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의 삶을 아십니까.“언제 갚으실 거예요. 아무개씨 때문에 제가 회사에서 잘리면 책임질 거예요!”저는 매일 아침에 눈을 떠 깊은 밤 잠들 때까지 (가끔은 이른 새벽까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친절을 가장한 짜증과 협박이 섞인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어디로 도망간 것도 아닌데 때로는 집까지 찾아와 채무상환을 독촉합니다. 이제 부모님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처음에는 혼이라도 냈지만 지금은 아예 포기한 것 같습니다.돈 빌려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도 아닌데, 동네사람들은 저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지 제가 나타나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딴청을 합니다. 카드빚을 갚기 위해 취업을 했지만 신용불량자이기 때문에 예금통장 개설은커녕 휴대전화 개통도 안됩니다. 직장동료들의 이상한 눈빛 때문에 결국 직장을 관두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제게는 이제 꿈도 희망도 없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파트 옥상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현금을 줄 테니 카드를 발급받으라고 유혹했던 이름도 성도 모르는 길거리 카드모집 언니의 얼굴입니다. 분명히 저는 직업도 없다고 했는데…. 신용회복지원위원회에서 만난 신림동 박모씨(24).무차별 발급, 신용불량자 양산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5월 말 현재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사람이 315만여명을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중 절반이 넘는 200여만명은 신용카드 연체로 신용정보기관에 불량자로 등록됐다.신용회복지원위원회(이하 신용회복원)에서 만난 회사원 신모씨(31)는 총 8개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원금과 이자 5,000여만원을 연체했다. 올해 초까지 ‘카드 돌려막기’로 힘겹게 결제일을 넘겼지만 카드사의 신용한도폭 축소로 끝내 결제를 못하고 신용불량자로 등록됐다.그는 “능력도 안되면서 카드로 과소비를 한 것은 내 잘못이지만 소득을 파악하지 않고 서비스한도를 대폭 늘려준 카드사가 원망스러울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신용회복원에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한 그는 “심사위원회에서 워크아웃을 승인해주면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열심히 살며 빚을 갚겠다”고 말했다.주부 최모씨(34)는 남편의 교통사고로 소득이 없어지자 카드로 치료비와 생활비를 충당해 오다 결국 원금과 이자 3,000만원을 결제하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녀는 “주부라서 소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때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며 “연체금의 대부분은 치료비와 생활비였고 카드의 한도폭 조정으로 신용불량이 돼 워크아웃을 신청하게 됐다”고 밝혔다.서울 역삼동 선릉역 주변에 위치한 인터넷 카드대납업체에서 만난 대학생 이모씨(27)는 석 달 동안 카드빚 100만원을 갚지 못해 7월 말에 신용불량자에 오를 처지에 놓였다. 그는 “그동안 과외 아르바이트로 카드를 결제했는데 일자리가 줄어들어 연체를 하게 됐다”며 “졸업반이어서 취업문제도 있으니 카드대납을 고려 중”이라고 덧붙였다.연체금 상환해도 최장 2년까지 기록남아신용카드 관련 법규 개정으로 5만원 이상의 신용카드대금을 3개월 이상 연체하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된다. 수천만원을 연체한 사람이나 5만원을 연체한 사람 모두 기간 내에 금액을 결제하지 못하면 무조건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이다.신용불량자가 되면 일상생활에서 온갖 불이익을 입는다. 우선 신용불량자의 신용정보가 전 금융기관에 알려지기 때문에 신용카드 사용의 제약, 정지를 당한다. 예금통장, 당좌계좌 등은 개설할 수 없고 보증인자격은 상실된다. 급여 및 퇴직금은 압류되고 본인 명의의 부동산(전세보증금), 동산이 가압류 또는 강제 경매조치된다.한마디로 모든 재산상의 법적 권리에 불이익을 당한다고 보면 된다. 이뿐만 아니다. 각종 생활용품(자동차, 휴대전화 등)은 신용구매할 수 없고 비자발급, 취직 등에 제약이 따른다. 또한 본적지와 거주지의 관공서에 비치된 채무불이행자 명부에 신용불량자로 등재될 가능성도 있다.