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간 수도생활 접고 사업가로 변신, 국내시장 70% 점유...세계 5대 메이커 야욕

성직자가 되겠다며 수도과정을 밟아오다 사업가로 변신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인으로 구도의 길을 접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삶 전부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삶 전체인 ‘하느님’을 떠나야 한다는 절망감에 목숨을 던질 수도 있다.하지만 오히려 이를 극복하고 인정받는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이 있다. 핫러너(금형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주입구)를 만드는 유도실업의 류영희 회장(56ㆍ사진)이 그 주인공이다.그는 14년간의 수도생활을 접고 사업가로 변신했다. “하느님이 나를 포기한 게 아니라 더 값진 삶을 살라며 시험에 들게 한 겁니다.” 지금 그의 가슴속에는 일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그는 1947년 전남 담양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4대째 가톨릭집안인 류회장의 첫째누나도 학창시절 신학을 공부하고 수녀가 됐다. 그도 중고교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순탄한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그에게 인생전환점이 된 시기는 광주에 있는 가톨릭신학대학원에 들어간 1974년. 그는 1년도 채 못다니고 신부님(담임교수)으로부터 퇴학조치를 당한다. “신부님이 저를 부르셨어요.찾아갔더니 신부님은 냉엄한 목소리로 ‘수도자의 길을 중단하고 당장 학교를 떠나라’고 하셨어요.” 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수도자에게 신부님의 말씀은 거절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신부님께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신부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내일 학교를 떠나라”는 말을 남기고 신부님은 등을 돌렸다.쫓겨나다시피 학교에서 나온 그는 방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학교와 신부님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왜 내가 쫓겨나야 하는가. 나를 죽음의 세상으로 내몬 이유가 뭘까.”그는 하루하루 기도로 흐트러진 마음을 잡아갔다. 두 달쯤 지나 깨달음을 얻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자. 하느님이 나를 강하게 만들려는 은혜다.” 넉 달 남짓 입사시험 준비를 했다.어학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1991년 가을 대우전자 유럽지역담당 무역부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성당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주교님이 받아주지 않았어요.”7년 동안 유럽을 안방 드나들 듯하며 해외시장을 누볐다. 류회장이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폴크스바겐을 방문하고 나서다. 당시 폴크스바겐의 직원과 상담을 하면서 핫러너에 대한 중요성을 느낀 것. 당시 핫러너의 불량은 금형업계에서 골칫거리였다. ‘그럼 내가 만들면 되지’라는 생각에 사업을 시작했다.류회장은 1981년 서울 동교동에 친구의 도움을 받아 3평짜리 사무실을 내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후 1988년 구로동에 땅을 사 5층짜리 건물을 지을 때까지 무려 7번이나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거래처에서 이사를 너무 자주 다닌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외주로 생산해 거래처에 납품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주입구가 막히거나 성형품이 변형되는 등 불량률이 높았다. 때문에 류회장은 고객으로부터 불평을 들어야 했고 현장에서 숱한 밤을 지새워야 했다.불량품 때문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얼마쯤 지나 자금이 바닥나 견디는 데 한계에 부닥쳤다. 그래서 류회장은 플라스틱 사출기계 오퍼상을 몇 년간 하기도 한다.핫러너에 미련을 갖고 있던 류회장은 1996년 오퍼상을 접고 다시 핫러너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직접 개발해 내놓은 핫러너는 분사량이 고른데다 성형속도가 일정하고 빨라 품질을 향상시켰다.제품을 내놓자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우리가 만든 제품을 금형업체에서 서로 사겠다며 줄서서 기다릴 정도였어요.” 유도실업의 핫러너 국내 시장 점유율은 70%를 웃돌고 있다.류회장은 곧바로 해외시장을 두드렸다. 수출은 예상외로 쉽게 풀렸다. 몇 해 전 오퍼상을 할 때 알게 된 일본 기업가의 소개로 일본 수출길을 텄다. “도쿄 인근에 원룸을 얻어 사무실 겸 숙소를 내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일본시장을 누볐습니다. 숙소에서 땀에 절은 속옷을 보며 잠들곤 했지요.” 이렇게 해서 시작된 수출이 1997년부터 본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했다.1년 중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는 류회장은 지금까지 미국, 중국, 포르투갈 등 9개국에 현지법인을 두고 있을 정도로 글로벌화에 나서고 있다. 수출국가만 전세계 40여개국에 이른다.류회장이 수출을 하면서 고집을 피우는 게 하나 있다. 수출단가와 자체 브랜드다. 국내 공급가보다 1.3배에서 최고 30배까지 비싸게 받는다. “절대 해외에 덤핑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환위기 때 올려 받았어요.”류회장은 “이미 핫러너 시장에서 국내 1위는 물론 아시아지역 선두업체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2~3년 내에 캐나다의 허스키와 몰드마스타, 미국의 DME, 독일 하스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5대 메이커에 들겠다는 의욕에 차 있다. 매년 해외수출이 20% 이상 늘고 있어 목표 실현은 충분하다는 것.류회장은 내실ㆍ투명 경영으로 유명하다. 창업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이익을 냈다고 배당을 받지도 않는다. 회사에 가족을 비롯한 친인척은 단 한 명도 두지 않고 있는 것만 봐도 류회장의 경영관을 알 수 있다. 그는 “항상 분수에 맞는 사업을 하라”고 권한다. 조금은 부족한 것 같지만 결국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류회장은 올해 초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회장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미국 현지법인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해외경영을 진두지휘하기 위해서다. 그는 해외의 판매법인을 생산법인으로 바꿔나갈 생각이다.중국의 퉁관과 쑤저우에 각각 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포르투갈, 미국 등지에도 공장설립을 진행하고 있다. “해외에 생산거점을 마련해 지역별로 시장을 선도해나갈 겁니다. 우수인재를 현지에서 뽑아 육성하는 현지화 전략도 그 때문입니다.”류회장은 1992년 사출기용 로봇을 생산하는 유도스타를 설립했다. 그는 이 회사도 이 분야 국내 시장 1위 기업으로 성장시킬 정도로 뛰어난 경영수완을 보였다.지난해 276억원의 매출을 올린 유도실업의 올해 목표는 350억원이다. “유도실업의 핫러너를 세계적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을 작정입니다.” (031-350-2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