로 참아낼 뿐이다.최근 미국은 심한 취업난을 겪고 있으나 이 학교 졸업생들에게는 남의 얘기다. 졸업만 하면 이곳저곳에서 오라고 한다. 닌텐도 같은 회사들은 디지펜 졸업생들을 아주 선호한다. 닌텐도의 게임개발 파트에서 일하는 8명의 프로그래머 전원과 14명의 아티스트 중 절반이 디지펜 출신이다.이 파트를 이끌고 있는 레이먼드 얀 부사장은 “이들은 비디오게임 산업을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인재들이어서 다른 사람들과 많은 차이가 난다”며 “비디오게임 기술을 가진 프로그래머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한다.덩키콩 게임 수준인 사람들에게는 비디오게임 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비디오게임은 거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전문가들은 무성영화에 음성이 도입된 것 이상의 질적인 대변환을 가져왔다고 평가하고 있다.실제 스포츠게임들은 이제는 경기실황을 그대로 중계하는 것과 비슷하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2와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 그리고 닌텐도의 게임큐브는 인터넷에 접속할 수도 있다. 인터넷을 통해 수백명의 선수들이 실제와 똑같은 상황에서 경쟁할 수 있다. 이런 게임을 만들자니 개발비가 100만달러에서 800만달러까지 들어갈 정도다. 때문에 이 같은 게임프로그램을 디자인하려면 일반대학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전공한 학생들로는 어림없다. 재능이 있는 전문프로그래머가 필요하고 인기를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최대 게임업체인 일렉트로닉아트의 창업자 트립 호킨슨 CEO는 하버드대 재학시절인 70년대에 어느 교수가 자신에게 한 얘기를 아직 잊지 못한다고 한다. “자네처럼 게임이나 하는 학생은 하버드대학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크게 변했다. 디지펜 같은 학교가 생긴 것은 물론 캘리포니아주립대(어바인), MIT, 조지아공대 등 미국 내 6개 유명대학에서 비디오게임 개발관련 과목을 개설해 놓고 있다.플로리다의 풀세일이란 비디오게임연구소는 수강생들에게 2년제 학위를 주기도 한다.물론 디지펜출신들이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2위 비디오게임업체인 액티비전은 다른 회사에서 히트작을 만든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 뽑기 때문에 디지펜출신들은 이곳에 가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하지만 “돈 때문이 아니라 비디오게임에 대한 열정 때문에 디지펜에서 공부했다”는 에릭 스미스(33ㆍ2000년 졸업)라는 졸업생의 말처럼 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좀처럼 게임업계를 떠나기 어렵다고 말한다.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