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튼 하나로 중간에 끼어드는 광고 훌쩍 건너뛰어...가입자 70만명

미국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 흔히 겪는 일 하나.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다 슬며시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순간, 갑자기 화면이 바뀐다. ‘강력한 엔진, 세련된 디자인, ○○자동차가 야심 차게 선보이는 2003년형 스포츠카’ 요란한 광고는 한참동안 화면을 뒤덮는다.한껏 고조됐던 감동이 여지없이 깨지는 건 당연한 일. 시청자들이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는 순간을 치고 들어오는 광고가 효과는 좋겠지만 여간 짜증스러운 일이 아니다. 광고가 주는 정보를 무시할 수 없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미국 가정에서 ‘티보’(TiVo)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난감 로봇 이름을 연상시키는 티보는 ‘디지털비디오레코더’(DVR)를 일컫는다. 텔레비전에 연결해 사용하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최대 80시간까지 녹화할 수 있다.일반 비디오가 테이프를 쓰는 것과 달리 티보는 하드디스크에 프로그램을 저장한다. 따라서 중간 중간 귀찮게 끼어드는 광고를 버튼 하나로 훌쩍 건너뛸 수 있다.티보는 광고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유명해졌지만 사실 더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간편하게 원하는 드라마를 녹화할 수 있고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볼 수 있다. 매주 방영하는 시리즈 전체도 버튼 하나면 처리된다.드라마를 보다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은 다시 돌려보고 지루한 장면은 빨리 지나가 버릴 수도 있다. 전화가 오거나 초인종이 울려도 문제없다. 잠깐 정지시켜 놓고 잠시 후 다시 틀면 된다.티보의 또 다른 매력은 프로그램 시청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것. 광고를 없애고 불필요한 장면을 건너뛸 수 있기 때문이다. 2시간은 족히 걸리는 야구경기도 40분이면 볼 수 있다.공수교대에 걸리는 시간,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서 연습 삼아 배트를 휘둘러보는 시간, 투수가 흔들릴 때 수비진이 모여 안심시키는 시간, 운동장에 뛰어든 흥분한 관중과 경찰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추격전, 거기에 광고까지. 거추장스러운 장면을 모두 걸러내고 그야말로 시합만 집중해볼 수 있는 것이다.티보는 단순히 지정한 것만 녹화하지 않고 가입자가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추천까지 한다. 지능형 장치인 셈. 가입자가 자주 보는 프로그램을 근거로 개인 취향을 파악, 비슷한 프로그램을 자동으로 녹화해준다. 물론 여유 공간이 있을 때만 자동녹화해 가입자가 지정한 프로그램을 빠뜨리는 일은 없다.일반 텔레비전을 볼 때도 티보는 위력을 발휘한다.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흥미 있는 프로그램을 발견했지만 이미 시작한 지 10분쯤 지났다면, 티보가 설치돼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티보는 최근 30분을 항상 녹화하기 때문에 그냥 앞으로 돌려 보면 된다.텔레비전 마니아들에게 티보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로 인식되고 있다. 어니스트 스벤슨씨는 “매일 저녁 뉴스를 즐겨 보는 편인데 티보를 설치한 후에는 아무리 늦게 집에 와도 뉴스를 놓치지 않게 됐다”며 “티보가 생활을 바꿔놓았다”고 말했다.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제프리 호킨스씨는 “티보 덕분에 내가 텔레비전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예전에는 방송국에서 보낸 프로그램 그대로 봤지만 이제 자신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티보의 등장으로 가정에서 새로운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랜달 로덴버그 부부는 가끔 티보 메모리 공간을 놓고 다툰다. 로덴버그씨는 “예전에는 텔레비전 채널 선택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곤 했지만 이제는 티보 저장공간을 놓고 실랑이를 벌인다”고 말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많이 녹화할수록 아내가 쓸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지난해부터 가파른 성장세 보여티보는 열렬한 추종자들 덕분에 고속성장하고 있다. 티보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의 열정적인 입소문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실제로 티보는 지난 2000년 이후 광고를 전혀 하지 않고 있지만 가입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노스캐롤라이나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는 매트 스미스씨는 친구들을 만나 티보 얘기만 나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예찬론을 펼친다. 그는 “친구들이 이제는 내 앞에서 티보라는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스미스씨 같은 열성팬 덕분에 티보 가입자는 현재 70만명에 달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전년 대비 64%가 늘었다. 지난 2002년 4/4분기 신규가입자만 11만5,000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210%가 성장한 6,000만달러를 기록했다.티보는 지상파 방송국들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지상파 방송들은 광고를 주수입원으로 하기 때문이다. 티보 가입자가 늘어날수록 광고노출은 줄어들기 마련. 모 지상파 방송국 관계자는 “티보 때문에 방송국이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뼈있는 농담을 하곤 한다.실제로 최근 실시된 한 조사에 따르면 티보를 포함한 유사 서비스 가입자 가운데 42%가 자주 광고를 뛰어넘고 27%는 항상 광고를 보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티보의 등장으로 광고 시장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은 아니라는 것.지난 슈퍼볼 경기가 열렸을 때 티보 가입자들의 행동을 조사한 결과 맥주와 영화광고는 상당수가 시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광고는 여러 번 재생해 보기까지 했다. 티보를 잘 활용할 경우 더욱 효과 높은 광고 시장이 형성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티보는 텔레비전 마니아들에게 희소식이지만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티보를 사용하려면 우선 단말기를 사야 한다. 단말기는 40시간을 녹화하는 모델이 249달러, 80시간은 349달러다.단말기를 설치한 후 매달 12.95달러의 서비스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한 번에 299달러를 내면 평생 쓸 수 있다. 월사용료는 단말기를 통해 티보 서버에 접속, 최근 텔레비전 프로그램 스케줄을 내려받기 때문이다. 서버에 있는 정보로 원하는 프로그램을 손쉽게 녹화하는 것이다.티보의 편리함과 바꿔야 하는 더 큰 대가는 심각한 텔레비전중독이다. 티보 덕분에 간편하게 원하는 프로그램을 모두 녹화해 볼 수 있어 결과적으로 전체 텔레비전 시청시간이 늘어난 것이다.미디어컨설팅회사인 넥스트리서치가 조사한 결과 티보 가입자들의 매주 텔레비전 시청시간이 평균 5~6시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모든 일에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는 것처럼 티보도 텔레비전을 볼 자유와 중독 위험을 동시에 안겨준 것이다.티보는 또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소지를 안고 있다. 가입자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티보 서버에 고스란히 기록되기 때문이다. 자칫 개인정보가 유출돼 귀찮은 타깃광고에 희생될 수도 있다.티보는 시장성장과 함께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대표적 경쟁상대는 소닉블루의 리플레이TV. 소닉블루는 월사용료를 9.95달러로 낮춰 티보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위성TV회사인 에코스타도 자사의 위성네트워크에 연결해 쓸 수 있는 단말기를 판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