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카르티에, 프라다, 페라가모 간판 올려… 2004년 샤넬, 2005년 구치 입점 준비

20세기 일본의 근ㆍ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명이 하나 있다. 도쿄의 긴자(銀座)다. 긴자라는 이름이 일본인들의 뇌리와 가슴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패션과 문화, 그리고 첨단 유행이 꿈틀거리는 정보의 발신지이자 역사와 풍류가 살아숨쉬는 낭만의 거리다. 세계를 향한 일본의 자부심이자 근대화의 발자취가 곳곳에 새겨져 있는 추억의 박물관이다. 서구식 디스플레이와 최신 인테리어로 한껏 모양을 낸 상점들이 전부인 것 같아도 전통과 이름을 최고의 가치로 지켜 온 시니세(역사가 오래된 옛 상점)들이 흔들리지 않는 권위와 신뢰를 자랑하는 ‘재팬 넘버원’의 거리다.하지만 긴자는 더 이상 과거의 긴자가 아니다. 얼굴이 바뀌고 있어서다. 긴자에서도 금싸라기 땅으로 통하는 요지마다 구미 업체들이 앞다퉈 새 간판을 올리고 말뚝을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자부심을 대표해 왔던 상업 자본이 손들고 물러난 자리를 유럽과 미국 업체들이 석권하면서 긴자를 떠받쳐온 일본적 컬러와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희석돼 가고 있다.긴자의 변화를 상징하는 가장 최근의 사건은 프랑스의 명품 보석브랜드 ‘카르티에’가 지난 7월19일 대형 직영점포를 오픈한 일이다. 카르티에는 경영부실로 아사히은행과 한몸이 되면서 간판을 내린 다이와은행의 옛 점포자리를 사들인 후 이곳에 대형 점포를 개설했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연면적 400여평의 규모로 들어선 이 점포는 카르티에의 전세계 112개 점포 중 가장 크다는 점에서 오픈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일본 최고의 땅값을 자랑하는 긴자 한복판에 매머드 점포를 개설한 의도를 보여주듯 카르티에는 오픈 첫날부터 고가의 명품 보석으로 고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개당 6,000만엔(약 6억원)을 넘는 시계가 진열됐는가 하면 개당 30만엔을 호가하는 액세서리를 오픈기념으로 한정판매한다며 여성 고객들을 불러모았다.카르티에가 위험을 무릅쓰고 부동산값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일본에 대형 점포를 개설한 것은 충분한 투자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 카르티에 인터내셔널의 베르나르 포나스 사장은 “카르티에는 전세계 매출의 20%를 일본에서 올리고 있다”며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구미 명품업체들의 긴자 노른자위 사냥은 카르티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에르메스’는 지난 2001년 6월 소니빌딩 옆에 대형 점포를 오픈하면서 긴자상권에 일찌감치 교두보를 마련했다. ‘불가리’ 점포가 지난해 10월 문을 연 데 이어 올해는 ‘프라다’와 ‘페라가모’가 인근에서 간판을 올렸다. ‘샤넬’은 2004년 개점을 목표로 일본의 대형 유통그룹 다이에가 소유하고 있던 빌딩 자리에서 공사를 서두르고 있다.‘구치’도 2005년 봄까지 직영점포를 오픈하기 위해 자리를 확보해 둔 상태다.보석업체 중 세계 최고의 자부심을 자랑한다는 ‘쇼메’는 카르티에 지척에서 지난해 9월부터 영업을 시작했으며 ‘코치’는 지난해 5월 에르메스 옆자리에 깃발을 꽂았다.명품업체들은 불황 속 호황 누려긴자에 이미 점포를 열어놓고 있는 ‘크리스찬 디오르’는 대형 직영점포를 새로 오픈한다며 유명 서점이 문닫은 자리를 전격 인수해 화제를 뿌렸다. 크리스찬 디오르는 긴자 책방들의 터줏대감으로 꼽혀온 곤도 서점 부지에 대형 신점포를 2004년 5월 오픈할 계획이다.크리스찬 디오르측은 “2000년 100억엔이었던 일본 법인의 매출이 올해 200억엔을 바라볼 만큼 폭발적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며 “앞으로도 고성장을 자신한다”고 밝혔다.구미 명품업체들이 긴자에 점포를 낸 것은 새삼스러운 소식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언론과 긴자 상인들은 최근의 패턴이 과거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대로변에서 한발 안으로 들어간 뒷길이나 후미진 거리에 점포를 열었던 종전과 달리 이제는 임대료가 비싸더라도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를 선호하는 현상이 부쩍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오랜 역사와 자부심으로 뭉쳐진 긴자 일대에서 목 좋은 점포를 포기한 채 주위 눈치를 의식하며 뒷길 영업에 만족했던 모습이 이제는 사라졌다고 이들은 지적하고 있다.