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제 379호 (2003년 03월 10일)

끊임없는 변신으 로 블라인드 시장 ‘호령’

기사입력 2006.09.04 오전 11:54

“세계시장을 호령하며 국내 시장까지 삼켰던 대만 제품을 몰아냈죠.”

블라인드가 아파트나 사무실의 햇빛을 가리거나 아늑한 분위기 연출을 위한 인테리어 상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사무실이나 아파트 등에 블라인드가 설치돼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인테리어의 필수품이 되고 있는 블라인드를 생산하는 코인씨앤엠(대표 이계원·55). 지난 1996년 설립돼 연륜은 짧지만 세계 속의 블라인드업체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강한 중소기업이다.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블라인드업체들이 기술교류를 하자며 귀찮을 만큼 찾아올 정도입니다.”

코인씨앤엠이 단기간에 블라인드업계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데는 이계원 대표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이대표는 1975년 중앙대를 졸업하고 조선맥주에 입사해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생활에서 안정감을 못찾았어요. 어딘가 몸 한구석에 ‘끼’가 발동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는 1년 반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76년 6월 서울 종로에 지물포를 냈다. 도배 장판일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직원 2명을 두고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오자 어머니의 성화가 대단했다. “잘다니던 회사를 나와 허드렛일이나 하며 살겠다는 것이냐”는 호통이었다. “용서를 구하고 설득했습니다. 일주일쯤 지나자 어머니가 허락하셨고 사업자금도 융통해주셨죠.”

사업이라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초기에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당시 지물사업은 대부분 외상거래로 이뤄졌다. 명절이면 수금하는 것이 제일 큰 문제이었다. 그러나 수금은 외상대금의 80% 정도밖에 안됐고 매번 이런 상황이 계속됐다.

어느 해이던가 추석 때로 기억된다. 그때도 하루 종일 수금을 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사무실에는 인부들과 물품대금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수금이 안돼 지급할 돈이 부족했다. 억지로 맞춰 주고 나니 정작 명절을 쇨 돈이 없었다. 가깝게 지내던 이웃가게 사장님한테 50만원을 빌려 집으로 갔다. “고생하려고 사업을 시작했나. 직장생활이나 할걸….” 사실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많았다.

하지만 이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기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열심히 했다. 79년 늦가을 이대표에게 기회가 왔다. 서울 소공동의 호텔롯데에서 연회장 벽지공사를 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 “천장벽지가 열 때문에 찢어지는데 묘안을 좀 달라”며 담당직원이 찾아왔다. 이대표는 단걸음에 달려갔다.

여기저기 살핀 이대표는 닥나무로 만든 한지로 초배를 하고 비닐벽지를 발라 시공했다. 한지로 초배를 한 천장은 열에도 찢어지지 않았다. 습기로 장판이 썩어 고민하던 이 호텔의 한식당 장판도 한지를 바르고 콩기름에 겨자를 넣어 코팅하는 ‘콩댐시공’으로 해결했다.

“언젠가 낡은 한옥에 도배하러 갔을 때 벽지가 썩어 있는데도 초배지로 댄 한지는 원래대로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지에 대한 공부를 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이대표는 1986년 코오롱상사 커튼 총판대리점을 따면서 코인상사라는 법인을 세웠다. 당시 코오롱상사의 커튼총판을 딴다는 것은 성공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10명도 안되던 직원수가 50명으로 늘고 매출도 100억원대를 훌쩍 돌파했다.

그러나 잘나가던 이대표는 5년 만에 커튼사업을 접는다. 이대표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다. 첨단빌딩과 아파트신축 붐이 일면서 커튼시장이 위축되고 있는 것을 감지한 것. 항로를 결정짓는 방향타를 블라인드로 거침없이 돌렸다.

당시 국내 블라인드 시장은 대만제품이 장악하고 있었다. 시장이 커지자 일본업체들도 국내 시장에 눈독들이기 시작했다. 90년도 말쯤이다. 세계적 블라인드업체인 일본의 다치가와공업측에서 그에게 한국파트너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이대표는 “훗날 알았지만 이토추상사를 통해 무려 3개월 동안 조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일본업체의 한국파트너로 결정된 이후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기술 없이 제품만 시공해주다 보니 더 이상의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이대표는 블라인드의 금형 및 사출과 관련부품 분야로 사업을 넓혀갔다. 그는 한겨울에 냉찜질을 해가며 블라인드의 핵심부품 개발에 매달렸다. 96년에는 다치가와공업측에 ‘독립’을 선언했다.

“다치가와공업과의 결별은 굉장한 모험이었어요.” 이때 코인씨앤엠이라는 별도법인을 냈다. 세계적인 블라인드업체로의 도약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코인씨앤엠은 블라인드사업을 본격화한 지 2년 만에 수동블라인드 분야에서 국내 시장의 60%를 장악했다. 나머지는 군소업체들이 저가형 시장을 형성했다. “이때 대만업체들이 코인씨앤엠과 더 이상 경쟁할 수 없다며 한국 내 사업을 포기하고 철수했어요.”

국내 시장을 장악한 이대표는 IMF 외환위기가 오자 해외로 눈을 돌렸다. 98년 영국에 10만달러어치를 내보낸 것이 첫 수출이었다. 그해 터키, 호주, 베트남 등지로 총 30만달러를 내보냈다. “수출을 시작한 이후 영국에 갔다가 놀랐어요. 우리 회사 제품을 현지에서 최고급으로 평가하더라고요.”

코인씨앤엠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개발을 계속했다. 블라인드 원단도 개발해 해외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2000년부터는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서만 만들고 있는 전동블라인드도 생산하고 있다. 이 제품은 주상복합아파트나 첨단빌딩 등을 중심으로 설치가 부쩍 늘고 있다. 해외수출도 하기 시작했다. 전동블라인드와 관련, 독일의 던컨모터사가 기술제휴를 요청해 올 정도다.

“현재 20% 수준에 머물고 있는 전동블라인드의 국내 시장점유율을 5년 내에 수동블라인드와 같은 60%까지 끌어올릴 생각입니다.”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올 2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세계 최대규모의 창호전시회인 ‘R+T’에 부스를 확보해 참가했다. 그런데 영국, 미국, 러시아 바이어들이 자발적으로 상담활동을 도와주었다. 코인씨앤엠 배지까지 달고서. 게다가 러시아 바이어는 “영원한 동반자가 되겠다”며 회사명까지 코인씨앤엠의 ‘코인’을 빌어 ‘TK코인’으로 바꿨다.

해외공략을 강화하고 있는 코인씨앤엠의 수출대상 국가는 영국, 이탈리아, 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 전세계 20여개국. 코스닥 등록을 준비하고 있는 이 회사는 올해 수출 500만달러를 포함, 150억원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02-529-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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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