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업 지난해 15조엔 수출...총수출의 29%까지 성장

일본에 관심을 가진 사람, 특히 경제뉴스에 곧잘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10년’(Lost Ten Years)이라는 용어는 낮선 표현이 아니다. 신문, 방송마다 수없이 써먹은 탓에 이제는 식상한 느낌마저 줄 정도의 그저 그런 표현으로 굳어 버린 것이 이 용어다.버블경제 붕괴의 후유증에 발목 잡힌 일본이 불황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 90년대를 지칭하는 이 ‘잃어버린 10년’은 일본의 몰락과 패배, 그리고 끝없는 후퇴를 의미하는 용어로 간주돼 왔다.주가는 최전성기의 5분의 1 수준까지 추락한데다 기업 도산이 줄을 잇고 서민들은 실업대란의 공포에 사로잡힌 일본의 현실은 잃어버린 10년이 근거 없는 표현이 아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안개 속을 헤매는 2003년 일본 경제의 현주소는 시계바늘이 15, 20년으로 한층 더 역회전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의 세월 동안 일본이 모든 부문에서 ‘손해’만 보고 내리막길을 달린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최근 고개를 들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상처받고 왜소해진 일본인들의 프라이드에 신선한 자극과 용기를 안겨 주고 있는 것은 바로 강력해진 문화산업의 파워다.“일본의 국력을 국내총생산(GDP)과 같은 경제적 잣대로만 재서는 안된다. GNC(Gross National Cool)라는 새로운 지표도 함께 적용해야 한다.”미국의 저널리스트 더글러스 맥그레이는 지난 2002년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 designtimesp=23899>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일본이 GNC 대국의 위상을 단단히 굳히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Cool’은 ‘멋지다, 예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젊은이들의 용어. GNC를 동양권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국민총문화력’ 정도에 해당되는데, 일본은 이 ‘국민총문화력’에서 대국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더글러스 맥그레이는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이 경제대국의 체면에 먹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문화대국의 보이지 않는 소득을 챙기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한 것이다.일본발 문화콘텐츠가 세계시장을 주름잡으며 외화를 벌어들이는 사례는 영화,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고전예술 분야에서도 얼마든지 손쉽게 확인되고 있다.미국 뉴욕의 경매전문회사 크리스티스는 최근 입찰에 붙인 일본의 현대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41)의 작품을 최고 40만달러의 예정가로 경매를 진행했다.이 같은 소식을 접한 뉴욕의 화랑가는 한때 놀람을 금치 못했다. 40만달러라면 피카소 같은 대가의 작품이라도 소품 하나 정도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랑가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90년대 후반부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 온 무라카미는 명품브랜드 ‘루이뷔통’의 디자인으로 화제를 뿌리기도 했으며, 2002년 5월 그의 인형작품이 42만7,500달러의 고가에 낙찰된 바 있어 유명 미술가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됐기 때문이었다.일본영화 할리우드마저 넘봐국제미술품전문딜러들은 무라카미뿐만 아니라 대다수 일본 현대미술가들의 이름값을 예전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크리스티스재팬의 서양회화 담당자는 “후한 대접을 해주는 것은 일본적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한 명의 작가로서 실력과 예술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일본 고유의 전통미에 무게를 두고 작품을 구입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딜러들이 일본 화단의 저력을 국제적으로 알아주고 있다는 자신에 찬 진단이다.문화대국 일본의 새얼굴을 보여주는 사례는 고전음악에서도 수없이 쏟아지고 있다. 빈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인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67)가 지휘해 2002년 선보인 신년콘서트 CD는 전세계에서 100만장이 팔려나가는 대히트를 기록했다.오자와에 이어 젊은 지휘자들이 독일, 벨기에 등 유럽 국가의 유명음악제 지휘를 맡거나 국립극장 음악감독에 선임되는 쾌거 또한 잇따르고 있다. 일본언론은 이와 관련, “일본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를 해주거나 잘못을 눈감아 주는 법이 없는, 세계에서 뛰어난 음악성과 팬들을 감동시키는 매력을 고루 갖춘 것이 인정받은 결과”라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일본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의 평가가 급속히 높아진 것도 일본의 문화대국 이미지를 빛내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할리우드의 제작자, 영화사들은 일본의 괴기, 공포영화가 특히 미국 관객들에게 잘 먹혀들고 있다며 대박을 안겨줄 작품을 고르기 위해 뻔질나게 도쿄를 드나들고 있다.미국 영화사들은 원작의 아이디어와 각본을 통째로 사들인 후 감독과 배우를 교체해 다시 작품을 만드는 리메이크 방식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100만달러를 주고 리메이크 방식으로 사들인 일본 영화 <링 designtimesp=23923>은 <더 링 designtimesp=23924>이라는 이름의 작품으로 미국시장에서 공개돼 1억2,700만달러의 엄청난 수입을 영화사에 안겨준 것으로 알려졌다.일본 전문가들은 미국 영화사가 한 편 제작비로 보통 6,000만달러를 쓴다고 할 때 <링 designtimesp=23927>은 2%에도 못미치는 돈으로 100배 이상의 투자수익을 올려준 셈이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센과 치히로의 실종 designtimesp=23930>으로 베를린영화제의 금곰상과 아카데미상을 잇달아 따내며 기염을 토한 만화영화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의 문화콘텐츠를 이끄는 최고의 스타로 각광받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제작현장인 지브리스튜디오와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는 도쿄 인근의 모리 지브리 미술관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력과 비결을 캐기 위한 해외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이곳을 찾은 해외인사들은 제작에 참가하는 지브리스튜디오의 인원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에 특히 눈이 휘둥그레지고 있다. 800명이 넘는 인력을 보유한 미국 월트디즈니의 리처드 쿡 회장은 약 50명에 불과한 인원이 <센과 치히로의 실종 designtimesp=23933> 같은 초대형 히트작을 만들어냈느냐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일본의 새로운 달러 획득 업종으로 자리매김한 문화산업의 힘은 출판계에서도 그대로 확인되고 있다. 신초사를 비롯한 대형출판사들의 홈페이지에는 신간안내를 조회한 대만, 중국 등 아시아지권 국가의 출판사들의 제휴문의가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다.일본의 최근 상황과 최신 유행 등에 대한 자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감안, 신간을 동시에 번역해 내놓으려는 외국 출판사들이 치열하게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어서다.GNC 잣대를 제시한 더글러스 맥그레이는 소프트 파워의 일종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산술적으로 계측하는 것은 어렵다고 한발 물러섰다.그러나 마루베니경제연구소가 공개한 한 연구결과는 일본이 잃어버린 10년 동안 문화산업에서 얼마나 돈이 되는 장사를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연구소는 무역통계를 근거로 작성한 문화관계수지표를 통해 92년부터 2002년까지 서적, 회화, 미술품 등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본의 수출이 비약적 신장세를 기록했다고 진단했다. 지난 92년 5조엔에 불과했던 이 부문의 수출액이 2002년에는 무려 3배인 15조엔까지 급팽창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수출 총액은 같은 기간에 43조엔에서 52조엔으로 1.2배가 늘어나는 데 그쳤다.이 같은 결과에 대해 이 연구소의 스기우라 쓰토무 소장은 “장기간에 걸친 경제불황 속에서도 GNC와 같은 국가의 저력은 크게 강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문화와 경제의 상관관계를 연구해 온 미국 조지타운대학의 가미야마 신이치 교수는 “일본인들은 원래 문화의 경제적 가치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며 “경제상황에 관계없이 문화의 가치는 줄거나 오그라들지 않는다”고 진단했다.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