긴자에서도 최고의 금싸라기 땅으로 꼽히는 추오도리와 하루미도리를 겨냥한 명품업체들의 공세는 두 가지 배경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우선 멈출 줄 모르는 땅값하락으로 임대료가 낮아지고 장기불황으로 빈 점포가 늘어난 것이 첫 번째 배경이다.긴자상인연합회의 고쿠헤이 요시오 사무국장은 “땅값하락이 구미 명품업체들의 긴자진출에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임대료가 싼 지역으로 이전하기 위해 문닫는 점포가 늘고 금융기관 통폐합으로 목 좋은 곳의 빈자리가 속출한 것도 명품업체들에는 호기가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명품업체들의 지칠 줄 모르는 긴자상권 사냥에는 일본 소비자들의 유별난 명품 사랑이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 소비자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루이뷔통 일본 법인의 매출은 지난해 1,357억엔으로 전년 대비 15.1%가 늘어났다. 주가가 끊임없이 추락하고 일본 경제가 하루가 다르게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던 시기에 ‘보란 듯이’ 올린 성적이다. 10년 전인 92년과 비교하면 무려 네 배에 가까운 급팽창이다. 루이뷔통 제품을 단 하나라도 갖고 있는 일본인은 전체인구의 4분의 1과 맞먹는 3,00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 일본 언론의 추정이다. 에르메스가 문을 연 2000년 6월의 개점 첫날은 에르메스 쇼핑백을 든 여성들이 긴자를 가득 메우고 점포 앞이 장사진을 이뤘다는 소식이 빅뉴스가 되기도 했다. 때문에 일본 언론은 구미 명품업체를 먹여 살리는 것은 일본 소비자들이라며 더 이상 이들의 봉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합리적이고 건전한 소비관행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촉구했을 정도다.그러나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 일본인들의 명품열풍에 대해 하타 교지로 루이뷔통재팬 사장은 색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일본인들은 좋은 것을 하나 장만한 후 이를 소중히 아끼고 오래 쓰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명품 브랜드에 집착하는 것은 좋은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인들은 세계 정상급의 고품질 물건에 강한 애정을 갖고 있는 셈이지요.”다른 나라 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때가 적지 않지만 명품 사랑은 오래 곁에 두고 쓸 자신만의 소중한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심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해석이다.일본 명품업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명품 브랜드의 진정한 라이벌은 해외여행밖에 없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해외여행을 한 번 하려면 20만~30만엔의 돈이 필요하니 명품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때 젊은 여성들이 겪는 갈등은 해외여행뿐이라는 것이다. 명품을 하나 장만할 때 고객을 망설이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해외여행이지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는 명품의 경쟁자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인 셈이다.구미 명품업체들의 긴자상권 사냥이 어느 정도까지 달아오를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명품업체들의 새로운 황금상권으로 주목받고 있는 오모테산도와 록본기도 쇼핑 1번지 긴자의 명성을 위협하고 있어서다.하지만 일본의 넘버원 상권으로 대접받아온 긴자의 이미지와 얼굴은 이들의 잇단 진출로 고유 컬러를 더 이상 고집하기 힘들게 됐다. 일본 경제가 불황의 늪을 헤매고 긴자 상인들이 자존심을 접을수록 구미 외국자본들의 긴자 성형수술에는 탄력이 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