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제 408호 (2003년 09월 29일)

지역규제 풀리자 너도나도 술판매

기사입력 2006.09.04 오후 12:00

외견상으로는 닮은 점이 많아 보여도 한국과 일본의 ‘술문화’ 차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음주습관도 다르고 주당들이 선호하는 술의 종류도 크게 차이가 난다. 한국인들이 독한 술을 빠른 속도로 마시는 편이라면 일본인들은 알코올 도수가 약한 술을 천천히 즐긴다. 여러가지 재료를 섞어 만든 퓨전스타일의 술이 수없이 많이 나와 있고, 이들이 인기를 누리는 것도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본의 술문화 특징 중 하나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는 술을 파는 장소와 시간의 제약이다. 주택가 후미진 구멍가게나 슈퍼마켓, 편의점 등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게 술을 파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지만 일본은 다르다. 취급면허를 갖고 있지 않은 소매점은 술을 팔 수 없다. 아무리 크고 번듯한 대형할인점이라 해도 면허가 없으면 술병을 진열조차 할 수 없다. 사방에 널려 있는 것이 편의점이라지만 술을 파는 곳이 확연히 구분돼 있다. 술이 들어 있는 자동판매기도 오후 11시가 넘으면 동전을 아무리 넣어도 묵묵부답이다.

이처럼 한국과 다른 사정을 갖고 있는 일본이 지난 9월1일부터 사상 초유의 ‘술전쟁’에 돌입했다. 열도 전체가 술싸움으로 가는 곳마다 한동안 소란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유는 단 한가지다. 법으로 묶여 왔던 규제가 풀리면서 술판매가 원칙적으로 자유화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술을 취급하는 판매점 면허 교부에 대해 인구와 거리 기준의 두 가지 잣대를 적용해 왔다. 예컨대 인구 1,000명당 1개소의 비율로 면허 교부를 한정한다든지 점포간의 거리가 100m를 벗어나 있어야 한다든지의 규제다.

일본 정부는 98년 3월 주류소매업 면허의 규제완화추진 3개년 계획을 확정한 후 같은해 9월 인구 기준을 대도시는 1,500명당 1개소, 지방도시는 1,000명당 1개소, 한국의 읍ㆍ면 단위에 해당하는 곳은 750명당 1개소로 정해놓았다. 그후 2001년 1월 기존 점포로부터 50~150m 이내의 점포에는 면허를 내줄 수 없도록 한 기준을 폐지하며 규제 강도를 부분적으로 완화했다. 2002년 9월에는 인구 기준을 더 부드럽게 손질, 대도시는 인구 1,100명당 1개소, 지방도시는 750명당 1개소, 읍ㆍ면 단위에 해당하는 곳은 500명당 1개소로 문턱을 낮췄다. 그리고는 지난 9월1일부터 인구 기준을 완전 폐지, 원칙적으로 면허 발급에 제한을 없애면서 면허를 가진 점포는 술을 취급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 언론과 주류업계 관계자들은 9월1일부터 단행된 자유화 조치가 일본 술시장은 물론 소매업 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들이 점치는 변화는 주류판매점의 급증과 이로 인한 업소간 경쟁 격화다. 전문가들은 자유화 전에는 11만개에 달했던 일본 전역의 주류판매점이 앞으로 2년 내에 적어도 1만개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술을 취급하지 못해 애태웠던 대형편의점들은 물론 양판점 등 대다수 소매업체들이 주류를 집객력 강화의 신무기로 활용할 것이 뻔하다는 분석에서다.

