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장독뚜껑' 만든 주인공, 초등학교 학력으로 삼성그룹 임원들에 강의하기도

이동훈 성실엔지니어링 사장(43)은 ‘숨쉬는 장독뚜껑’ 신화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지난 96년 대장간이나 다름없는 허름한 공장에서 개발한 ‘숨쉬는 장독뚜껑’이 공전의 히트상품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대리점마다 주부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죠. 공장까지 찾아왔다니까요.” 숨쉬는 장독뚜껑은 개발한 해에만 50억원어치나 팔았다.숨쉬는 장독뚜껑은 뚜껑을 열지 않고도 장독 안에 공기를 넣어주고 햇볕을 쬘 수 있도록 만들어 주부들로부터 인기가 좋았다. 이 제품은 IMF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게 한 효자상품이 되기도 했다.이처럼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히트상품을 만들어낸 데는 그가 역경을 포기하지 않고 이겨냈기에 가능했다.이사장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이력서의 빈 공간을 메울 경력이 없다”며 살짝 웃는 그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기능공으로 출발, ‘성공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됐다. 굴곡의 인생을 살았지만 역경을 이겨낸 이사장. 삼성그룹이 임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요청한 몇 안되는 중소기업인이다.이사장은 운동장을 맘껏 뛰어다닐 초등학교 5학년이던 지난 1972년 가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힘겨운 생활이 시작됐다. 게다가 이듬해에 생계를 꾸리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쓰려지자 먹고사는 것이 막막했다. 그는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경북 청송에서 아버지와 함께 상경, 동경해 오던 서울생활을 시작했다.하지만 서울생활은 비참했다. 작은아버지가 도와주셨지만 굶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마저 2년 후 사고후유증과 지병악화로 사망, 졸지에 고아가 돼버렸다.첫 직장은 철판에 구멍을 뚫는 작업(일명 타공)을 하는 동신타공. 취업은 그에게 있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집에서 나와 공장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새벽부터 청소하고, 기계를 닦고, 라면을 끓이는 등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휴일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악착같이 기술을 습득하려고 노력했어요.” 선배들로부터 “초짜가 기계부터 만진다”며 얻어맞기도 했다.2년쯤 지났을까. 이영주 사장이 그를 불렀다. “성실하구나. 열심히 해라”며 그에게 기계를 만지게 했다.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더군요.”그의 인생에 ‘희망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계와 씨름했다. 당시 타공판은 공장에서 자주 부러져 골칫거리였다. 그는 2개월 만에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타공판을 개발했다. 또 작업능률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열처리방법도 개선시켰다. “이영주 사장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며 나를 아껴줬어요.”좋은 일에는 탈이 끼어든다고 했던가. 지난 79년 말쯤 회사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납품대금은 안 들어 오고 일감은 줄어들고. 직원들이 하나둘 떠났다. 결국 회사는 부도났고 공장은 채권단에 압류됐다.동신타공의 부도는 그에게 인생전환점이 되는 기회로 작용한다. 부도 이후 그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채권단의 압류품목에서도 빠진 낡은 고물기계 한 대. 밑천이라고는 한푼도 없었던 그는 고민에 빠졌다. “낡은 기계에 인생을 걸까. 아니면 다른 회사로 옮겨갈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았다.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갔다.낡은 기계수리로 재기 발판82년 초 그에게 생각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동신타공 시절 같이 일했던 친구가 그를 찾아온 것. 타공기계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사람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원부자재를 제공할 테니 타공기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다.타공판 제작이나 부품을 만들어 본 적은 있어도 타공기계는 한 번도 만든 적이 없었던 그에게는 두려움이 앞섰다. “여기가 내 인생의 승부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한 번 해보기로 했다. 5개월 만에 기계를 만들었다. “정말 기쁘더라고요.” 그때 받은 600만원은 사업밑천이 됐다.이 돈으로 그는 낡은 기계부터 수리했다. 직원도 몇 명 뽑았다. 이듬해 3월 ‘성실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사무실을 겸한 7평짜리 공장에 기계 한 대와 전화기 하나가 고작이었다. 회사설립 기쁨도 잠시였다. 생각과 달리 일감확보가 쉽지 않았다. 주문전화 한통 없었다. ‘왕년의 타공왕 이동훈’이라는 명성은 온데간데없고 밑천은 바닥나고 있었다.“돌파구가 없을까.” 고민을 하며 밤샌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일이 ‘회사알림’ 스티커를 부착하는 일이었다. 낮에는 공단을 돌아다니며 공장이나 사무실 벽에 스티커를 붙이고 저녁에는 전화를 기다렸다.스티커영업은 효과가 있었다. 3일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서영주정과 진로에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술원료 분쇄기계용 망(지름 0.3~2mm)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보름 만에 두 회사에 시제품을 보냈다. ‘대만족’이라며 두 회사에서 500장의 주문이 들어왔다. 점차 주문량이 늘면서 타공기계 도입도 확대했다. 86년에는 타공업체 8곳을 인수했고, 사세도 빠르게 커지기 시작했다.새로운 것 만들기를 좋아하는 그는 번 돈으로 연구개발을 강화했다. 성실엔지니어링은 흡음판용, 거름망용, 클린룸용, 자동차필터용 등으로 타공판 품목을 다양화시켜 나갔다.현대자동차, 만도기계, 삼성전자 등 타공판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업체에 공급하고 있다. 이사장은 직장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을 준 옛 동신타공의 이영주 사장(65)을 지난 98년부터 모시고 동고동락하고 있다. 그가 회사부도 이후 훌쩍 떠나 한동안 연락도 없이 지내던 이영주 사장을 만난 곳은 뜻밖에도 병원이다.계속되는 사업실패로 자살을 기도했던 이영주 사장이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만났다. 그는 3개월 동안 정성껏 병구완을 해 완치시키고 회사로 모셨다. 이영주 사장은 성실엔지니어링에서 영업소장으로 활동하며 이동훈 사장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있다.이사장에게는 특별한 목표가 있다. 비록 늦었지만 검정고시를 통해 중ㆍ고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까지 도전하겠다는 것. “좀 늦게 배우면 어떻습니까. 열심히 살다보니 그렇게 된 걸요. 또 하나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싶네요.”(02-816-80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