특히 신용불량 기록은 채무를 모두 변제해도 일정기간 그 기록이 보존된다. 신용카드의 연체금이 200만원을 초과하면 그 연체금을 모두 상환해도 연체기간에 따라 일정기간(등록사유 발생일로부터 90일 경과 1년 이내 상환하면 1년, 1년 경과 상환시 2년) 연체기록이 보관된 후 자동 삭제된다.인터넷 사이트 신용불량자 동호회 회원인 임모씨(31)는 “신용불량자로 등록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 앞으로 재산이 거의 없기 때문에 당장 몸으로 느끼는 불편은 없다. 다만 내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하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개통하지 못해 불편하고 취직할 때 신원보증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지만 무엇보다도 가족에게 큰 불편을 끼쳐 송구할 뿐”이라고 말했다.개인워크아웃 등 신용회복제도 활용해야이처럼 한 개인이 신용불량자로 등록되면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자신의 채무를 모두 변제하면 신용불량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신용불량자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다. 그렇다고 신용불량의 그늘 아래에서 자포자기할 필요까지는 없다. 자신의 힘으로 안 된다면 사회제도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현재 국내에서는 다중채무자, 신용불량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신용회복지원위원회에서 개인워크아웃(신용회복지원)을 시행하고 있다. 개인워크아웃은 여러 금융기관에서 신용불량으로 등록된 다중채무자의 구제를 위해 채무재조정을 실시해 신용회복을 도와주는 제도다.다중채무자의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기존의 연체금에 대한 해당 금융기관들의 채권행사는 중지되고 만기연장(최장 8년), 분할상환, 채무감면, 금리인하, 상환유예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신용회복지원위원회 홍보팀 김승덕 과장은 “최저생계비 이상의 소득이 있는 개인 또는 개인사업자가 채무과중으로 신용불량등록, 상환이 불가능할 경우 신용회복원에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하면 협약에 가입한 금융기관과의 채무재조정을 거쳐 경제적인 회생을 지원한다”고 설명했다.또한 김과장은 “현재 신용회복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드빚, 생활고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 20~30대가 상당수”라며 “다중채무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www.crss.or.kr)과 전화(02-6362-2000), 방문상담을 통해 지원받도록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신용불량자로 등록된 후 자신의 채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불불능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최후의 방법으로 개인파산을 신청할 수 있다. 개인파산은 법원에서 채무자의 모든 재산을 금전으로 환가해 채권자 전원에게 공평하게 배분하는 절차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개인파산제도(소비자파산)다.개인파산은 대부분 채무자 본인의 신청에 의해 개시되며 법원은 심리를 거쳐 채무자에게 파산원인이 있다고 인정되면 파산선고를 한다. 일반 파산법(민법)의 파산절차와 달리 개인파산의 경우에 법원은 채무자의 재산이 거의 없으므로 파산관재인의 선임 없이 파산선고와 동시에 파산절차를 종료한다.파산선고를 받은 파산자는 여러 가지 법률상 제한이 뒤따른다. 예컨대 파산자는 후견인, 유언집행자, 공무원, 변호사, 변리사, 공인회계사 등이 될 수 없다. 상법상 합명ㆍ합자회사의 사원은 퇴사의 원인이고, 주식회사의 이사라면 당장 퇴직해야 한다. 또한 파산자는 법원의 허가 없이는 거주지를 떠날 수 없고, 이 파산선고 사실은 신원증명서에 기재돼 금융기관 거래와 취직 등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입는다.특히 파산선고를 받더라도 법원으로부터 면책허가 결정을 받지 않으면 기존 채무는 모두 상환해야 하는 위험도 있다. 하지만 최근 카드사용 등 낭비로 인한 면책 불가 사유가 삭제될 예정이어 파산자의 피해가 줄어들 전망이다. 개인파산은 말 그대로 자신의 미래를 현재의 부채와 맞바꾸는 마지막 선택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한편 다중채무, 신용불량으로 파산자가 된 사람들의 사회적ㆍ경제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개인회생제도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개인회생제도는 파산신청자 가운데 빚을 갚을 의지와 능력이 분명한 사람의 경우 파산을 면제해주고 일정기간(5년) 충실히 빚을 갚아나가면 나머지 빚을 탕감해주는 선진국형 갱생제도다. 