주류업계 “전체 파이에 변화 없을 것”

편의점들은 이미 상당수 점포에서 술을 들여 놓기 시작했으며 양판점, 대형 슈퍼마켓도 술 진열대 설치에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과 주류업계 관계자들은 자유화 조치를 계기로 술의 유통패턴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데도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주류 하나에만 의지해 왔던 종전 점포들의 장사 방식과 달리 외식, 비디오대여점, 소규모 꽃가게들도 술 판매에 뛰어드는 곳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이다. 피자와 맥주가 훌륭한 콤비메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 배달피자업체들 중 상당수는 이미 면허를 신청했다. 비디오대여점들은 비디오를 빌려가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원스톱 쇼핑이 가능하도록 점내에서 일부 주류를 팔기 시작했으며 꽃가게 등은 와인을 콤비상품으로 꼽고 판촉 공세를 벌이고 있다. 저가격을 무기로 일본 서민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100엔숍들도 주류라는 노다지 상품을 그냥 놓아둘 리 없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점치고 있다.

판매자유화는 자금과 조직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는 영세 판매점의 도태 등 기존 판도에도 상당한 변화를 안겨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와 함께 소규모 판매점에 치중해왔던 주류회사들의 영업전략 또한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대물림 생업으로 주류판매점을 이끌어온 소규모 자영업주들은 가격경쟁에서 양판점, 슈퍼마켓, 100엔숍 등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고 있다. 자민당과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서는 중소판매점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 된다며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지난 4월 긴급조정지역 제도가 도입됐다.

자유화 이후에도 후발 경쟁업자들의 신규 참여를 1년간 동결하는 조정지역은 전체의 30%에 해당하는 922개가 설정됐고 이에 따라 영세업자들이 당분간 태풍을 비켜갈 수 있게 됐다. 주류업계는 이와 관련, 규제 완화, 자유화의 바람이 차단된 곳이라는 의미로 이들 조정지역을 ‘역특구’라고 부르며 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판매자유화는 핵심 유통채널로 중요도가 한층 더 높아진 양판점, 슈퍼마켓 등을 둘러싼 주류업체간의 격전에도 불을 댕긴 상태다. 아사히맥주는 이미 자회사인 아사히음료의 직원을 포함, 1,500명으로 구성된 판촉 전문회사 ‘스마일 서포터’를 지난 4월 발족시키는 등 대형유통점 공략에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스마일 서포터의 직원들은 주류판매점은 물론 대형유통점을 아침 일찍부터 훑고 다니며 제품의 진열상태를 점검하고 점포 잔일을 도와주는 등 판촉공세의 최일선에서 뛰고 있다. 아사히맥주는 이번 자유화 조치로 맥주, 발포주에서 차지하는 양판점의 비중이 올해 초 예상치의 약 55%에서 63% 이상으로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주류회사들은 달라진 시장환경에 맞춰 신제품 개발을 서두르고 배달전문 외식업체들과의 제휴를 모색하는 등 판매싸움의 주도권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삿포로맥주의 경우 배달피자업체를 대상으로 개당 100엔 정도의 초소형 와인을 개발, 판매활동에 들어갔으며 식물성섬유가 혼합된 발포주를 드러그스토어를 통해 집중적으로 선보일 방침이다.

하지만 자유화 조치가 술시장에 격랑을 몰고 온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 일부 주류업계 전문가들은 전체 파이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며 담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기린맥주의 한 고위 임원은 “술시장 자체가 커지는 것은 아니므로 점포 한 곳당 매출은 전보다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주류유통 전문업체의 한 관계자는 “판매업소 수는 늘어나지만 인건비를 감안할 때 영업사원을 증원할 수는 없다”며 “중소판매점보다 대형유통점에 치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의 알코올음료 소비는 소주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종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경기침체에 따른 소비자들의 구매력 약화 때문이다. 업계 추산에 따르면 지난 94년 6조8,710억엔에 달했던 시장규모는 매년 뒷걸음질을 계속하며 2001년 5조7,150억엔까지 주저앉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맥주 판매는 지난 7월까지 40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을 거듭했다.

“병원이나 학교 주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술을 팔도록 허용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전국소매주류판매협동조합의 고다 쇼이치 회장은 대형유통점들의 잇단 참여와 이로 인한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폐업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주류메이커들과 언론은 자유화 조치가 술소비량 증가의 기폭제가 되지 않을까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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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2:00