지난해 하반기 ‘통합도산법’ 안에 포함된 이 제도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고, 7월 임시국회에 상정될 예정이다.개인회생제도는 채권자(금융기관 등)의 동의과정이 필요 없다. 법원의 재판부가 다중채무자의 의지를 보고 상환능력을 판단한 뒤 일정기간 부채를 상환한 후 나머지 금액을 탕감해주는 것이라 채무자와 채권자간의 채무재조정을 통해 상환조건을 바꿔서 갚아나가는 개인워크아웃제도와는 다르다.이건범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금융구조가 기업금융에서 가계금융으로 변하면서 발생한 개인들의 다중채무, 신용불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원의 명령에 의한 채무를 조정할 수 있는 개인회생제도를 조속히 도입할 필요가 있다”며 “개인워크아웃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신용회복원의 비영리화 조치와 함께 금융선진국에서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신용교육의 실시가 절실하다”고 밝혔다.INTERVIEW / 이건범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하루빨리 개인회생제도 도입돼야’신용불량자 문제의 해결방안은.315만명이 넘는 신용불량자들은 연체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신용정보집중기관에 등록돼 상당한 불이익을 입고 있습니다.현재의 신용정보제도는 소액의 연체자까지 금융사기범으로 몰아 금융회사로부터 신용거래 제한, 채권추심의 도구로 쓰이는 등 채권자 위주의 불합리한 제도입니다.따라서 신용불량자 등록제도를 폐지하고 개인들의 다중채무를 법원의 명령에 의해 해결할 수 있는 개인회생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합니다. 또 개인워크아웃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신용회복지원위원회의 비영리법인화와 역량 확충, 다중채무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신용교육이 절실합니다.개인워크아웃, 개인회생제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현재 시행 중인 개인워크아웃은 채권자인 금융기관과의 사적화의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실효성이 매우 낮습니다. 신용불량자가 300만명이 넘었는데도 개인워크아웃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총신용불량자의 1%도 채 안되는 2,800여명입니다.따라서 법원의 명령에 의해 채무를 재조정할 수 있는 개인회생제도를 도입해 상환의지가 있는 채무자들의 파산을 막고 일정기간 채무를 변제하면 빚을 탕감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개인회생제도를 포함하고 있는 통합도산법이 국회에 계류 중인 만큼 조속한 입법을 기대해 봅니다. 특히 우리나라도 금융선진국처럼 의무적인 신용교육을 통해 신용불량을 미연에 방지했으면 합니다.INTERVIEW / 한복환 신용회복지원위원회 사무국장‘다중채무자 상담·신용교육 시급’신용회복지원위원회는 어떤 조직입니까.신용회복지원위원회는 신용불량자, 다중채무자의 개인신용회복(워크아웃)을 위해 설립된 기관입니다. 신용회복지원협약에 가입한 금융기관 2곳 이상에서 3억원 이하의 채무가 있는 사람으로 채무를 갚을 소득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합니다.채무자가 심의위원회에서 워크아웃이 결정되면 채무자와 채권자간의 채무재조정을 통해 채무상환기간 연장(최장 8년), 분할상환, 이자율 조정, 변제유예, 채무감면 등을 부여해 채무자에게는 상환의욕을, 채권자에게는 채권회수를 가능하게 하는 곳입니다.신용불량자에 비해 신용회복을 지원받는 사람들이 적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하고 있지만 지난해 말 업무를 시작한 후부터 5월 말까지 8,941명이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했습니다. 이중에서 2,792명이 채무조정안을 확정하고 워크아웃에 들어갔으며, 나머지 신청자들은 현재 금융기관과 계속해서 채무조정안을 협의 중입니다.신용회복지원위원회의 목표는.앞으로 신용회복지원위원회는 비영리사단법인으로 등록해 다중채무자, 신용불량자들의 금융상담과 갱생교육, 신용교육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내년에는 주요 대도시에 지방사무소를 열고 주재원을 파견할 계획이며, 현재 진행 중인 지방출장상담도 대폭 늘릴 예정입니다. 신용회복지원위원회는 채무당사자간의 원활한 신용회복과 채권회수의 도움을 주는 전문기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